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유시민도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들'처럼 살아가길

내가 간직한 유시민의 세 가지 초상(肖像)




"세상이 무서웠다. 사람이 싫어졌다. 

민주주의, 자유, 정의, 진보, 조국, 이런 말을 들어도 더는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운명이다>, 249면)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야당이 참패했을 때, 총선 직후 통합진보당이 분열했을 때, 12월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내지 못했을 때, 지난 2월 14일 대법원이 노회찬 전 의원의 유죄를 선고하여 국회의원직을 빼았을 때, 나도 유시민이 썼던 저 마음이었다. 그 무엇에도 설레지 않았다. 유시민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직후 '가슴이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고 썼지만, 결국 다시 정치를 시작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는 '정치인 유시민'으로 지금껏 살아왔던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봄 캠퍼스에서 한 선배가 건넨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달했던 1985년, '서울대 프락치 폭력 사건'에 연류되어 재판받던 당시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은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남겼다. 독방에서 미농지 넉 장과 먹지 석 장에 써내려간 명문이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그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청년 유시민의 문장은 당시 나의 가슴을 한껏 뛰게 만들었고 시대의 불의에 분노하게 만들었다. 유시민은 1992년 한겨레신문에 독일통신원 자격으로 종종 글을 쓰고는 했는데, 당시 그의 글을 스크랩하여 보관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내게 시대를 읽어주는 좋은 선생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여러 매체에 썼던 칼럼과 몇 권의 책들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특히 1988년 펴낸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당시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책이 아직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그릇된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거꾸로 보는 세계사> 1995년 개정판 서문)



유시민의 두 번째 격문, "바리케이드 앞에..."


칼럼리스트와 저술가, 방송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유시민은 돌연 정치에 뛰어든다. 내가 간직하는 유시민의 두 번째 모습은, 2002년 여름 "바리케이드 앞에 화염을 들고 다시 서는 심정"으로 썼다는 또 하나의 격문에 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무현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과 당내 후단협을 비롯한 정치세력에 의해 후보직 마저 위태로울 때, 유시민은 절필을 선언하고 정치인이 된다. 인터뷰에서 그는 절필의 이유를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의무을 다하기 위해서"라고 "한가롭게 칼럼을 쓸 수만은 없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는 훗날 <운명이다> 에필로그에서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는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화려한 학력도 없었다. 힘있는 친구도 없었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열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가 좋았다. 그가 혼자, 너무 외로워 보였기에 그에게 다가섰다."(<운명이다>, 346-347면)


유시민은 노무현에게 가해지는 불의한 반칙에 분노했고, 직접 뛰어들어 그를 구해냈다. 정치인 유시민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노무현 후보는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유시민은 개혁국민정당 대표를 거쳐 16, 17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르나 정치인 유시민에겐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대통령 선거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 철회 선언을 했을 때, 유시민은 밤새 노무현에 대한 지지의 이유를 인터넷에 전파했다. 유시민의 주장은 민주노동당 사표론과 맞물려 진보정당의 미움을 받았고, 집권 내내 노무현 정권의 논객으로 활약하여 진보정당에게는 도저히 함께하기 힘든 정치인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언젠가 전여옥 전 의원과 토론하던 모습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분노와 경멸의 시선으로 전여옥 전 의원을 응시하던 유시민에 숱한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을 그의 지지자로 만들기 충분했을지는 모르나, 겉으론 싸우나 속으론 한통속인 정치인들의 세계에선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가 여야를 막론한 숱한 정치인들로부터 비토당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치인 유시민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와 운명을 같이했다. 그도 실패하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 시절, 그는 동료 의원들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싸가지 없다'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보수와 진보 세력은 공히 그를 '분열주의자'로 비난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의 전형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유시민을 매몰차게 비판하던 강준만 교수도 언젠가 다음과 같이 썼다. 적어도 유시민의 진심을, 강준만 교수는 알았던 것이다. 


