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시한부 인생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즐기기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싫어할 지경이다.

그 큰 이유는 대부분이 통속적이거나 결말이 예정되어 있거나 찜찜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자 생각해보자.

사랑하던 사람이 시한부로 죽게 되어 있다.(결말 예정)

죽은 순간까지 애달프고 애달프고 눈물이 흐른다.(주인공들의 신파 예정)

죽고 나서 혼자 남은 한명은 외롭거나 절망적이다.(희망적이지 못한 메시지)

 

여기에 무슨 소설적 트릭이나 암시가 끼어들 틈이 있으며

소설의 결말에 대한 무슨 두근거리는 궁금증이 느껴지겠는가?

(물론 추리소설이나 탐정소설이라면 좀 틀려지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난 애초에 이 소설을 심드렁한, 삐딱한 마음으로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던 여인이 죽었다구? 그것도 젊은 나이에 병으로?

그래서 이 남자가 절망중이라구?

 

그. 래. 서.?

작가님! 더 할 얘기가 있습니까?

주저리 주저리 값싼 감상을 늘어놓으시려구요? 주인공의 입을 빌어서요?

 

 

.................

 

그렇고 그런 얘기일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작가의 문체가 투명하고 심리 묘사가 잘 되어 있다고 한들

신파의 공식을 어찌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소설은 신파의 공식을 전혀 다른쪽에서 무시하고 들어왔다.

 

시한부 인생의 여주인공인 요코는 죽은 순간까지 "행복하다"고 말하고

"죽는 것이 무섭고 슬프다"가 아닌

"내 자신에게 긍지를 느끼게 해줘서 고마와요"라는 마지막 진심을 남긴다.

 

기실 이 소설에서 죽고 사는건 큰 문제가 아니다.

두 주인공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남자 주인공인 야마자키의 어린 시절의 여러가지 회고(주로 좋지 않았던 기억들)와 맞물리며,

(그것은 야마자키가 요코를 만나기 한참 오래전의 고릿적 이야기들이고 요코와는 관계가 되지 않는다)

혹은 현재 자신의 인생의 수레바퀴와 맞물리며

야마자키가

스스로가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고

참담했던 기억에서 회복하는,

그 계기가 되는 요코와의 만남에서 '남은 것'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 '남은 것'은 참담했던 과거로부터의 회복이고

현재를 살아갈 용기이고

참담한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자신감이다.

그 모든 결심과 의지는

"내 자신에게 긍지를 느끼게 해줘서 고마와요"라는 요코의 한마디에서 온다.

 

두 사람의 사랑 때문에

요코가 자신이 자신인 것에 긍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야마자키도

상대의 사랑으로 인해 여러가지 상처들로부터 회복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된 그런 자기 자긍심으로 말이다.

(현재 요코의 죽음도

야마자키에게는 과거의 것들과 또 연관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로 등장하겠지만

이제 야마자키는 약한 자신의 모습에서 비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코의 병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눈물없이 볼 수 없는"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청정해저서

숲속의 오솔길이라도 산책하며 명상이라도 하는 듯한 그런 투명한 감상을 준다.

(둘은 죽음을 미워하며 현실을 비관하기 보다는 둘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위한

기꺼운 대화의 나날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죽음을 노래한 비관적 스토리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간의 삶을 찬양하는 희망적인 스토리이다.

 

이 소설은 시한부 스토리라기 보다는

삶과 죽음, 희망과 기대, 그리고 따뜻한 마음의 스토리이다.

(값싼 통속의 장면이나 고민은 없다.

사실적인 묘사 속에 인간의 진심과 고민과 갈등과 공감이 감정적 역류없이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의 입을 빌어 표출되는  작가적 어법이 상당히 철학적이고 내면적이고 자기 분석적이라

"난 단순한 스토리가 좋다"라는 독자라면

하품을 연달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련된 문체와

어떤 보편적인  소재를 바라보는 작가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가진 소설을 궁금해하는

호기심 많은  독자라면,

혹은 평소에 이런 저런 가능성에 귀와 마음을 열고 궁금해 하는 독자라면

이런 방식의 연애 소설에

깊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번 읽고 공감해볼만한 소설.

 

소설의 소재는 "희망이 없는"현실과 미래를 묘사한

비극지상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내면 여기저기서 비치는 작가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놀랄정도로 현실지향적이고도 긍정적인데다가

그 외면과 내면의 갭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유연한 소설적인 연출로

작가의 메세지가 유려하게 , 그리고 공감적으로

가슴에 스미는 모양이다.

 

아래 귀절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많이 있다.

 

<인상깊은 귀절들입니다.>

 

나에게 긍지를 주어서 정말, 정말 고마와요.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안녕.

 

그것은 이 불확실한 인생에 있어서 그녀가 확실히 매달려왔던 물웅덩이처럼, 설령 작더라도 확실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행복하다.'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 발견한, 그것이 최후의 물웅덩이였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는 생기 있고, 빛이 있고, 살랑이는 바람도, 바다도 있다. 이곳이 설령 죽기 위한 거리일지라도.

