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세 한 노인의 투신을 희망이라 부르는 까닭
[서평] 스페인 만화대상 수상작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길찾기


그가 처음부터 아나키스트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독한 가난에 포위된 채, 폭력으로 억누르며 생존의 당위만 강조하던 아버지와 형제들, 담을 쌓아 경계를 나누며 서로를 증오하고 탐하던 이웃들 사이에서, 그는 "모름지기 사람은 인류 외에 다른 고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욕망은 곧 절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고향 페나블로를 떠날 결심을 한다. 그가 떠나고자 했던 것은 고향이 아니라, 온갖 야만과 폭력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 책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평생 아나키스트로 살았던, 아니 그렇게 살고자 갈망했던 안토니오의 생애와 죽음을 다룬 책이다. 2001년 5월 4일 스페인의 한 양로원에서 90세 노인 안토니오는 5층 높이에서 투신한다. 수 초 만에 맞이한 허무한 죽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아버지의 죽음이 실상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자 했던' 한 아나키스트의 오랜 갈망의 실현이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 책의 원제가 <비상의 기술>(El Arte de Volar)인 이유다. 하여, 그는 아버지의 아나키스트적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불의에 맞선 시대적 정황, 아나키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해바라기프로젝트 옮김|길찾기 펴냄|2013년 7월)


스페인은 1923년 혼란한 정국을 명분 삼아 쿠데타를 일으킨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전권을 장악한다. 하지만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파탄을 적절히 수습하지 못해, 1931년 왕정이 폐지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1936년 2월 좌파들이 주도한 인민전선은 총선에서 크게 승리하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앞세운 파시스트는 보수정당, 종교권력, 부르조아 세력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안토니오는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탈출하여 도시 사라고사에 정착하고자 운전면허를 딴다. 하지만 도시의 삶도 만만치 않다. 실업이 만연하고 겨우 얻은 직업도 박봉이다. 공화국이 출범했으나 그들도 결국 부르조아의 편이었고, 토지개혁 따위는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정치가 모든 것을 장악했고 민중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아나키즘의 발현은 시대적 정황이었고, 안토니오가 아나키스트적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고, 프랑코군이 아나키스트의 도시 사라고사를 점령하자 극심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오는 프랑코군에 거짓 입대한 후 공화파 의용군에 투항한다. 그곳에서 안토니오는 스스로를 '구사일생파' '아나키스트 사총사' '납탄동맹' 등으로 부르는 네 명의 동지들을 만나 비로소 확고한 아나키스트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런 동맹도 좋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 우선이야. 그 위대한 사상 때문에 우리 같이 힘 없는 사람들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잖아. 그러니깐 그 신발이 있든 없든, 진짜 부적은 바로 우리의 정신과 이 신조 속에 있어.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57쪽)

ⓒ 길찾기

하지만 그들의 희망도, 결의도, 우정도 영원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의용군은 거듭된 전투 속에서 차츰 지치고 혼란을 겪는다. 상부는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추진하여 그들은 계급적 위계를 명시한 군대로 편입된다. 그들은 결국 프랑코군에 패배하고 프랑스 국경지역으로 피난한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지만 민주주의 국가인 프랑스는 그들을 홀대하고 경시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등을 전전한다. 프랑스도,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도, 독일군에 승리한 미군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국가도, 민주주의 국가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마르세유를 거쳐 고향인 페나블로로 결국 돌아온다.

한때 '납탄동맹'을 맺었던 아나키스트 동지 중 일부는 죽음을 맞이하고 일부는 변절의 삶을 선택한다. 처음엔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선택이었으나 그들은 차츰 가난한 자들을 짓밟으며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려 불의한 부를 획득한다. 프랑코의 독재 정권 하에서 안토니오도 다르지 않았다. 아나키즘의 서약은, 종교적 서약으로 맺은 결혼의 서약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아나키즘 대신 가족 이데올로기 안에 안주한다.

"변절한 사람은 루시오 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단순히 지난날의 이상을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열렬한 신봉자가 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절은 고백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겨 둔 개개인의 비극을 배신하는 것이다. 아니, 배신이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자살을 의미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묻어야 했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선 마음을 죽여야 했다."(135쪽)

이 책은 파시즘에 맞서 혁명의 전위에 섰으나 패배를 거듭하다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한 아나키스트의 패배를, 그의 비극적 삶을 담아내고 있다. 장엄한 패배가 아닌, 그들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정치와 자본 권력과 타협하며 적극적인 변절을 선택했기에, 그들의 비극은 더욱 서럽고 처연하다. 안토니오는 아내와 이혼하고 한 양로원에 갇혀 쓸쓸한 노년의 삶을 보낸다. 그의 투신은 마지막 저항이었고, 소년 시절부터 품고 있던 '하늘을 비상하는 꿈'의 극적인 실현이었을 것이다.