"여기서 유시민 비판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유시민은 지금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출세나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조국을 위해 강제로 차출당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지방대 교수'다."(<인물과사상> 2005년 5월호)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유시민의 에필로그


유시민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외면하지 아니하고, 2008년 총선에서 대구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낙선한다. 그리고 잠시, 정치 활동을 접고 글쓰기와 강연 활동에 몰두한다. 하지만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유시민의 운명은 다시 기로에 놓인다. 유시민은 서울역 분향소에서 상주 노릇을 하였다. 그때, 고 노무현 대통령을 조문하며 유시민의 슬픔을 보았다. 결코 잊혀지지 않는 슬픈 얼굴로 유시민은 울고 또 울었다.  


"내게는 영원히 대통령일/세상에 단 하나였던 사람/그 사람/노무현"(유시민이 쓴 시, "서울역 분향소에서")





내가 간직하는 유시민의 세 번째 모습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의 에필로그이다.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와 노무현을 구하러 나서던 격문이 분노에 찬 결기였다면, 이 글은 망자에 대한 슬픔의 연서였다. 유시민의 글을 읽으며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그렇게 살아 있는 한, 그를 영영 떠나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이후, 정치인 유시민은 다시 질주하였다. 하지만 실패를 향한 질주였다. 때로 그는 실패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국민참여당을 만들어 2010년 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야권단일 후보로 나섰으나 김문수 지사에 석패했고, 2011년 김해 보궐 선거에 이봉수 후보를 야권단일후보로 내세웠으나 다시 낙선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탈당파와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만들었으나 총선에도 실패하고 당도 분열되고 만다. 마침내 지난 대선, 그가 지지했던 문재인 후보도 패배하고, 드디어 '같은 편'이 된 친구 노회찬 마저 며칠 전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그리고 오늘, 유시민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트위터로 전한 몇 개의 문장이 전부였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납니다. 지난 10년 동안 정치인 유시민을 성원해주셨던 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열에 하나도 보답하지 못한 채 떠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u_simin)


민주당은 "착잡하지만 그의 뜻을 존중한다"면서도 "기득권과 기성 정치에 끊임없이 도전한 그의 비주류 정신은 높이 살 만 하지만 그가 서있던 곳에는 분열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라고 논평했다. 적어도 유시민에 대해선,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태도는 구분하기 힘들다. 후안무치한 민주당에 마지막 미련을 버린다. 분열주의자라는 비판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다. 다만 유시민의 정신은, 탐욕스런 위정자들의 공고한 오만함과 결코 함께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여 그는 늘 분열할 수 밖에 없었던 '비주류'였던 것이다. 



용서해달라는 그의 마지막 당부가 너무 아프다


지금껏 간직하던 유시민의 세 가지 초상(肖像)을 다시 꺼내 본다.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2002년 노무현 후보를 지키려 나서며 써 붙였던 격문, 그리고 <운명이다>에 붙인 에필로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장들이고 오롯이 담긴 슬픔이자 분노였다. 슬픔은 유시민을 질주하게 만들었고, 분노는 그의 정치적 힘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인 유시민'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토로한 대로 늘 불행했다. 그래서였을까. 퇴임하여 고향을 찾은 고 노무현 대통령은 유시민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청춘의 독서>, 8면)


나의 진심도 '정치인 유시민'의 마지막 인사를 반긴다. 유시민이 사랑하는 딸에게 썼던 것처럼, 유시민도 이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살러 온 존재'로, 자신의 길을 가길 바란다. 행복한 '자유인 유시민'을 보기 원한다. 허나, 용서해 달라는 그의 마지막 당부가 못내 서럽고 아프다. 불의와 반칙에 맞선 분노에 찬 결기를, 이제 어떤 정치인에게 찾아야 하나. 도대체 가슴이 설레지 않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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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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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목할 만한 매혹적인 작가다. 화가를 꿈꾸었으나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대학에선 건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스물세 살 때였다. 그리고 7년 뒤, 첫 소설이 세상에 나오고, 그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하며 빛나는 성취를 질주한다. 


