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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평점 :
90세 한 노인의 투신을 희망이라 부르는 까닭
[서평] 스페인 만화대상 수상작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길찾기
그가 처음부터 아나키스트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독한 가난에 포위된 채, 폭력으로 억누르며 생존의 당위만 강조하던 아버지와 형제들, 담을 쌓아 경계를 나누며 서로를 증오하고 탐하던 이웃들 사이에서, 그는 "모름지기 사람은 인류 외에 다른 고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욕망은 곧 절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고향 페나블로를 떠날 결심을 한다. 그가 떠나고자 했던 것은 고향이 아니라, 온갖 야만과 폭력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 책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평생 아나키스트로 살았던, 아니 그렇게 살고자 갈망했던 안토니오의 생애와 죽음을 다룬 책이다. 2001년 5월 4일 스페인의 한 양로원에서 90세 노인 안토니오는 5층 높이에서 투신한다. 수 초 만에 맞이한 허무한 죽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아버지의 죽음이 실상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자 했던' 한 아나키스트의 오랜 갈망의 실현이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 책의 원제가 <비상의 기술>(El Arte de Volar)인 이유다. 하여, 그는 아버지의 아나키스트적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불의에 맞선 시대적 정황, 아나키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해바라기프로젝트 옮김|길찾기 펴냄|2013년 7월)
스페인은 1923년 혼란한 정국을 명분 삼아 쿠데타를 일으킨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전권을 장악한다. 하지만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파탄을 적절히 수습하지 못해, 1931년 왕정이 폐지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1936년 2월 좌파들이 주도한 인민전선은 총선에서 크게 승리하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앞세운 파시스트는 보수정당, 종교권력, 부르조아 세력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안토니오는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탈출하여 도시 사라고사에 정착하고자 운전면허를 딴다. 하지만 도시의 삶도 만만치 않다. 실업이 만연하고 겨우 얻은 직업도 박봉이다. 공화국이 출범했으나 그들도 결국 부르조아의 편이었고, 토지개혁 따위는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정치가 모든 것을 장악했고 민중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아나키즘의 발현은 시대적 정황이었고, 안토니오가 아나키스트적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고, 프랑코군이 아나키스트의 도시 사라고사를 점령하자 극심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오는 프랑코군에 거짓 입대한 후 공화파 의용군에 투항한다. 그곳에서 안토니오는 스스로를 '구사일생파' '아나키스트 사총사' '납탄동맹' 등으로 부르는 네 명의 동지들을 만나 비로소 확고한 아나키스트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런 동맹도 좋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 우선이야. 그 위대한 사상 때문에 우리 같이 힘 없는 사람들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잖아. 그러니깐 그 신발이 있든 없든, 진짜 부적은 바로 우리의 정신과 이 신조 속에 있어.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57쪽)
ⓒ 길찾기
하지만 그들의 희망도, 결의도, 우정도 영원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의용군은 거듭된 전투 속에서 차츰 지치고 혼란을 겪는다. 상부는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추진하여 그들은 계급적 위계를 명시한 군대로 편입된다. 그들은 결국 프랑코군에 패배하고 프랑스 국경지역으로 피난한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지만 민주주의 국가인 프랑스는 그들을 홀대하고 경시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프랑스와 스페인 등을 전전한다. 프랑스도,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도, 독일군에 승리한 미군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국가도, 민주주의 국가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마르세유를 거쳐 고향인 페나블로로 결국 돌아온다.
한때 '납탄동맹'을 맺었던 아나키스트 동지 중 일부는 죽음을 맞이하고 일부는 변절의 삶을 선택한다. 처음엔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선택이었으나 그들은 차츰 가난한 자들을 짓밟으며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려 불의한 부를 획득한다. 프랑코의 독재 정권 하에서 안토니오도 다르지 않았다. 아나키즘의 서약은, 종교적 서약으로 맺은 결혼의 서약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아나키즘 대신 가족 이데올로기 안에 안주한다.
"변절한 사람은 루시오 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단순히 지난날의 이상을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열렬한 신봉자가 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절은 고백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겨 둔 개개인의 비극을 배신하는 것이다. 아니, 배신이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자살을 의미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묻어야 했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선 마음을 죽여야 했다."(135쪽)
이 책은 파시즘에 맞서 혁명의 전위에 섰으나 패배를 거듭하다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한 아나키스트의 패배를, 그의 비극적 삶을 담아내고 있다. 장엄한 패배가 아닌, 그들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정치와 자본 권력과 타협하며 적극적인 변절을 선택했기에, 그들의 비극은 더욱 서럽고 처연하다. 안토니오는 아내와 이혼하고 한 양로원에 갇혀 쓸쓸한 노년의 삶을 보낸다. 그의 투신은 마지막 저항이었고, 소년 시절부터 품고 있던 '하늘을 비상하는 꿈'의 극적인 실현이었을 것이다.
한 아나키스트의 비극, 혹은 희망
아나키스트의 패배와 자살. 이 비극은, 오늘 어떤 함의로 읽어야 하는가. 과연 어떤 희망을 도모할 수 있을까. 자살한 아나키스트의 아들인 저자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하나의 존재가 다른 하나를 으스러지게 껴안는 형태인 '융해'"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아나키스트적 존엄을 복원하고자 한다. "글쓰기는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고발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특히 '만화'라는 서술 방식은 그 슬픈 역사에 입체감을 더하고, 탁월한 공감의 언어를 체득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독자를 향한 새로운 동맹을 극적으로 도발한다.
"더 넓게 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는 이 유대 속에서 그동안 써왔던 가면을 벗고, 자신의 가장 연약한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상처 때문에 흉터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맹과 같았다. 아버지로부터 혹은 애인, 친구, 희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오랫동안 속죄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소외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동맹말이다."(214쪽)
왕정 체제와 공화정 체제의 연이은 붕괴, 이데올로기 투쟁, 세계전쟁과 맞물린 극심한 내전, 부르조아와 결탁한 독재정권의 득세. 스페인과 한국의 현대사는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아나키스트들은 무도한 세월 앞에 변절과 패배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의 슬픔도 비슷할 것이다. 욕망은 절망으로 귀결되지만, 가슴속 깊은 슬픔은 우회하지 않고 돌진하는 저항의 결기를 추동한다. 아나키즘은 온갖 불의에 맞선 시대적 정황이다. 비극처럼 보였던 아나키즘의 역사는 다시 극적으로 회생한다.
스페인의 비폭력 저항운동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을 위시한 수백만 명의 시위대는 "분노에서 반란으로"라는 구호 아래 자본주의와 결탁한 정치권력에 맞선다. 그리고 우리의 광장에도 무도한 권력에 맞선 촛불로 인해 정의와 자유의 가녀린 희망이 극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안토니오를 비롯한 숱한 아나키스트들의 죽음은 허망한 패배가 아니라 장엄한 비상, 그 희망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더욱 교묘하고 노골적인 모든 폭력에 맞선 '소외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동맹', 그 기막힌 희망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