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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캘리북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8년 8월
평점 :

아니, 이외수님이 캘리그라피라니... 책 제목만 보고는 캘리그라피를 알려주는 책인 줄 알고 몹시 당황했다. 나에게 있어 캘리그래피는 언젠가 꼭 배우고 싶은 로망과도 같은 것인데 이외수 님과 캘리그라피라니 뭔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 왠지 또 서예나 이런 느낌으로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총 50편의 캘리그라피와 캘리그라피 뒤쪽에 이외수 님의 글이 적혀있는 카드로 구성되어있다. 처음 받아보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이외수 님의 캘리그래피에 빠져든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책과 다르게 엽서를 모아둔 것처럼 낱장으로 되어있어 읽기는 조금 불편하지만 다음 글귀는 무엇일까 그리고 뒷면에는 어떤 글들이 적혀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한 해가 시작되는 봄부터 다시 한 해를 돌아보는 겨울까지 이외수 님이 나무젓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캘리그라피에 컬러링을 입히고 뒤쪽에는 일상 속 생각을 모아 적은 것이라고 한다. 나무젓가락으로 쓴 캘리그라피도 신기하고 300여 점 중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 50편을 수록했다고 하니 어떤 글귀들이 들어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낱장으로 모아둔 책상자도 꽤 신선한데 이외수 님은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생각이 보다 확장되고 친근해질 수 있도록 일부러 낱장으로 구성하여 하나의 '생각 상자' 안에 담았다고 한다. 그런 깊은 뜻을 몰랐다는 게 좀 부끄럽군...
나는 이외수 님의 글을 읽어 본적 없다. 책도 취향을 많이 타는 편이고 올해 들어서 여러 종류의 책을 읽어보려 노력 하긴 했지만 서평을 신청하고도 손이 안 가는 책이 있고, 아직 서평을 쓸 날이 안되었는데 읽어보고 너무 재밌어서 쓸 날 만을 기다리는 책도 있는 것처럼 여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고 관심이 많은 것만 챙겨보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이외수 님의 캘리북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도 처음에는 무심하게 읽어내려갔다. 캘리그라피 한번 보고 뒤쪽 글 보고... 그러다 빠져드는 글귀들이 생겨났다.

새 한 마리만 그려 넣으면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글도 좋고, 자기계발 책도 좋고, 철학 책, 심리 책 모두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런 글은 정말 좋다. 뭔가 옛 선조들의 지혜와 로맨틱함이 공존하는 느낌이 들었다. 비유가 이상하지만... 운치 있다고 해야 할지 여하튼 매력적이다.
글을 읽으면서 이분은 이런 분이고 이런 느낌의 글을 쓰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작가들은 글이 끝날 때까지 내가 누구의 글을 읽는지 모르게 특색이 없기도 하고, 문장이 정리가 안되어서 여러 번 읽어야 이해가 되는 글을 쓰는 분들도 있다. (물론 내 이해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도 인정.) 이외수 님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이분의 글을 잘 알지는 못해도 어떤 글을 쓰는 분인지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신기했다. 자기 느낌이 확실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내가 이렇게 평가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티비에 나오는 것만 보고 어떤 분인지 잘 몰랐는데 이런 편견을 가져서 괜히 죄송했다. 글을 쓰는 센스나 유머에서 연륜이라는 게 느껴졌다. 어떤 문장은 내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괜한 농담에 나도 따라 웃기도 하고, 실없는 농담에 피식하고 콧바람을 빼기도 한다. 소설가는 소설가다.

젓가락으로 꾹꾹 눌러 담은 글에서 이외수 님의 마음이 묻어나고, 귀엽게 컬러링 된 부분은 또 그 부분대로 매력적이어서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보게 된다. 뒷면은 또 어떻고.

깨알 같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이 또한 보는 재미가 있다. 처음에 캘리그라피 문구와 뒤쪽 글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재밌는 글귀들도 많이 나온다.

<근심 출입 금지 구역> 왠지 내 방문에 붙여둬야 근심이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아서 내 방문에 떡하니 붙여뒀다. 엄마가 보시고는 이게 뭐냐고 물으시는데 그냥 웃었다. 내 방에만 금지시키는 건 좀 이기적인 것 같은데 현관문에 붙여둬야 하나. 문이든 마음이든 어느 곳으로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근심을 해서 좋을 거 하나 없고 근심의 대부분 중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마지막으로 상당히 와닿은 글귀.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해야 할 그것, 존버.
이 글로 마무리해볼까 한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면 못 버틸 일이 세상에 어딨겠는가. 우리 모두 우리네 인생 열심히 버텨보자.
이외수 님의 친근한 캘리그라피와 함께 촌철살인의 글들 재밌게 읽었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특이한 책의 구조도 좋았고,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도 상당히 괜찮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 나도 이런 책 한번 펴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