한 아나키스트의 비극, 혹은 희망

아나키스트의 패배와 자살. 이 비극은, 오늘 어떤 함의로 읽어야 하는가. 과연 어떤 희망을 도모할 수 있을까. 자살한 아나키스트의 아들인 저자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하나의 존재가 다른 하나를 으스러지게 껴안는 형태인 '융해'"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아나키스트적 존엄을 복원하고자 한다. "글쓰기는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고발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특히 '만화'라는 서술 방식은 그 슬픈 역사에 입체감을 더하고, 탁월한 공감의 언어를 체득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독자를 향한 새로운 동맹을 극적으로 도발한다.

"더 넓게 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는 이 유대 속에서 그동안 써왔던 가면을 벗고, 자신의 가장 연약한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상처 때문에 흉터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맹과 같았다. 아버지로부터 혹은 애인, 친구, 희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오랫동안 속죄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소외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동맹말이다."(214쪽)

왕정 체제와 공화정 체제의 연이은 붕괴, 이데올로기 투쟁, 세계전쟁과 맞물린 극심한 내전, 부르조아와 결탁한 독재정권의 득세. 스페인과 한국의 현대사는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아나키스트들은 무도한 세월 앞에 변절과 패배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의 슬픔도 비슷할 것이다. 욕망은 절망으로 귀결되지만, 가슴속 깊은 슬픔은 우회하지 않고 돌진하는 저항의 결기를 추동한다. 아나키즘은 온갖 불의에 맞선 시대적 정황이다. 비극처럼 보였던 아나키즘의 역사는 다시 극적으로 회생한다.



스페인의 비폭력 저항운동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을 위시한 수백만 명의 시위대는 "분노에서 반란으로"라는 구호 아래 자본주의와 결탁한 정치권력에 맞선다. 그리고 우리의 광장에도 무도한 권력에 맞선 촛불로 인해 정의와 자유의 가녀린 희망이 극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안토니오를 비롯한 숱한 아나키스트들의 죽음은 허망한 패배가 아니라 장엄한 비상, 그 희망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더욱 교묘하고 노골적인 모든 폭력에 맞선 '소외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동맹', 그 기막힌 희망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서평에서 빠진 부분
    from 예지원 2013-07-24 15:04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서평에서 빠진 부분"이런 동맹도 좋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 우선이야. 그 위대한 사상 때문에 우리 같이 힘 없는 사람들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잖아. 그러니깐 그 신발이 있든 없든, 진짜 부적은 바로 우리의 정신과 이 신조 속에 있어.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57쪽)주인공 안토니오와 더불어 '납탄동맹'이라는 아나키스트 연대를 이루던 날 나누던 대화다. 여기에서 '신발'은 전설적인 아나키스트로 스페
 
 
 
창작에 대하여 - 가오싱젠의 미학과 예술론
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보선의 <그을린 예술>이 추동한 오기는 

가오싱젠의 '차가운 문학'(<창작에 대하여>)에 이르러 

비로소 길을 찾은 듯. 


매력적이나 아쉬웠던 심보선, 

완숙하고 뜨겁던 고독의 가오싱젠 사이 

그즈음 어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삶을 바꾼 한 구절
박총 지음 / 포이에마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 대한 헌사인줄 알았는데, 삶에 대한 곡진한 헌사더라. 


텍스트를 따라 눈길만 주었을 뿐인데, 어느새 그의 삶을 따라 걷고 있더라. 


그러다 보면 갈피마다 잘 말려놓은 듯한 이름 모를 꽃잎, 풀잎들이 덩달아 나의 삶에도 움트더라. 


달큼한 향기가, 초록빛 흥겨움이 움튼다. 


김현진의 말대로 '이번에도 박총답다'. 


