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회 교수는 <삼국지 바로 읽기>(2004), <대쥬신을 찾아서>(2006), <새로 쓰는 한일 고대사>(2010),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2012) 등을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고대사 연구에 매진했으며, 뜨거운 역사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민족사적 기원을 한반도 영역에 가두는 것을 거부하며 <삼국지>에 경도된 '짝퉁 중화주의'를 폭로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반면 주류 역사학계는 김 교수가 극단적인 국가-민족주의적 주장을 한다며 폄하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본주의 경제학의 문제를 다룬 <왜 자본주의를 고쳐 쓸 수 없는가>라는 도발적 화두를 들고 돌아왔다. 재야 사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김 교수의 전공은 경제학이니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동양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있는 김 교수가 마침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인터뷰를 청했다. 햇살이 뜨겁던 지난달 28일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꼬박 2시간을 인터뷰했다. 과연 그의 뜨거움은 여전했다.
좌우 대립 아닌 미래 패러다임 논해야
이번엔 왜 경제일까? '경제학자 김운회'의 본래 자리임에도 생경하다. 오랫동안 천착해 온 고대사 논쟁에서 갑자기 자본주의 경제학으로 넘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결국 한국 사람이었고, 한국 문제라면 그 어떤 것이든 다루고 싶었어요. 저의 주된 관심사는 패러다임입니다. 동북공정 논쟁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고대사 패러다임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죠. '짝퉁 중화주의'에 함몰되어 한반도라는 작은 프레임에 갇혀있는 역사인식을 깨뜨리고 싶었고,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미래 패러다임에 대한 연구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었어요. 20~30대에 극심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었고, 한때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심취하여 좌파 경제학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언젠가 경제학 교수와 논쟁이 붙었는데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현상 경제학에 능한 우파 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어떤 한쪽 패러다임이 아닌 거시적 관점에서 경제학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최근 세계 경제가 위기에 접어들었고, 한국에선 극심한 좌우대립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그간 연구하던 것을 서둘러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김 교수는 패러다임 연구가로서 고대사 연구와 마르크스 경제학 및 자본주의 연구를 진행했다. 역사와 경제학이라는 학문적 구분은 불필요했다. 그는 보다 큰 개념의 패러다임으로 현재와 미래의 트렌드를 담아낼 수 있는 새 패러다임 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세계 경제는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어요.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1930년대 대공황 위기는 최고 부자 나라인 미국도 피해갈 수 없었고 결국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죠.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세계는 파국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새로운 각종 이론이 등장했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그때와 비견할 만합니다. 1930년대의 위기처럼 새 패러다임 없이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학은 그래프만 열심히 그리고 있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를 제대로 성찰하고 있지 못해요. 지금 필요한 것은 좌우 대립이나 진보 논쟁이 아니라 미래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이지요. 자본주의 4.0 같은 말장난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자체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어요."
몰락한 마르크스와 부도덕한 자본주의
김운회 교수는 이 책에서 "우파 경제학은 철학이 없기 때문에 번성하고, 좌파 경제학은 절반만 성공했다"고 썼다. 그가 한때 심취했던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어떨까?
"사회주의 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고 인간 소외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 개념의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죠. 세계경제를 세계체제라는 큰 범주에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과 세계적인 빈곤과 저개발 등의 문제들을 비교적 손쉽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할 수 있어요.
하지만 경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죠. 머리만 있고 몸통은 없는 셈이죠. 세상은 그리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사회주의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한 후에도 경제신문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어요. 이래서야 무슨 경제 분석을 해내겠습니까?
마르크스의 몰락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개방경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나라의 자본주의 경제가 다른 외부 요인이 없는 상태라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타당할 수 있어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국내의 위기를 해외부문을 이용해서 쉽게 돌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그 해외부문의 한계상황에 다다르면 기술혁신이라든가 다른 변동 요인으로 이를 또 타결해 나가거든요. 자본주의가 가진 끈질긴 생명력이지요.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전쟁을 일으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이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마르크스의 원전만 맴돌다가 끝이 났어요.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교조성도 몰락의 원인입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오랫동안 유토피아를 꿈꿨으나, 유토피아는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모든 종교가 그렇다. '천국'이나 '극락정토'는 죽음으로 당도할 수 있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죽어서만 갈 수 있는 유토피아를 '살아서도 갈 수 있는 곳'으로 제시했다. 비록 마르크스의 패러다임은 실패했지만 '유토피어니즘'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어니즘의 패러다임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공산당 선언>에는 "현대의 부르주아 사회는 자기가 주문으로 불러낸 지옥의 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마법사와 같다"라는 구절이 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통찰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번성한 것도 철학의 빈곤 때문이고, 한계에 직면한 것도 철학의 빈곤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그 철학적 기반이 형편없기 때문이에요.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핵심가치라고 할 수 있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실 철학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식적인 것이죠. 벤담은 사람에게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는데, 이것이 인간 행위의 근본 동기라고 말해요. 인간에 있어서 쾌락은 선이요, 고통은 불행인데 이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리임을 역설하죠. 이것이 바로 수백 년간 유지되어 온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근간이죠. 빈약하기 그지없는 철학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허약하기 때문에 수백 년을 견딘 것이 아닌가 해요. 그만큼 뛰어난 적응력을 가질 수 있었고 어떤 환경적인 변화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라는 거대란 패러다임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은 한편 아슬아슬한 일이죠. 문제는 머리가 텅 빈 마네킹과 같이 자본주의도 정처 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는 실체는 결국 개인의 욕망 충족이에요. 허무주의, 쾌락주의, 물신숭배가 그 대가로 주어지죠. 나아가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타인을 그 도구로 사용하려는 수요가 존재할 때 섹스 산업 같은 각종 퇴행적 비즈니스가 나타납니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학의 이론 체계는 가치 개념이 도외시된 매우 위험한 이론체계입니다. 특히 세계 경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구조적인 분석이 없고 오로지 중심부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론적 가치가 없어요. 다만, 현상에 대한 분석 능력이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론체계는 발전적인 해체를 해야 하지만, 그 방법론은 수용할 필요가 있죠."
