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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초이스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6월
평점 :

나에게 있어 이영도 님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다. 나의 10대 중반 ~ 20대 초반
에 걸쳐 심적인 부분, 철학적인 부분에 상당히 많은 의문을 품게 했고. 답을 찾게 했다. '너무
오버 아닌가?', '장황하기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다. 어떤 고전이나 오래
오래 전해내려오는 유구한 역사가 담긴 책이 아니라 판타지가 무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드래곤 라자>라는 판타지 소설을 접했
고, 어떤 만화책보다 어떤 소설책보다 매력적 인 세계관을 가졌던 그 책은 나를 순식간에
빠져들게 했다. 수업시간에 읽다가 키득거려서 혼난 적도 많았고, 그때 당시 소설책이 너무
비싸서 친구와 같이 대여해서 읽었는데 서로 먼저 읽겠다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그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였고, 그 안에 담겨있는 모험, 판타지, 심오한 철학들은 내가
철이 들고 나서도 계속 계속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 당시 오타쿠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내가 바로 <드래곤 라자> 덕후였다. 세이클럽
에서 이 책으로 퀴즈를 내기도, 맞추기도 했고 노트에 내가 좋아했던 구절을 한자 한자
손으로 써 내려가기도 했다. 주인공인 후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후치보다 어렸는데
지금은 후치만한 아들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후치를 보며 후치가 후안무치의 줄임말(사자성어) 임을 알게 되었고, 용감하고 위트 있는
소년에 대한 로망을 품었고, 길시언을 보며 왕좌의 고독함(?)을 대신 느껴보았고, 제레인트
에게서 종교의 의미를 배웠으며, 이루릴에게서 냉소란 것을 그리고 모두를 사랑하며 변해가는
법을 배웠고, 페어리퀸에게서 내 주변 모든 사람에게 내가 투영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영도 님이 <드래곤 라자>이후 아무 책도 안내다가 10년 만에 <오버 더 초이스>를
내서 내가 이렇게 오버 오버해서 말을 하는 건 아니다. 그 뒤로도 많은 책을 내주셨지만
내 마음속 넘버원은 <드래곤 라자>라는 것. 그래서 이런다. 말이 많은데 이제는 신간 이야기
를 해야지. 이건 <오버 더 초이스>에 관한 서평이니까.
이영도 님의 신간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머 이건 꼭 읽어야 해 하면서 서평을 신청
하고 서평에 당첨이 되었을 때도 난 내가 이렇게 <드래곤 라자>에 대해 구구절절이 추억
팔이를 할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냥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읽고 난 뒤 책표지를 보면 이보다 더 나은 표지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잘 표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 컷 한 컷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이야기하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책도, <오버 더 초이스>
도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 소설이 뭔지 잘 모른다면 쉽게 말해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반지의 제왕>, <호빗> 이런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버 더 초이스>는 <오버 더 호라이즌> 이후 새롭게 나온 이영도 님의 신간이며 배경과
주인공이 같다. '티르 스트라이크'라는 보안관 보조가 1인칭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으며
그래서 사건을 멀리서 보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그 속에서 함께 사건을 풀어나가고 모험을
겪는 느낌이 든다. '티르 스트라이크'는 전직 제국 군 12군단 검술 사범으로 그 위명을 날렸
으나, 여자 친구를 위해 군수품 빼돌리다가 적발되어 불명예 제대하고 북쪽으로 와서
'이파리 하드 투스'라는 종족이 오크인 보안관의 보안관보를 하고 있다.
어느 비 내리는 날, 카닛 종족의 6살짜리 소녀의 시체를 폐광 환풍구에서 끌어올리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태어난 지 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소녀는 지진이 나 움푹
패어진 폐광 근처에서 놀다 환풍구로 빠져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그 소녀를 살리기 위해
며칠 동안 있는 방법 없는 방법 모두를 동원했지만 소녀는 결국 죽게 된다. 소녀의 시체를
끌어올리고 바로 관에 넣어 장례를 치르려던 찰나 소녀의 아버지는 그 관을 들고 멀리 도망
가 버린다. 도망가는 소녀의 아버지를 쫓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8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전복되어 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8마리의 말은 모두 죽어있었고 그 마차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이카드 덴워드'는
혼수상태로 옮겨지게 된다.보안관보 '티르'는 '이카드'라는 소년을 옮기다 마차에서 소년과
어울리지 않는 검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티르'는 검을 소유하며
'이카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마음 아픈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던 찰나 설상가상으로 죽은 소녀의 어머니는 독미나리를 먹고
자살기도를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위기는 넘기지만 독미나리의 독 때문인지 깨어난 소녀
의 어머니는 칼을 찾아 지상과 지하의 주인에게 넘겨주면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켜줄 것이라
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나타난 15세의 소년 '이카드 덴워드'. 그와 함께 나타난 검,
그리고 지상과 지하의 주인. 과연 이런 것들이 우연일까?

죽은 소녀의 어머니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어차피 모두 부활할 수 있으니 너희도
자식이 죽는 고통을 한번 겪어봐라라는 이상한 정신 상태로 마을의 아이들을 공격하게 되고
마을의 보안관과 보안관보인 '티르'는 그녀를 말리고, 쫓고, 체포하면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게 된다.