그리하여 '박총'다움에 일조한 책들이 도리어 수지맞았더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 - 약탈 본능의 시대, 자본주의 사용 설명서
김운회 지음 / 알렙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탈 본능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일그러진 경제학
[인터뷰]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를 펴낸 김운회 교수


김운회 교수는 <삼국지 바로 읽기>(2004), <대쥬신을 찾아서>(2006), <새로 쓰는 한일 고대사>(2010),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2012) 등을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고대사 연구에 매진했으며, 뜨거운 역사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민족사적 기원을 한반도 영역에 가두는 것을 거부하며 <삼국지>에 경도된 '짝퉁 중화주의'를 폭로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반면 주류 역사학계는 김 교수가 극단적인 국가-민족주의적 주장을 한다며 폄하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본주의 경제학의 문제를 다룬 <왜 자본주의를 고쳐 쓸 수 없는가>라는 도발적 화두를 들고 돌아왔다. 재야 사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김 교수의 전공은 경제학이니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동양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있는 김 교수가 마침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인터뷰를 청했다. 햇살이 뜨겁던 지난달 28일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꼬박 2시간을 인터뷰했다. 과연 그의 뜨거움은 여전했다.



좌우 대립 아닌 미래 패러다임 논해야

이번엔 왜 경제일까? '경제학자 김운회'의 본래 자리임에도 생경하다. 오랫동안 천착해 온 고대사 논쟁에서 갑자기 자본주의 경제학으로 넘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결국 한국 사람이었고, 한국 문제라면 그 어떤 것이든 다루고 싶었어요. 저의 주된 관심사는 패러다임입니다. 동북공정 논쟁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고대사 패러다임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죠. '짝퉁 중화주의'에 함몰되어 한반도라는 작은 프레임에 갇혀있는 역사인식을 깨뜨리고 싶었고,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미래 패러다임에 대한 연구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었어요. 20~30대에 극심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었고, 한때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심취하여 좌파 경제학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언젠가 경제학 교수와 논쟁이 붙었는데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현상 경제학에 능한 우파 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어떤 한쪽 패러다임이 아닌 거시적 관점에서 경제학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최근 세계 경제가 위기에 접어들었고, 한국에선 극심한 좌우대립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그간 연구하던 것을 서둘러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김 교수는 패러다임 연구가로서 고대사 연구와 마르크스 경제학 및 자본주의 연구를 진행했다. 역사와 경제학이라는 학문적 구분은 불필요했다. 그는 보다 큰 개념의 패러다임으로 현재와 미래의 트렌드를 담아낼 수 있는 새 패러다임 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세계 경제는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어요.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1930년대 대공황 위기는 최고 부자 나라인 미국도 피해갈 수 없었고 결국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죠.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세계는 파국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새로운 각종 이론이 등장했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그때와 비견할 만합니다. 1930년대의 위기처럼 새 패러다임 없이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학은 그래프만 열심히 그리고 있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를 제대로 성찰하고 있지 못해요. 지금 필요한 것은 좌우 대립이나 진보 논쟁이 아니라 미래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이지요. 자본주의 4.0 같은 말장난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자체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어요."

몰락한 마르크스와 부도덕한 자본주의

김운회 교수는 이 책에서 "우파 경제학은 철학이 없기 때문에 번성하고, 좌파 경제학은 절반만 성공했다"고 썼다. 그가 한때 심취했던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어떨까?

"사회주의 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고 인간 소외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 개념의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죠. 세계경제를 세계체제라는 큰 범주에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과 세계적인 빈곤과 저개발 등의 문제들을 비교적 손쉽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할 수 있어요.

하지만 경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죠. 머리만 있고 몸통은 없는 셈이죠. 세상은 그리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사회주의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한 후에도 경제신문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어요. 이래서야 무슨 경제 분석을 해내겠습니까?

마르크스의 몰락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개방경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나라의 자본주의 경제가 다른 외부 요인이 없는 상태라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타당할 수 있어요.