 

요쿄라는 인산이 살아온 길을 무엇보다 웅변해 주는 것이 그녀가 찍은 사진이었다. 태어나고 죽는, 그 의미를 해명하고, 증명하며, 계속 이야기 해온 것이 요코가 필사적으로 찍어온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이다.

 

 

죽을 몸이 되니 알겠는데요, 죽는거 별거 아니에요. 괜한 허풍이에요. 솔직히 말해 무섭고, 외롭고, 화나고, 그런 감정들은 물론 있죠. 하지만 그것들을 이겨낼 만한 즐거운 기억이 내겐 많이 있어요.

 

죽는걸 확인하는 검사같은거 이제 안 받을래.

 

그것이 설령 붉은 달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신경쓰며 살기 보다는 모른채 그때를 맞는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오사키 요시오라는 작가가 쓴 책은 처음 읽어 봤는데

아마도 보지 못했다면 후회할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라는 단편을 읽고 난 감상은 그러하다.

 

일본 작가들이 내면을 시니컬하게 탐구하는데는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말은 가끔 들었지만

(흔히 멋지다는 둥 세련되었다는 둥)

이 책을 읽어 보니 "그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며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뭉글뭉글 솟아났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알고 싶었었는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소설의 영상 속에서 대사와 독백으로 선명히 보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혹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구나" 싶은 반가움의 밀려옴이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내가 소설속에서 좋아하는건 은유나 비유나 암시와 같은 장치들이다.

드러내놓고 말하는것, 돌발적인 행동의 연속에서 외형적인 스토리에 휩쓸려 가는 것에는 그닥 흥미가 없다. 진정한 글읽기의 매력은 독자의 상상력을 발현속에서 온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단편 하나만 봤을 뿐이지만

이 작가는 그 여백의 미, 간극의 미, 의미없어 보이는 행동과 대사의 미, 시간차의 미를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는 작가이다. 구차한 설명은 없지만 주인공의.. 잠시의 침묵 후 내뱉는 짧은 한마디..가 절실하게 독자를 소설 속으로 감정이입시킨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화려한 색채로 질서있게 가득찬 서양화라기보다는 배경 공간이 많은 무채색의 수묵화 =-그러면서도 화려한 색채보다 인상적인-느낌이다.)

 

사실 나는

주인공 야마코토군에게 공감을 느꼈고 그의 사고 방식에 그대로 몰입해 버렸다.

 

작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독특한 사고방식과 생각을 가진 남자 주인공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작가 스스로의 철학성(여기서는 남의 철학이 아니라 작가가 평소에 생각한 작가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주제로 소설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와 체스를 두는 주인공, 결론이 없는 게임, 결론이 없는 인생, 조각에서 느끼는 인생의 의미, 조각에서 느끼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 인간이 무의미한 물건을 만든다는 것...

 

까탈스러운 주제라면 이 소설은 지루할까 싶겠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독자는 각자 다른 철학을 가진 세명의 주인공의 관계가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을 보면서 결말을 궁금해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서 돌발적인 캐릭터는 역시 여자 주인공인 요리코. 그러나 마지막에 충격을 주는 캐릭터는 다른 남자 주인공인 다케이다.)

 

잘 된 스토리는 작가가 만드는게 아니라 주인공들이 창조해 내가는 스토리라고 했던가.

 

그 말 그대로 이 소설은 세명의 서로 다른 주인공이 각자의 개성과 성격대로 어울리거나 맞부딪치거나 회피하거나 비밀을 간직하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닿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주인공들의 독백과 사고방식이 스토리에 세련미와 감각과 철학을 불어 넣었다.

 

작가의 철학이 드러나는 인상적인 대목을 몇 대목 소개할까 한다.

 

'저 조각상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어떤 의미를 전해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머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조각상의 의미는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저 그 존재를 느낄 수만 있으면 둘의 관계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여기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서로 이해나 소통이 불가능한)를 읽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이라도 존재 자체를 존재 자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하는..

 

"네게 체스가 사유하는 행위 그 자체의 추출이고 실현이라고 한다면,

여기 있는 조각은 존재 그 자체의 추출이고 실현이야.

전혀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들 역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거야"

 

"의미라든가 무의미라든가 하는 것 역시 인간의 억지일 뿐이지. 조각의 진정한 가치는 존재 그 자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어"

 

"내가 말이야 여기에 와서 한가지 느낀 건,

인간에겐 의미가 있는 물건보다는 무의미한 것을 만드는 쪽이 훨씬 더 어렵겠구나! 하는 것이었어"

-철학은 무의미하고 체스 연구도 무의미하지만, 혹은 조각상도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야마모토군의 인생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남들과 같은 유의미한 인생을 사는 것보다도

철학과 사유속의 무의미한 인생-결과나 답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더 독특하게 가치로운 일이 아닐까

 

'체스를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오로지 회사에 얽매여 눈앞에 있는 것만 믿고 거기에 매달려서 살아가는 당신이, 어떻게 체스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의미라는건 돈인가? 지위인가? 명성인가? 정말로 생의 의미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은 살아가는가?'

 

'엘리시오는 어째서 구덩이를 끊임없이 파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했던 것일까?'

====================================================================================

 

- 마지막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 한번은 심각하게 되새기며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