파묵은 화가와 소설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은 오로지 이성으로 쓰고, 그림은 오로지 재능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다분히 회화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물론, 그곳의 배경은 세밀한 그림처럼 묘사된다. 이 책은 파묵의 문학 여정 및 소설 이론에 대한 회고이다.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11면)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우선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12면)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18면)


이 책은 소설가와 독자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독자(소설가)는 소박한 독자와 성찰적인 독자로 나뉜다. 소박한 독자는 소설을 어떤 회화 작품을 감상하듯 감성적으로 읽는다. 성찰적 독자는 분석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파묵의 결론은 조금 식상하나 지당하다. 즉 소박한 읽기와 성찰적 읽기가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 책의 마지막 6장이 그것을 말한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압축된 공간이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작가적 상상력의 어떤 신비로운 지점이다. 소설가는 이 지점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독자는 중심부를 찾기 위해 읽기에 집중한다. 특히 독자는 그 중심부에 닿기 위하여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단어, 그림, 사물을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 감성적 읽기가 결여된 소설은 제대로 그 중심부에 닿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찰적 읽기가 없이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20면)


내게 소설 창작이란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는 예술입니다. 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든 문장에서, 모든 문단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중심부를 찾고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163면)


조금 미안하고 난데 없는 결론이지만, 파묵은 강연보단 소설을 읽어야 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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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알레고리 현대의 문학 이론 42
폴 드 만 지음, 이창남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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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쉽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느라 며칠을 끙끙 앓았다. 드 만은 현대 문학 이론가이자 해체주의 철학가다. '낭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드 만은 196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만난 자크 데리다와 1970-80년대 해체주의 이론 논쟁을 주도하였고, 신비평 이후 문학, 미학, 언어, 수사학 영역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개척'하였다. 


드 만은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느리게 읽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파스칼의 충고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이 책은, 독서는 늘 알레고리적 상황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알레고리는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의 어떤 필연적 관계보다는 임의적이고 관습적인 관계'에 근거한다. 결국 알레고리는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드 만이 말하고 싶은 것은 독서의 불가능이며, 우리는 늘 오독한다는 전제이다. 책은 그 테스트가 가진 본래의 의도와 늘 다르게 이해된다. 1부 '수사학'에서는 릴케, 니체, 프루스트를, 2부 '루소'에서는 루소의 저작들을 통해 독서라는 행위의 내적 모순에 주목하여, '스스로 소외된 기호'인 알레고리적 독서를 입증해 나간다. 


독서의 실패에 대한 드 만의 논증은 근대적 믿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지적 욕망은 텍스트를 온전히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독의 패러다임은 지적 욕망을 부추긴다. 정복된 텍스트는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가장 성스러워야 할 텍스트일 수록, 지적 탐욕의 대상이 된다. 그 단적인 예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과연 독서라는 행위는, 무엇으로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가. 독서의 행위에 모든 해석학을 해체하겠다는 드 만의 논증에 감탄하며 기꺼이 굴복하면서도, 그 길을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난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드 만의 지적대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오랜 알레고리에 머물고야 만다. 