그러나 자본주의는 국내의 위기를 해외부문을 이용해서 쉽게 돌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그 해외부문의 한계상황에 다다르면 기술혁신이라든가 다른 변동 요인으로 이를 또 타결해 나가거든요. 자본주의가 가진 끈질긴 생명력이지요.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전쟁을 일으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이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마르크스의 원전만 맴돌다가 끝이 났어요.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교조성도 몰락의 원인입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오랫동안 유토피아를 꿈꿨으나, 유토피아는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모든 종교가 그렇다. '천국'이나 '극락정토'는 죽음으로 당도할 수 있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죽어서만 갈 수 있는 유토피아를 '살아서도 갈 수 있는 곳'으로 제시했다. 비록 마르크스의 패러다임은 실패했지만 '유토피어니즘'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어니즘의 패러다임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공산당 선언>에는 "현대의 부르주아 사회는 자기가 주문으로 불러낸 지옥의 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마법사와 같다"라는 구절이 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통찰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번성한 것도 철학의 빈곤 때문이고, 한계에 직면한 것도 철학의 빈곤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그 철학적 기반이 형편없기 때문이에요.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핵심가치라고 할 수 있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실 철학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식적인 것이죠. 벤담은 사람에게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는데, 이것이 인간 행위의 근본 동기라고 말해요. 인간에 있어서 쾌락은 선이요, 고통은 불행인데 이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리임을 역설하죠. 이것이 바로 수백 년간 유지되어 온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근간이죠. 빈약하기 그지없는 철학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허약하기 때문에 수백 년을 견딘 것이 아닌가 해요. 그만큼 뛰어난 적응력을 가질 수 있었고 어떤 환경적인 변화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라는 거대란 패러다임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은 한편 아슬아슬한 일이죠. 문제는 머리가 텅 빈 마네킹과 같이 자본주의도 정처 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는 실체는 결국 개인의 욕망 충족이에요. 허무주의, 쾌락주의, 물신숭배가 그 대가로 주어지죠. 나아가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타인을 그 도구로 사용하려는 수요가 존재할 때 섹스 산업 같은 각종 퇴행적 비즈니스가 나타납니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학의 이론 체계는 가치 개념이 도외시된 매우 위험한 이론체계입니다. 특히 세계 경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구조적인 분석이 없고 오로지 중심부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론적 가치가 없어요. 다만, 현상에 대한 분석 능력이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론체계는 발전적인 해체를 해야 하지만, 그 방법론은 수용할 필요가 있죠."

김운회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김운회 교수는 마르크스 경제학인 좌파 패러다임의 '머리(가치)'와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몸통(현상분석)'만 남기고, 기존의 패러다임은 해체하자고 주장한다. 바로 <왜 자본주의를 고쳐 쓸 수 없는가>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렇게 시작된다.

"제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존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니 하는 패러다임 자체를 해체하자는 얘기예요. 그래서 편향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존이 패러다임 가운데 각 국가의 이익에 맞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양한 조합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무엇보다도 경제가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이 그 주체이지요.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여 우리의 삶을 개선해가야 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가장 주요한 과제예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과 노동, 가치론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의 경제학 패러다임에서는 동양과 이슬람권역의 경제체제와 제도 및 사상을 보다 긴밀하게 연구해야 해요. 서유럽의 패러다임에서는 이슬람권역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하지만, 서유럽에 붙어있으면서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체제에 그토록 시달린 셈치고는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있다는 점들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해요. 여기에는 분명 종교(이슬람교)의 역할이 있을 겁니다.

반면 유럽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부와 행복을 위해 대부분의 문명들을 파괴하고 세계 자원을 탕진하여 세계를 빈곤의 늪에 빠뜨렸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들의 경제 자원들을 착취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안달입니다. 이들에게 세계의 패러다임을 맡긴다는 것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죠.

그리고 새로운 경제학 이론 체계에서 저는 현상분석에 앞서 저개발 국가에 대한 개발론을 먼저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인류의 목표가 진정으로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세계의 기아와 빈곤을 퇴치하는데 학문이 앞장 서야 하기 때문이죠.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약육강식의 경연장을 만들고서 무슨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이 달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이라는 유토피어니즘의 목표에 닿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이토록 번성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또 숱한 병폐와 퇴행을 야기한 욕망의 문제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서구와 미국 편향의 기존 패러다임은 과연 보편적 국가의 공존을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할 것인가?

"산업혁명 초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과 가장 빈곤한 지역의 격차가 2배 정도였는데, 현재는 20배까지 벌어졌다고 해요. 나라별 격차는 80배에 이르고 있어요. 세계화가 진행될 수록 빈익빈 부익부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하버드대학의 프리쳇(Pritchett) 교수는 이것을 '디버전스(Divergence)'라고 부릅니다. 하나는 부자의 길로 하나는 가난의 길로 다시는 돌아와 만날 수 없는 큰 강을 건너는 커다란 분기점이라는 의미죠.

기존의 자본주의 패러다임으로는 선진국들을 제외하고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선진국 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저개발 국가들이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모순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제시하는 패러다임은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후진국은 후진국대로 자신에 맞는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세계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선에서 상호협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서울 컨센서스의 성공 모델

김운회 교수는 절박한 어조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학을 제시했으나, 현실은 요원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후진국이 과연 디버전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그는 한국형 자본주의 개발 모델의 성공 사례를 강조한다.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유일한 사례가 한국이에요. 당시에는 수입대체형 공업화 전략이 대세였어요. 그런데 5·16 이후 경제개발에 고심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주의적인 교수들이나 군부의 이론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 관료나 기업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출지향으로 선회합니다. 즉 일본을 모델로 삼은 산업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기업인들이 선진국에서 노동집약적인 제품들이 가격이 매우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죠. 대부분 실업자인 한국에서 그것은 새로운 눈을 열게 해준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가발과 의류예요.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는 주로 의류와 가발, 합판 등을 내다 팔았어요.

