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시한부 인생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즐기기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싫어할 지경이다.

그 큰 이유는 대부분이 통속적이거나 결말이 예정되어 있거나 찜찜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자 생각해보자.

사랑하던 사람이 시한부로 죽게 되어 있다.(결말 예정)

죽은 순간까지 애달프고 애달프고 눈물이 흐른다.(주인공들의 신파 예정)

죽고 나서 혼자 남은 한명은 외롭거나 절망적이다.(희망적이지 못한 메시지)

 

여기에 무슨 소설적 트릭이나 암시가 끼어들 틈이 있으며

소설의 결말에 대한 무슨 두근거리는 궁금증이 느껴지겠는가?

(물론 추리소설이나 탐정소설이라면 좀 틀려지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난 애초에 이 소설을 심드렁한, 삐딱한 마음으로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던 여인이 죽었다구? 그것도 젊은 나이에 병으로?

그래서 이 남자가 절망중이라구?

 

그. 래. 서.?

작가님! 더 할 얘기가 있습니까?

주저리 주저리 값싼 감상을 늘어놓으시려구요? 주인공의 입을 빌어서요?

 

 

.................

 

그렇고 그런 얘기일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작가의 문체가 투명하고 심리 묘사가 잘 되어 있다고 한들

신파의 공식을 어찌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소설은 신파의 공식을 전혀 다른쪽에서 무시하고 들어왔다.

 

시한부 인생의 여주인공인 요코는 죽은 순간까지 "행복하다"고 말하고

"죽는 것이 무섭고 슬프다"가 아닌

"내 자신에게 긍지를 느끼게 해줘서 고마와요"라는 마지막 진심을 남긴다.

 

기실 이 소설에서 죽고 사는건 큰 문제가 아니다.

두 주인공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남자 주인공인 야마자키의 어린 시절의 여러가지 회고(주로 좋지 않았던 기억들)와 맞물리며,

(그것은 야마자키가 요코를 만나기 한참 오래전의 고릿적 이야기들이고 요코와는 관계가 되지 않는다)

혹은 현재 자신의 인생의 수레바퀴와 맞물리며

야마자키가

스스로가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고

참담했던 기억에서 회복하는,

그 계기가 되는 요코와의 만남에서 '남은 것'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 '남은 것'은 참담했던 과거로부터의 회복이고

현재를 살아갈 용기이고

참담한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자신감이다.

그 모든 결심과 의지는

"내 자신에게 긍지를 느끼게 해줘서 고마와요"라는 요코의 한마디에서 온다.

 

두 사람의 사랑 때문에

요코가 자신이 자신인 것에 긍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야마자키도

상대의 사랑으로 인해 여러가지 상처들로부터 회복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된 그런 자기 자긍심으로 말이다.

(현재 요코의 죽음도

야마자키에게는 과거의 것들과 또 연관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로 등장하겠지만

이제 야마자키는 약한 자신의 모습에서 비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코의 병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눈물없이 볼 수 없는"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청정해저서

숲속의 오솔길이라도 산책하며 명상이라도 하는 듯한 그런 투명한 감상을 준다.

(둘은 죽음을 미워하며 현실을 비관하기 보다는 둘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위한

기꺼운 대화의 나날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죽음을 노래한 비관적 스토리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간의 삶을 찬양하는 희망적인 스토리이다.

 

이 소설은 시한부 스토리라기 보다는

삶과 죽음, 희망과 기대, 그리고 따뜻한 마음의 스토리이다.

(값싼 통속의 장면이나 고민은 없다.

사실적인 묘사 속에 인간의 진심과 고민과 갈등과 공감이 감정적 역류없이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의 입을 빌어 표출되는  작가적 어법이 상당히 철학적이고 내면적이고 자기 분석적이라

"난 단순한 스토리가 좋다"라는 독자라면

하품을 연달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련된 문체와

어떤 보편적인  소재를 바라보는 작가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가진 소설을 궁금해하는

호기심 많은  독자라면,

혹은 평소에 이런 저런 가능성에 귀와 마음을 열고 궁금해 하는 독자라면

이런 방식의 연애 소설에

깊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번 읽고 공감해볼만한 소설.

 

소설의 소재는 "희망이 없는"현실과 미래를 묘사한

비극지상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내면 여기저기서 비치는 작가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놀랄정도로 현실지향적이고도 긍정적인데다가

그 외면과 내면의 갭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유연한 소설적인 연출로

작가의 메세지가 유려하게 , 그리고 공감적으로

가슴에 스미는 모양이다.

 

아래 귀절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많이 있다.

 

<인상깊은 귀절들입니다.>

 

나에게 긍지를 주어서 정말, 정말 고마와요.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안녕.

 

그것은 이 불확실한 인생에 있어서 그녀가 확실히 매달려왔던 물웅덩이처럼, 설령 작더라도 확실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행복하다.'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 발견한, 그것이 최후의 물웅덩이였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는 생기 있고, 빛이 있고, 살랑이는 바람도, 바다도 있다. 이곳이 설령 죽기 위한 거리일지라도.

 

요쿄라는 인산이 살아온 길을 무엇보다 웅변해 주는 것이 그녀가 찍은 사진이었다. 태어나고 죽는, 그 의미를 해명하고, 증명하며, 계속 이야기 해온 것이 요코가 필사적으로 찍어온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이다.

 

 

죽을 몸이 되니 알겠는데요, 죽는거 별거 아니에요. 괜한 허풍이에요. 솔직히 말해 무섭고, 외롭고, 화나고, 그런 감정들은 물론 있죠. 하지만 그것들을 이겨낼 만한 즐거운 기억이 내겐 많이 있어요.

 

죽는걸 확인하는 검사같은거 이제 안 받을래.

 

그것이 설령 붉은 달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신경쓰며 살기 보다는 모른채 그때를 맞는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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