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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ㅣ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평점 :

언제부터였을까. 업무를 시작하려 자리에 앉았을 때, 생각을 정리하기에 앞서, 원하지 않던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을 때. 입으로 혹은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그 말 '괜찮다, 괜찮다.' 언제부터인지 그 말은 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고, 시작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 괜찮다.
그래서 책 제목에 유달리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부터 몸 상태가 별로였다.
주말까지는 분명히 괜찮았는데 한 주가 시작이 되고 내 아픔도 시작되었다. 쇼핑하는 것처럼
병원 순회를 다녀오고 집에 와 앓아누웠다. 약기운 때문에 세상이 빙빙 돌고 몽롱한 상태
에서도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픈데도 회사를 안 가서 엄청 좋다는 철없는 생각
과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길래 몸이 나에게 시위를 할까 하는 위기감.

빙빙 도는 상태에서 잠도 오지 않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들어서 책을 펼쳐들었다.
솔직히 고백하는데 작가님이 이야기하는 글, 그림, 작가는 대부분이 모르는 이야기, 본 적
없는 그림, 읽어 본 적 없는 글을 쓴 작가들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섭섭했는데 그럼에도
글을 읽으며 나는 위로받기 시작했다.
책 표지를 감싸고 있는 잔잔한 그라데이션처럼 함정임 작가님의 글은 요즘 어때? 잘지내?
라는 오랜 친구처럼 나에게 안부를 물어온다. 아니, 잘 모르겠어라고 말을 하고 싶다가도
혹여나 나를 신경 쓸까 그럼~ 잘 지내지라고 말을 하고 싶다가도 거짓말은 하기 싫어서 하
는 말, 그냥 뭐 괜찮다며 얼버무리는 그 말.
이 책은 함정임님의 짧은 에세이 60여 편과 작가님이 찍은 흑백의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내가 이런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소설가는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도 가봤고 저기도 가봤고, 창을 좋아하며, 박물관을 사
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 일주일에 두어날 은 창이 넓은 달맞이 언덕의 서재에서 글을 쓰고,
바다를 보고 품는 사람. 하지만 곧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끌렸던 건 이 분의
문체였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야 다른 것이고, 모르는 분, 모르는 사람이 쓴 글을 통해
공감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작가님의 글은 담담하면서도 사람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는 상냥한 위로를 가졌다.

그래서 좋았다. 이해를 하지 못한 글은 이해를 못 한 채로 읽고, 공감하면서 많은 생각이 드는
글은 잠시 책을 접어두고 내 생각을 글로 썼다. 엎드린 채 써서 엉망진창이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읽어보니 무슨 소리를 썼는지 도통 알 수는 없게 되었지만 나는 그 시간들이 좋았다.
이런 나를 보듬어 주고 기대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 속에서 마주한 나의 고향, 부산. 부산에서 글을 쓰는 분이라 더 반가웠다.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 했어도
공포나 불안이 아니면 체념이,
그리움이나 애틋함이 아니면
덧없음이 도사리고 있다.
하루하루 별일 없기를 기원하고,
뒤돌아 안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여기에 모인 글들은
바닷가 서재에서
불안과 공포, 체념과 덧없음을 떨치며
추모의 마음으로
애도 일기를 쓰듯
건져 올린 하찮지만
고유한 삶의 편린들이다.
유월을 떠나보내며
언니의 보호자가 되어 이틀을 꼬박 병실에서 보냈다. 졸지에 환자복을 입고 있는 언니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도 낯설었다. 언니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대기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여러 역할 속에 살아왔지만, 나는 유독 보호자 역할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이름을 바꾸는 행위, 그것은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 나아가 자신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고, 적극적으로
미래를 탐색하는 일이다.
소설은 자기 안에 억눌린 자아에 귀를 기울이고, 숨을 터주는 것부터 출발한다.
차마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드러내놓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