동일하게 강력한 미학적인 감응적 독서와 수사적인 의식적 독서 사이의 분열은 그 텍스트가 구성한 내부와 외부, 시간과 공간, 매체와 내용, 부분과 전체, 움직임과 정지, 자아와 이해, 저자와 독자, 메타포와 메토니미 사이의 유사 종합을 무화한다. 그것은 일종의 모순어법과 같이 기능한다. 하지만 이것이 재현적인 호환 불가능성보다는 논리적인 호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한, 사실상 일종의 아포리아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상호배타적인 독서가 불가결하게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리고 주체의 층위뿐만 아니라 형상화의 층위에서도 참된 이해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06면)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이해했다”라는 표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전체 소설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은 전통적으로 이 ‘이후’를 문학적이고 미적인 소명이 완수되는 순간으로 해석해왔다. 그 순간 경험에서 글쓰기로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의 합치 속에 이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알레고리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자에게는 독서 불가능한 형상인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 사이의 매개할 수 없는 차이는 화자 마르셀이 이 ‘이후’를 자신의 과거 속에 자리매김하여 완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화자인 마르셀은 저자 프루스트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할 때만큼 그 저자와 많이 동떨어지게 되는 때는 없는 것이다. “죽기 전에 진리를 만난 사람은 행복하다. 설사 죽음이 가까울지라도 진리의 시간을 알리는 괘종이 죽음의 시간 이전에 울린 사람은 행복하다.” 저자로서 프루스트는 죽음의 시간처럼 진리의 시간이 결코 제때에 도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밀히 진리가 스스로와 합치하지 못하는 무능함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의미가 사라지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그 자체의 의미가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114-1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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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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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전 손택은 소설가이자 에세이 작가, 예술 평론가이다. 또한 그녀는 '열렬한 실천가'였다. 한국에 방문하여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하였고,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독를 기다리며>를 공연하였으며, '9.11' 이후 미국 정부의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저항하였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탄탄한 논리를 담보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단호한 문장 속에 담아내는 그녀의 글쓰기를 무척 좋아한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이 책의 제호이면서 수록된 에세이 중 하나인 "문학은 자유다"는 <타인의 고통>의 부록으로 이미 읽었고, 여러 글모음집이어서 굳이 소장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옮겨놓은 문장만 해도, 원고지 80매 가까이 된다. 결국엔 이 책도 구입해야 했다. 소장할 만한 책이다. 특히 소설가, 번역가, 독자를 비롯한 문학을 희망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손택의 입문서로 <타인의 고통>을, 그녀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으로 이 책 <문학은 자유다>를 추천하고 싶다. 


손택은 2004년 12월,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은 2007년 발간되었고 서문을 그녀의 아들인 데이비드 리프가 썼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여러 문학 평론을 모았다. 세 번째 실린 에세이 "도스또옙스끼를 사랑하다"는 나의 통념에 거세게 도전하는 질문을 던지는 오래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글이다.   


도스또옙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유대인은) 도스또옙스키가 유대인을 증오했다는 사실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 사람, 능멸당하고 상처 받은 사람을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이 증오에 가득차 유대인을 혐오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유대인들이 도스또옙스키에게 특히 끌리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도스또옙스키를 사랑하다, 61-62면)


이 대목에서 난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레 미제라블>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칼럼이 생각났다. 


으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초인처럼 완강하고 성인처럼 선량한 주인공의 활약과 가난한 매춘부의 유복자로 빛나듯 사랑스런 코제트의 행복한 연애 등 요컨대 전체적으로 ‘판타지’ 같은 얘기다. 원작자인 위고 자신이 사회변혁보다 종교적 자선의식 경향이 강하고, 강고한 애국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였다. 원래 엥겔스는 이런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 사실이 있는데,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는 그때 시작됐다. 자유주의 혁명과 식민지주의는 그들에게 모순 없이 양립하고 있었다. 근대의 양면성이며 기만성이다.


2부 "미국의 야만성"은 손택의 여러 정치 비평을 담았으며, 저항하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손택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다소 다른 글과의 맥락에 상관없어 보이는 에세이 "사진에 관한 짧은 요약"이 실려 있는데, 마치 나를 위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책인 <타인의 고통><사진에 대하여>의 '코다'라고 할 만하다.   


사진은 첫째로, 보는 방식이다.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사진에 관한 짧은 요약, 173면)


3부 "투쟁하는 독자"는 예루살렘상, 오스카 로메로상, 독일 서적출판조합 평화상 등의 수상 연설과 나딘 고디머 등에서의 강연 원고를 담았다. 그녀의 문학이 세상을 향하여 발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 연설들을 읽으며 짐작할 수 있다. 그녀 스스로 빛나는 작가였지만, 그보다 먼저 투쟁하는 독자로서 존재했던 손택의 정체성이 잘 담겨 있다.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고, 읽으면서도 자주 멈춰야 했다. 특히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은 통째로 외우고픈 무모한 욕심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문학은 자의식이고, 회의고, 양심의 거리낌이고, 깐깐함입니다. 또한 노래고, 자발성이고, 환희입니다.(203면) 


