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계별곡(竹溪別曲) / 안축 



 

1장

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가 흥하고·신라가 망하는 동안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취화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을 지닌 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높고 물맑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2장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들에서,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습욱의 고양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3장

산새는 채봉이 날아 오르련듯·지세는 옥룡이 빙빙 돌아 서린듯,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을 안고,
향교 앞 지필봉(영귀봉)과 그 앞에는 연묵지로 문방사우를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항상 마음과 뜻은 육경에 스며들게 하고, 그들 뜻은 천고성현을 궁구하며 부자를 배우는 제자들이여,
아! 봄에는 가악의 편장을 읊고 여름에는 시장을 음절에 맞추어 타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해마다 삼월이 오면 긴 노정으로.
아! 큰소리치며 신임자를 맞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4장

초산효와 소운영이라는 기녀들과 동산 후원에서 노닐던 좋은 시절에,
꽃은 만발하여 난만한데, 그대 위해 훤히 트인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로,
바삐 거듭 오길 기다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새로 나온 꾀꼴새 울음 속에,
아! 한 떨기 꽃처럼 검은 머릿결이 구름처럼 흘러내려 끓임없는데,
타고나 천하절색인 小桃紅맘 때 쯤이면
아! 천리 먼 곳에 두고 서로 그리워함을, 또 어찌 하겠습니까?

5장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 날 하루놀이와,
푸른 나무가 우거진 속에 단청올린 다락은 깊고도 그윽한데, 거문고 타는 위로 불어오는 여름의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라,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대평을 즐기느니,
아! 사철을 즐거이 놉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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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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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리 아낙네들 / 고은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 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 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치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 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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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 이성부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 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 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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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비례 / 한용운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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