김운회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김운회 교수는 마르크스 경제학인 좌파 패러다임의 '머리(가치)'와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몸통(현상분석)'만 남기고, 기존의 패러다임은 해체하자고 주장한다. 바로 <왜 자본주의를 고쳐 쓸 수 없는가>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렇게 시작된다.
"제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존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니 하는 패러다임 자체를 해체하자는 얘기예요. 그래서 편향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존이 패러다임 가운데 각 국가의 이익에 맞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양한 조합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무엇보다도 경제가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이 그 주체이지요.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여 우리의 삶을 개선해가야 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가장 주요한 과제예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과 노동, 가치론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의 경제학 패러다임에서는 동양과 이슬람권역의 경제체제와 제도 및 사상을 보다 긴밀하게 연구해야 해요. 서유럽의 패러다임에서는 이슬람권역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하지만, 서유럽에 붙어있으면서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체제에 그토록 시달린 셈치고는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있다는 점들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해요. 여기에는 분명 종교(이슬람교)의 역할이 있을 겁니다.
반면 유럽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부와 행복을 위해 대부분의 문명들을 파괴하고 세계 자원을 탕진하여 세계를 빈곤의 늪에 빠뜨렸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들의 경제 자원들을 착취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안달입니다. 이들에게 세계의 패러다임을 맡긴다는 것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죠.
그리고 새로운 경제학 이론 체계에서 저는 현상분석에 앞서 저개발 국가에 대한 개발론을 먼저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인류의 목표가 진정으로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세계의 기아와 빈곤을 퇴치하는데 학문이 앞장 서야 하기 때문이죠.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약육강식의 경연장을 만들고서 무슨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이 달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이라는 유토피어니즘의 목표에 닿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이토록 번성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또 숱한 병폐와 퇴행을 야기한 욕망의 문제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서구와 미국 편향의 기존 패러다임은 과연 보편적 국가의 공존을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할 것인가?
"산업혁명 초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과 가장 빈곤한 지역의 격차가 2배 정도였는데, 현재는 20배까지 벌어졌다고 해요. 나라별 격차는 80배에 이르고 있어요. 세계화가 진행될 수록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하버드대학의 프리쳇(Pritchett) 교수는 이것을 '디버전스(Divergence)'라고 부릅니다. 하나는 부자의 길로 하나는 가난의 길로 다시는 돌아와 만날 수 없는 큰 강을 건너는 커다란 분기점이라는 의미죠.
기존의 자본주의 패러다임으로는 선진국들을 제외하고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선진국 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저개발 국가들이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모순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제시하는 패러다임은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후진국은 후진국대로 자신에 맞는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세계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선에서 상호협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서울 컨센서스의 성공 모델
김운회 교수는 절박한 어조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학을 제시했으나, 현실은 요원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후진국이 과연 디버전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그는 한국형 자본주의 개발 모델의 성공 사례를 강조한다.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유일한 사례가 한국이에요. 당시에는 수입대체형 공업화 전략이 대세였어요. 그런데 5·16 이후 경제개발에 고심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주의적인 교수들이나 군부의 이론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 관료나 기업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출지향으로 선회합니다. 즉 일본을 모델로 삼은 산업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기업인들이 선진국에서 노동집약적인 제품들이 가격이 매우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죠. 대부분 실업자인 한국에서 그것은 새로운 눈을 열게 해준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가발과 의류예요.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는 주로 의류와 가발, 합판 등을 내다 팔았어요.
개발독재는 누구도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후진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한 요소입니다. 지난 경제개발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빈곤의 탈출은 개발독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타이완, 싱가폴, 한국, 그리고 현대의 중국입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저개발 상황을 탈피한 예가 거의 없어요.
지금 '베이징 컨센서스'가 힘을 얻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서울 컨센서스'죠. 중국이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을 차용한 것이니까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저개발 국가들을 위해서 베이징 컨센서스를 옹호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새로이 세계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베트남이나 미얀마, 캄보디아 등 여러 국가들은 이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WTO 체제하에서도 틈새가 있어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김 교수는 '박정희식 개발 독재'가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면서도, 가난한 국가들이 도입할 수 있는 유효한 대안 모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개발 모델은 상당한 부작용을 야기한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의 자본주의 패러다임 안에서 선진국의 자본 침탈과 경제 침략을 방어해낼 수 있는 유력한 방안으로 고려하는 듯하다.
인터뷰를 마치며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김운회 지음|알렙 펴냄|2013년 6월|19500원)
인터뷰를 진행하며 세계의 경제 패러다임을 읽어내는 그의 거시적 안목에 내내 압도당했다. 하지만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평가, 진보에 대한 개념,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등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 패러다임을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그의 과격한 패러다임은, 결국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에 대한 강렬한 집착처럼 보였다. 그즈음에서 난 노(老)학자의 뜨거운 열정이 부러웠고, 그 열정 앞에 선 나의 무력한 젊음이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