문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열망들에 뿌리박은 실천이기 때문입니다.(203면)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그릇된 정보의 공모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단순하게 만들려는 목소리에 반대하는 뉘앙스와 모순의 집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정신적 약탈자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파편과 경험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206면)


롤랑 바르트가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말하는 사람은 쓰는 사람과 다르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207-208면)


문학은 정신적 여행입니다. 과거로, 그리고 다른 나라로의 여행. 또한 문학은 더 나은 기준에 바탕한 현실의 비판입니다.(239면)


문학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건함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 진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268면)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독서와 내성內省의 가치가 끈질기게 위협받는 요즈음, 더더욱 문학은 자유입니다.(274면)


3부의 두 번째 에세이는 문학 번역에 대한 글이다. 꼭 '문학'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상관없다. 번역에 관한 히에로니무스와 슐라이어마허의 견해가 있다. 달리 말하면, 정확성과 충실성의 역할에 대한 오랜 논쟁이다. 손택도 그러하지만, 나도 슐라이어마허의 편에 서련다. 번역에 관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있지만, 번역가로 입문하려는 이들에게(혹은 번역에 관심있는 나같은 독자들에게도) 이 짧은 에세이는 매우 유익할 것이다. 


"번역의 목표를 원작자가 번역 대상 언어로 글을 쓴 것처럼 만드는 것에 두는 것은 이룰 수 없는 목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무효다."(슐라이어마허, 228면)


독서 노트를 쓰는 지금, 한국에선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하느라 소란스럽다. 종일, 거듭 밀려오는 허무와 무기력에 허덕이고 있다. 독서 노트를 쓰며, 다시 손택의 사유에 몸과 정신을 일으킨다. 우리에게, 나에게 '손택의 길'은 다시 맞이해야 할 소명이자 운명일 것이다.  


저항해 보았자 부당함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진심으로 깊이 숙고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걸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252면)


우리가 열렬히 지지해야 할 이 힘든 싸움을 넘어, 정치적 저항에 있어서는 인과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고 복잡하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투쟁, 모든 저항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은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칩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저기에서. 지금이 아니라면, 곧.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25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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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수전 손택 지음|홍한별 옮김|이후2007)

움베르트 에코의 문학 강의(움베르트 에코 지음|김운찬|열린책들2005)

독서의 알레고리(폴 드 만 지음|이창남 옮김|문학과지성사|2010)

소설과 소설가(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민음사|2012)







1. 언젠가 했던 이야기다. 스물아홉에 신학교를 그만 두었고, 서른아홉에 출판사를 그만 두었다. 신학을 공부하는 기쁨은 인생 최고의 희열에 가까웠으나, 신학이 거하는 자리는 자못 절망스러웠던 까닭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나의 세상과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던 그즈음, 난 신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출판사에 들어갔다. 사유의 체계가 되어주었던 책들, 그리고 선생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특히 그곳은 '문서운동'이란 이름으로 나의 의지를 한껏 발휘할 수 있었고 삼십 대의 전부를 그곳에서 보냈다. 하지만 작년에 결국 그곳도 떠나야 했다. 떠난 이유는 여기에 미처 다 적을 수 없으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책 읽기에 대한 좌절 때문이었다. 책 읽는 것, 책 읽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회의가 책을 만드는 나에겐, 스물아홉에 경험했던 그 절망과 비슷하였던 까닭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다시 숱한 밤을 책을 읽으며 지낸다. 글을 쓰고 있다. 그 글은, 책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오늘 독서 노트는 그 물음의 과정을 일부 기록한 것이다. 아직 나의 물음은 답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런 책들이 어떤 희망의 단초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2. 문학은 자유다  수전 손택은 소설가이자 에세이 작가, 예술 평론가이다. 또한 그녀는 '열렬한 실천가'였다. 한국에 방문하여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하였고,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독를 기다리며>를 공연하였으며, '9.11' 이후 미국 정부의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저항하였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탄탄한 논리를 담보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단호한 문장 속에 담아내는 그녀의 글쓰기를 무척 좋아한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이 책의 제호이면서 수록된 에세이 중 하나인 "문학은 자유다"는 <타인의 고통>의 부록으로 이미 읽었고, 여러 글모음집이어서 굳이 소장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옮겨놓은 문장만 해도, 원고지 80매 가까이 된다. 결국엔 이 책도 구입해야 했다. 소장할 만한 책이다. 특히 소설가, 번역가, 독자를 비롯한 문학을 희망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손택의 입문서로 <타인의 고통>을, 그녀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으로 이 책 <문학은 자유다>를 추천하고 싶다. 


