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한 손 창비시선 297
고영민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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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아버지를 뵙고 왔을 때 아버지의 방에서 두툼한 약봉지를 보았다. 나는 두려워 차마 아버지께 물어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얼버무림에 나는 더 두렵고 무거워졌다. 그날 아버지와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나는 아버지보다 먼저 올랐고 내려올 때도 아버지보다 앞섰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해 하셨다. 그날 등산로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소변을 보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왜소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시집을 읽으며 나는 시집 속의 ‘아버지’의 존재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점안(點眼)

                    고영민

까마귀 쓸개 하나가 두어 달 째 실에 걸려

추녀 밑에 매달려있다

짙푸른,

풍경(風磬)이다

충충한 방에 누워있던 백내장의 아버지가

어제처럼 방문을 밀고는, 희끗희끗 눈(目)속 모기를 쫓으며

찌부려 추녀자락을 올려다봤다 

침이 마른다

한 점(點), 갈가마귀가

눈 속으로

까옥까옥 날아갔다

추녀 밑에 풍경처럼 매달린 까마귀 쓸개 하나, 흐리고 침침한 방의 모습, 생이 사그라지는 아버지. 시집 『공손한 손』에 담겨 있는 세계는 슬프다. 그 슬픔은 빈곤함, 상실감, 고단함과 연결된다. 두어달 째 까마귀 쓸개를 매달아 약으로 쓰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백내장은 한참 된 것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희끗희끗 눈 속의 모기를 쫓는 것은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쪼그라 들어 매달려 있는 쓸개, 왜소하게 쪼그라든 아버지의 모습, 처량 맞게 바람에 흔들리는 쓸개가 주는 이미지는 서글픔과 쓸쓸함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백내장 민간 요법으로 매달아 놓은 까마귀 쓸개는 절간의 정갈하고 고요한 풍경과 등치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눈에 안약 (까마귀 쓸개)을 한 방울씩 물에 풀어 넣는 일은 불교의 의식과 중의적 의미를 지니며 경건한 의식이 된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병환에 대해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만 실은 이 시에는 아버지의 병환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이 담겨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추녀 밑에 매달아 놓은 까마귀 쓸개가 날아와 아버지의 눈이 맑아지기를 바라는 기원은 침이 마를 정도로 간절하다. 
 

이렇게 본다면 고영민 시에 담겨 있는 세계는 슬프지만 그 슬픔을 감싸 안는 따뜻함이 있다. 그 따뜻함은 농촌 공동체 삶에서 기인한다. 

해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손

수레국화 옆에서 흙 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온

이 느닷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질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질녘엔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허밍, 허밍

- 「허밍, 허밍」中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흥얼거림이 그에게는 고단함과 흐느낌으로 다가온 것일까. 웃는 소리는 이내 우는 소리가 된다. 또 저무는 날의 풍경은 상여를 메고 죽음을 맞이하는 풍경과 연결되며 시인에게는 느닷없는 통곡이 된다. 하지만 그는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라고 받아들이며 대답이 없는 세상을 견디어 간다. 죽은 사람을 모두 나의 남편,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가치가 인간과 삶에 대한 따뜻한 유대감이기 때문이다. 시 곳곳에 유년기 농촌 공동체 삶에 대한 향수(막간, 허밍 허밍), 고향과 부모에 대한 추억 (과수원, 치약)이 담겨 있으며, 이러한 공동체 삶과 유대의식은 생명의 고귀에 대한 깨달음과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를 이끌어낸다.

 

공손한 손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서점에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빙긋이 미소가 번졌다. 따뜻한 밥뚜껑 위에 올려지는 공손한 손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이면서 삶에 대한 외경이다. 가만히 미소 짓게 했던 이 시의 힘은 남루하지만 고귀한 삶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단절과 메마른 도시의 삶에서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하는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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