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오사키 요시오라는 작가가 쓴 책은 처음 읽어 봤는데

아마도 보지 못했다면 후회할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라는 단편을 읽고 난 감상은 그러하다.

 

일본 작가들이 내면을 시니컬하게 탐구하는데는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말은 가끔 들었지만

(흔히 멋지다는 둥 세련되었다는 둥)

이 책을 읽어 보니 "그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며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뭉글뭉글 솟아났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알고 싶었었는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소설의 영상 속에서 대사와 독백으로 선명히 보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혹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구나" 싶은 반가움의 밀려옴이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내가 소설속에서 좋아하는건 은유나 비유나 암시와 같은 장치들이다.

드러내놓고 말하는것, 돌발적인 행동의 연속에서 외형적인 스토리에 휩쓸려 가는 것에는 그닥 흥미가 없다. 진정한 글읽기의 매력은 독자의 상상력을 발현속에서 온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단편 하나만 봤을 뿐이지만

이 작가는 그 여백의 미, 간극의 미, 의미없어 보이는 행동과 대사의 미, 시간차의 미를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는 작가이다. 구차한 설명은 없지만 주인공의.. 잠시의 침묵 후 내뱉는 짧은 한마디..가 절실하게 독자를 소설 속으로 감정이입시킨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화려한 색채로 질서있게 가득찬 서양화라기보다는 배경 공간이 많은 무채색의 수묵화 =-그러면서도 화려한 색채보다 인상적인-느낌이다.)

 

사실 나는

주인공 야마코토군에게 공감을 느꼈고 그의 사고 방식에 그대로 몰입해 버렸다.

 

작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독특한 사고방식과 생각을 가진 남자 주인공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작가 스스로의 철학성(여기서는 남의 철학이 아니라 작가가 평소에 생각한 작가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주제로 소설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와 체스를 두는 주인공, 결론이 없는 게임, 결론이 없는 인생, 조각에서 느끼는 인생의 의미, 조각에서 느끼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 인간이 무의미한 물건을 만든다는 것...

 

까탈스러운 주제라면 이 소설은 지루할까 싶겠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독자는 각자 다른 철학을 가진 세명의 주인공의 관계가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을 보면서 결말을 궁금해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서 돌발적인 캐릭터는 역시 여자 주인공인 요리코. 그러나 마지막에 충격을 주는 캐릭터는 다른 남자 주인공인 다케이다.)

 

잘 된 스토리는 작가가 만드는게 아니라 주인공들이 창조해 내가는 스토리라고 했던가.

 

그 말 그대로 이 소설은 세명의 서로 다른 주인공이 각자의 개성과 성격대로 어울리거나 맞부딪치거나 회피하거나 비밀을 간직하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닿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주인공들의 독백과 사고방식이 스토리에 세련미와 감각과 철학을 불어 넣었다.

 

작가의 철학이 드러나는 인상적인 대목을 몇 대목 소개할까 한다.

 

'저 조각상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어떤 의미를 전해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머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조각상의 의미는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저 그 존재를 느낄 수만 있으면 둘의 관계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여기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서로 이해나 소통이 불가능한)를 읽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이라도 존재 자체를 존재 자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하는..

 

"네게 체스가 사유하는 행위 그 자체의 추출이고 실현이라고 한다면,

여기 있는 조각은 존재 그 자체의 추출이고 실현이야.

전혀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들 역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거야"

 

"의미라든가 무의미라든가 하는 것 역시 인간의 억지일 뿐이지. 조각의 진정한 가치는 존재 그 자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어"

 

"내가 말이야 여기에 와서 한가지 느낀 건,

인간에겐 의미가 있는 물건보다는 무의미한 것을 만드는 쪽이 훨씬 더 어렵겠구나! 하는 것이었어"

-철학은 무의미하고 체스 연구도 무의미하지만, 혹은 조각상도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야마모토군의 인생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남들과 같은 유의미한 인생을 사는 것보다도

철학과 사유속의 무의미한 인생-결과나 답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더 독특하게 가치로운 일이 아닐까

 

'체스를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오로지 회사에 얽매여 눈앞에 있는 것만 믿고 거기에 매달려서 살아가는 당신이, 어떻게 체스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의미라는건 돈인가? 지위인가? 명성인가? 정말로 생의 의미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은 살아가는가?'

 

'엘리시오는 어째서 구덩이를 끊임없이 파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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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 한번은 심각하게 되새기며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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