손택은 2004년 12월,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은 2007년 발간되었고 서문을 그녀의 아들인 데이비드 리프가 썼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여러 문학 평론을 모았다. 세 번째 실린 에세이 "도스또옙스끼를 사랑하다"는 나의 통념에 거세게 도전하는 질문을 던지는 오래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글이다.   


도스또옙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유대인은) 도스또옙스키가 유대인을 증오했다는 사실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 사람, 능멸당하고 상처 받은 사람을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이 증오에 가득차 유대인을 혐오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유대인들이 도스또옙스키에게 특히 끌리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도스또옙스키를 사랑하다, 61-62면)


이 대목에서 난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레 미제라블>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칼럼이 생각났다. 


으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초인처럼 완강하고 성인처럼 선량한 주인공의 활약과 가난한 매춘부의 유복자로 빛나듯 사랑스런 코제트의 행복한 연애 등 요컨대 전체적으로 ‘판타지’ 같은 얘기다. 원작자인 위고 자신이 사회변혁보다 종교적 자선의식 경향이 강하고, 강고한 애국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였다. 원래 엥겔스는 이런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 사실이 있는데,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는 그때 시작됐다. 자유주의 혁명과 식민지주의는 그들에게 모순 없이 양립하고 있었다. 근대의 양면성이며 기만성이다.


2부 "미국의 야만성"은 손택의 여러 정치 비평을 담았으며, 저항하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손택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다소 다른 글과의 맥락에 상관없어 보이는 에세이 "사진에 관한 짧은 요약"이 실려 있는데, 마치 나를 위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책인 <타인의 고통><사진에 대하여>의 '코다'라고 할 만하다.   


사진은 첫째로, 보는 방식이다.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사진에 관한 짧은 요약, 173면)


3부 "투쟁하는 독자"는 예루살렘상, 오스카 로메로상, 독일 서적출판조합 평화상 등의 수상 연설과 나딘 고디머 등에서의 강연 원고를 담았다. 그녀의 문학이 세상을 향하여 발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 연설들을 읽으며 짐작할 수 있다. 그녀 스스로 빛나는 작가였지만, 그보다 먼저 투쟁하는 독자로서 존재했던 손택의 정체성이 잘 담겨 있다.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고, 읽으면서도 자주 멈춰야 했다. 특히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은 통째로 외우고픈 무모한 욕심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문학은 자의식이고, 회의고, 양심의 거리낌이고, 깐깐함입니다. 또한 노래고, 자발성이고, 환희입니다.(203면) 


문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열망들에 뿌리박은 실천이기 때문입니다.(203면)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그릇된 정보의 공모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단순하게 만들려는 목소리에 반대하는 뉘앙스와 모순의 집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정신적 약탈자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파편과 경험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206면)


롤랑 바르트가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말하는 사람은 쓰는 사람과 다르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207-208면)


문학은 정신적 여행입니다. 과거로, 그리고 다른 나라로의 여행. 또한 문학은 더 나은 기준에 바탕한 현실의 비판입니다.(239면)


문학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건함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 진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268면)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독서와 내성內省의 가치가 끈질기게 위협받는 요즈음, 더더욱 문학은 자유입니다.(274면)


3부의 두 번째 에세이는 문학 번역에 대한 글이다. 꼭 '문학'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상관없다. 번역에 관한 히에로니무스와 슐라이어마허의 견해가 있다. 달리 말하면, 정확성과 충실성의 역할에 대한 오랜 논쟁이다. 손택도 그러하지만, 나도 슐라이어마허의 편에 서련다. 번역에 관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있지만, 번역가로 입문하려는 이들에게(혹은 번역에 관심있는 나같은 독자들에게도) 이 짧은 에세이는 매우 유익할 것이다. 