개발독재는 누구도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후진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한 요소입니다. 지난 경제개발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빈곤의 탈출은 개발독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타이완, 싱가폴, 한국, 그리고 현대의 중국입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저개발 상황을 탈피한 예가 거의 없어요.

지금 '베이징 컨센서스'가 힘을 얻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서울 컨센서스'죠. 중국이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을 차용한 것이니까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저개발 국가들을 위해서 베이징 컨센서스를 옹호해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새로이 세계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베트남이나 미얀마, 캄보디아 등 여러 국가들은 이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WTO 체제하에서도 틈새가 있어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김 교수는 '박정희식 개발 독재'가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면서도, 가난한 국가들이 도입할 수 있는 유효한 대안 모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개발 모델은 상당한 부작용을 야기한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의 자본주의 패러다임 안에서 선진국의 자본 침탈과 경제 침략을 방어해낼 수 있는 유력한 방안으로 고려하는 듯하다.

인터뷰를 마치며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김운회 지음|알렙 펴냄|2013년 6월|19500원)


인터뷰를 진행하며 세계의 경제 패러다임을 읽어내는 그의 거시적 안목에 내내 압도당했다. 하지만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평가, 진보에 대한 개념,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등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 패러다임을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그의 과격한 패러다임은, 결국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에 대한 강렬한 집착처럼 보였다. 그즈음에서 난 노(老)학자의 뜨거운 열정이 부러웠고, 그 열정 앞에 선 나의 무력한 젊음이 부끄러웠다.

인터뷰로 주어진 시간은,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500여 쪽에 달하는 텍스트와 50여 쪽에 가까운 각주로 쓰여진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자본주의의 몰락,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우리가 지금 그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지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하여, '약탈 본능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일그러진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 그것으로 그와 이 책에 크게 빚졌다고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김인순 옮김 / 필로소픽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2013년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가난의 시대'를 의연하고 우아하게 사는 법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김인순 옮김필로소픽 펴냄2013년)



강준만 교수는 갑을관계의 역사가 조선 시대 관존민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고찰하며, 그 역사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된다고 말했다. ‘을’은 군림하는 ‘갑’의 비위를 맞추며 호시탐탐 ‘갑’의 자리를 탐하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갑’은 신자유주의의 동력을 돋구며 더욱 야멸찬 승자독식사회를 굳건히 한다. “88만원 세대”라는 조어는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으며, IMF 이후 중장년들은 언제 물러날지 모를 직장을 조바심 내며 사수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니, ‘우아하게 가난을 과시하면서 쿨하게 부자들을 경멸하는 법’이라는 저자의 도발은 자못 불온하고도 생뚱맞다.      

 

쇤부르크는 독일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언론인이다.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친척의 집에서 가난한 식객으로 지내면서 부끄러운 가난과 뻔뻔한 부의 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처세의 이치를 익혔다. 이 책은, 언론인으로 일하던 저자가 경제 불황이 휘몰아친 2002년 구조조정으로 실직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의연하게 대처한다. ‘국민의 5분의 4에게 복지를 약속하는’ 나라에서 주는 적지 않은 실업보험금을 받았지만, 그것마저 중도에 포기하고 기꺼이 가난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풍요의 시대는 완전히 지나갔다. 하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이되 근거 없는 신화는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가난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끊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주입시킨 자본주의 신화는 근거 없는 것이다. 출세 의지는 좌절당하고,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며, 패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시대를 산다. 무엇보다 가난을 자본주의의 비극적 종말을 예견하는 역사적 차원의 대세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돈 없이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법,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안한다. 무엇보다 진짜 가난은 마음의 문제다. 하여 “너희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소유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인용하며, “내가 가진 것을 토대로 부유하게 느끼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때문에 항상 가난하게 느끼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집, 외식, 문화생활, 건강과 몸매 관리, 자동차, 여행, 매스미디어, 자녀 교육 등 실질적인 삶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구체적으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비결을 소개한다. 저자의 의연함은 돌온한 센스로 발휘되며, 인간 심리 깊은 곳의 두려움과 위선을 파헤친다. 무엇보다 저자의 위트는 발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