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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메레르 1 - 왕의 용 ㅣ 판타 빌리지
나오미 노빅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사람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존재다. 자신과 같은 종족이 60억 개체 이상 서식하고 있는데도 외계생명의 실마리를 더듬는가 하면, 소설과 영화 속에선 가상의 종족을 만들어내 그들에게 인간같은 지적 능력을 부여하며 논다. [테메레르]도 그러한 유희적 산물 중 하나로, 이 책에서는 인간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월등한 지성과 감성을 가진 '용'이라는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테메레르]는 '그 시절 용이 있었노라'하는 설정과 실제역사를 날실씨실 엮듯 엮어 만든 대체역사소설로, 주요 설정은 <용-비행사>로 표현되고 있는 두 종족 간의 정신적 교류다. 소설 속에서의 용은 요즘의 전투기처럼 일종의 전쟁병기로 쓰이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과 인간 사이에 무조건적인 주종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용은 자신의 의지로 비행사를 선택하며 비행사는 '마치 가족이나 연인을 대하듯이' 자신의 용을 돌보고 그와 교감한다. 용은 자신보다 먼저 죽은 비행사를 오래 추억하며 자신의 비행사가 죽는 광경을 보고 슬픔과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설정만 보면 <드래곤-라자>의 설정을 들고 나왔던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흡사하다. (두 소설 모두 '인간의 이상적인 교감상대'로서 '용(드래곤)'을 내세우고 있는 터이므로 그 두 존재가 가장 끈끈하게 묶일 수 있는 가시적 장치가 양 쪽에 모두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드래곤 라자]는 다른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부가적 장치로 <사람-드래곤>의 관계를 제시할 때 [테메레르]는 그 '관계' 자체를 소설의 핵심소재로 제시한다는 점으로, 이 때문에 두 소설이 비슷한 설정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테메레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집중해야 할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드래곤 라자]를 읽으면서 용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라자의 계약에 매력을 느꼈던 터라 이 소설에서 그 때 어느 정도 남았던 불만족-'왜 이 매력적인 설정이 요만큼밖에 나오지 않는 것인가'-을 모두 해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테메레르]에서는 [드래곤 라자]에서 선명하게 강조되는 '깊은 생각이 필요한 주제'가 사라졌지만 그 대신 매력있는 소재 및 실존역사와의 교묘한 조합이라는 요소가 그 빈 자리에 들어오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이 허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읽는 이로 하여금 동경과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딱히 어떤 철학적 내용이 있다기보다 그저 가볍게 읽기 쉬운, 소위 '해리포터 류'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무거운 주제가 있었다면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희열이나 '내가 테메레르의 비행사였다면'으로 이어지는 즐거운 공상이 모두 깨져버렸을 정도로, 이 소설이 독자에게 가져다 주는 임팩트는 작은 것이 아니다. 이 정도의 퀄리티를 가진 재미라면 '다른 무언가'를 더 첨가하는 것이 오히려 군더더기처럼 보일 정도로, [테메레르]는 첫 장을 펼침과 동시에 독자를 그들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확 박력있게 빨려들어가는 참에 '자, 빨려들어가는 참에 이것도 같이 생각해보렴'이라고 말하며 작가가 묵직한 주제를 던져준다면 본인도, 당신도, 다른 독자도 그녀를 저주할 지도 모른다.
가끔 과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점(時点)을 옮기는 덕분에 내용이 속도감있게 읽히며 아주 기본적인 수준의 세계사 지식만 있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문학의 예술, 학술적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소설의 근본은 역시 대중에게 즐겁게 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테메레르]의 이런 면모는 가히 미덕으로 칭찬할 만 하다. 가끔 엿보이는 '작가가 갖고 있는 동양에 대한 신비감'만 보아넘길 수 있다면 즐기는 데 아무 염려할 것이 없으며, 실제로 그 점도 굳이 예민하게 읽지 않는 한 거의 느끼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의 수준이다.
자, 이제 지루한 평은 그만 하고 감상을 말하고 싶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네들에겐 소설 속 용들의 따뜻하고 큰 눈망울에 열광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이 가질 수 있을 가장 이상적인 친구- 지적이며 관대하고 감성이 있는 그들, 무엇보다 순수한 그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의 비행사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종족끼리 교제를 하며 얻는 절대적 교감, 그 순수한 기쁨을 소망하기엔 우리는 살아오면서 상처받은 기억이 너무 많다. 나오미 노빅도, 수많은 타 종족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의 작가들과 종류도 알 수 없는 외계인들이 등장하는 SF 작가들도, 그리고 그 책들을 읽는 우리도, 그냥 이렇게만 살기엔 너무 갑갑했던 게다. 엘프며 드워프가 등장하는 여타 판타지 소설을 비롯하여,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테메레르]도, 단순한 놀이라기보다는 나 이외의 다른 존재와 '관계' 맺고 싶은 목마름을 해소해보려는 우리 인간들의 씁쓸한 자위책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