"번역의 목표를 원작자가 번역 대상 언어로 글을 쓴 것처럼 만드는 것에 두는 것은 이룰 수 없는 목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무효다."(슐라이어마허, 228면)


독서 노트를 쓰는 지금, 한국에선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하느라 소란스럽다. 종일, 거듭 밀려오는 허무와 무기력에 허덕이고 있다. 독서 노트를 쓰며, 다시 손택의 사유에 몸과 정신을 일으킨다. 우리에게, 나에게 '손택의 길'은 다시 맞이해야 할 소명이자 운명일 것이다.  


저항해 보았자 부당함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진심으로 깊이 숙고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걸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252면)


우리가 열렬히 지지해야 할 이 힘든 싸움을 넘어, 정치적 저항에 있어서는 인과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고 복잡하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투쟁, 모든 저항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은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칩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저기에서. 지금이 아니라면, 곧.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253면)






2. 움베르트 에코의 문학 강의  사실 난 에코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종종 텍스트에 대한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패러디로 치닫는 서사와 언어적 유희는 불편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어떤 면에서 그 불편함은 나의 결핍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강의라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에코의 발랄함은 더욱 돋보인다. 작품을 비틀과 뒤집고 패러디한다. 물론 슬쩍 자신의 서사나 문장을 끼어놓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번엔 위로가 되더라. 문학이 "우리에게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고 말하는 그의 선언이, 마치 문학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 역설이 유쾌하고 따뜻하였다. 에코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 그간 나의 편견은 무너질까. 궁금하다. 


문학은 언어의 형성에 기여함으로써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창조합니다. 앞서 단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호메로스 없는 그리스 문명, 루터의 <성서>, 번역이 없는 독일의 정체성, 푸슈킨 없는 러시아어, 건국 신화의 서사시들이 없는 인도의 문명은 어땠을까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13면)


세상은 단지 하나의 읽기를 허용하는 <닫힌> 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행성 간의 인력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그에 비해 책의 우주는 마치 열린 세계처럼 보입니다.(14면)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줍니다.(29면)  


기억은 우리 각자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일기이다.-와일드, <진지함의 중요성>(88면)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질문하곤 한다. 만약 내일 우주의 파국이 온 세상을 파괴하고, 따라서 내일 누구도 오늘 내가 쓰는 것일 읽지 못하게 될지라도, 나는 오늘 글을 쓸 것인가? 첫 순간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만약 누구도 나의 글을 읽지 못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쓸 것인가? 두 번째 대답은 <예>이다. 왜냐하면 은하들의 파국 속에서도 어떤 별이 살아남아서 미래에 누군가 나의 기호들을 해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묵시록의 전야에도 글쓰기는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다.(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465면)

불행하고도 절망적인 사람, 미래의 <독자>에게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사람이다.(465면) 





3. 독서의 알레고리  쉽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느라 며칠을 끙끙 앓았다. 드 만은 현대 문학 이론가이자 해체주의 철학가다. '낭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드 만은 196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만난 자크 데리다와 1970-80년대 해체주의 이론 논쟁을 주도하였고, 신비평 이후 문학, 미학, 언어, 수사학 영역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개척'하였다. 


드 만은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느리게 읽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파스칼의 충고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이 책은, 독서는 늘 알레고리적 상황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알레고리는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의 어떤 필연적 관계보다는 임의적이고 관습적인 관계'에 근거한다. 결국 알레고리는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드 만이 말하고 싶은 것은 독서의 불가능이며, 우리는 늘 오독한다는 전제이다. 책은 그 테스트가 가진 본래의 의도와 늘 다르게 이해된다. 1부 '수사학'에서는 릴케, 니체, 프루스트를, 2부 '루소'에서는 루소의 저작들을 통해 독서라는 행위의 내적 모순에 주목하여, '스스로 소외된 기호'인 알레고리적 독서를 입증해 나간다. 