처음에 '티르'는 지상과 지하의 주인을 악마라고 생각한다 하늘은 신의 영역이니까, 그리고
지상이 신의 영역이기에는 너무 많은 아이러니와 고통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중반부에 밝혀
지지만 지상과 지하의 주인은 식물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 그거 맞다.
식물은 지상에서 자라며 지하로 뿌리가 자라니까. 식물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몸에 걸치고 있고, 먹고, 마시고, 집을 짓고, 이동하는 모든 것에 식물이 존재한다.
단지 자연, 배경, 힐링의 대상만이 아닌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도 있는 식물이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어마어마한 부활이라는 무기로 우리 인간(위어 울프,
트롤, 오크 등등 모두)에게 거래를 시도하려고 한다면? 책 속 이야기에 따르면 식물은 인간
에게 정해진 평균수명을 살 때까지 계속 부활시켜줄 테니 식물을 태우는 행위만은 하지
말라고 한다. 생각보다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인간은 불을 이용하는 유일한 종이고
불로 문명을 발전시켜온 종이기도 하다. '이카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 기사단의 일원
이었고 식물을 모두 태워 없애겠다는 당차고 패기 어린 계획을 실행해 나간다.
책을 읽으면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 말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6살밖에 살지 못한
하나뿐인 딸을 읽은 엄마, 아빠의 마음을...그리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잃은 사람의 슬픔을
우리가 짐짓 알 수는 없으니까. 책 속에서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과연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람을 되살린다는 건 어떻게 보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그릇과 안에 담긴 기본적인
사실만이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그 사람이 아니라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텐데 예를 들어 말하면 이런 거다. 책 속에서 '케이토'가 예를 든 것처럼.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갖고 싶었던 책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 책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읽고 또 읽다가
그 책을 다른 사람의 실수로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사람이 정말 미안하다고 그것
과 똑~같은 책을 준다면 새 책과 잃어버린 책은 같은 책인 것일까? 과연 그렇다면 돌아온
사람을 반겨야 할지, 피해야 할지 나로서는 어려운 문제이다.
이영도 님은 항상 이렇게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문제를 던지고, 글로
설득하며 생각하지도 못할 결론으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그 결론에 대해서
또 한참을 생각하게 한다. 부활을 시켜줄 테니 우리를 태우지 말라는 식물의 거래와 당장
식물을 태우지 않으면 겨울조차 버티기 힘든 인간(그래도 다시 살아나겠지만) 그 사이에서
오크 보안관과 인간 보안관보 그리고 그들이 사는 작지만 전혀 작지 않은 마을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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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3
"문제요?"
"묻지 말아야 할 걸 묻는 것. 그러다가 덜컥 대답을 알아버리면 어쩔 건데.
그러면 문제가 정말 심각해지지."
"예?"
"어떤 금액으로든 삶에 값을 매기면 안 돼. 일단 가격이 책정되면 그다음엔 거래도 가능해지거든."
p.131
확실히, 같은 공기를 나눠쓰는 자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일만으로도 생존 시간의 많은 부분
과 수입의 상당량을 소비해야 한다. 이미 호흡을 그만둔 이웃까지 업고 걷기에 인생은
쉬운 길은 아니다. 그들이 불쑥불쑥 일어나 우리 사이에 서면 삶이 피곤해진다.
p.242
그동안 고심하던 보안관은 시장에게 아인켈 우체국장과 어부 마하단 쿤, 사냥꾼 니바이 알루
스, 음악교사 케이토를 사무실로 좀 보내주십사 부탁했다. 그 인명들은 다시 몬도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 무해해 보이는 목록을 우리 소도시의 사정에 어두운 이들을 위해
바꾸면 이렇게 된다. 트롤, 마법 검사, 호랑이 아니제이, 위어울프를 좀 데려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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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정도의 소설이었으면 좋았을듯한데 장편소설이라 군데군데 이야기가 루즈해지는
부분이 있어 읽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렸고, 많이 끊어 읽었다. 중후반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이영도 님의 특유의 재치 있고 심오한 글들을 읽고 있자니
나도 이 마을 속 주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티르'는 내가 알고 있던 '티르'와 성격이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다음 달에는
<오버 더 호라이즌>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볼까 한다.
책을 읽을 때 글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적어둬야지 하는 책이 있고, 재밌고, 생각할만한
글이 있어 여러 번 계속 곱씹어 읽게 되는 책이 있는데 <오버 더 초이스>는 후자다.
사실 적어두고 생각날 때 읽어보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만, 표현이 상당해서 그리고
내용이 굉장히 재치 있어서 같은 글을 읽고 또 읽는 것도 큰 기쁨이다.
시간에 쫓기듯 읽지 않고 싶어서 계속해서 앞부분을 읽고 또 읽다 보니 서평 날짜가 지나서
늦게 글을 쓰게 되었지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도 후회
는 없다. 오랜만에 읽은 이영도 님의 글은 여전히 재밌었고, 어려웠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