독서의 실패에 대한 드 만의 논증은 근대적 믿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지적 욕망은 텍스트를 온전히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독의 패러다임은 지적 욕망을 부추긴다. 정복된 텍스트는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가장 성스러워야 할 텍스트일 수록, 지적 탐욕의 대상이 된다. 그 단적인 예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과연 독서라는 행위는, 무엇으로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가. 독서의 행위에 모든 해석학을 해체하겠다는 드 만의 논증에 감탄하며 기꺼이 굴복하면서도, 그 길을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난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드 만의 지적대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오랜 알레고리에 머물고야 만다. 


동일하게 강력한 미학적인 감응적 독서와 수사적인 의식적 독서 사이의 분열은 그 텍스트가 구성한 내부와 외부, 시간과 공간, 매체와 내용, 부분과 전체, 움직임과 정지, 자아와 이해, 저자와 독자, 메타포와 메토니미 사이의 유사 종합을 무화한다. 그것은 일종의 모순어법과 같이 기능한다. 하지만 이것이 재현적인 호환 불가능성보다는 논리적인 호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한, 사실상 일종의 아포리아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상호배타적인 독서가 불가결하게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리고 주체의 층위뿐만 아니라 형상화의 층위에서도 참된 이해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06면)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이해했다”라는 표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전체 소설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은 전통적으로 이 ‘이후’를 문학적이고 미적인 소명이 완수되는 순간으로 해석해왔다. 그 순간 경험에서 글쓰기로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의 합치 속에 이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알레고리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자에게는 독서 불가능한 형상인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 사이의 매개할 수 없는 차이는 화자 마르셀이 이 ‘이후’를 자신의 과거 속에 자리매김하여 완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화자인 마르셀은 저자 프루스트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할 때만큼 그 저자와 많이 동떨어지게 되는 때는 없는 것이다. “죽기 전에 진리를 만난 사람은 행복하다. 설사 죽음이 가까울지라도 진리의 시간을 알리는 괘종이 죽음의 시간 이전에 울린 사람은 행복하다.” 저자로서 프루스트는 죽음의 시간처럼 진리의 시간이 결코 제때에 도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밀히 진리가 스스로와 합치하지 못하는 무능함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의미가 사라지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그 자체의 의미가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114-115면) 

 




4.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목할 만한 매혹적인 작가다. 화가를 꿈꾸었으나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대학에선 건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스물세 살 때였다. 그리고 7년 뒤, 첫 소설이 세상에 나오고, 그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하며 빛나는 성취를 질주한다. 


파묵은 화가와 소설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은 오로지 이성으로 쓰고, 그림은 오로지 재능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다분히 회화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물론, 그곳의 배경은 세밀한 그림처럼 묘사된다. 이 책은 파묵의 문학 여정 및 소설 이론에 대한 회고이다.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11면)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우선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12면)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18면)


이 책은 소설가와 독자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독자(소설가)는 소박한 독자와 성찰적인 독자로 나뉜다. 소박한 독자는 소설을 어떤 회화 작품을 감상하듯 감성적으로 읽는다. 성찰적 독자는 분석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파묵의 결론은 조금 식상하나 지당하다. 즉 소박한 읽기와 성찰적 읽기가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 책의 마지막 6장이 그것을 말한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압축된 공간이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작가적 상상력의 어떤 신비로운 지점이다. 소설가는 이 지점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독자는 중심부를 찾기 위해 읽기에 집중한다. 특히 독자는 그 중심부에 닿기 위하여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단어, 그림, 사물을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 감성적 읽기가 결여된 소설은 제대로 그 중심부에 닿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찰적 읽기가 없이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20면)


내게 소설 창작이란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는 예술입니다. 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든 문장에서, 모든 문단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중심부를 찾고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163면)


조금 미안하고 난데 없는 결론이지만, 파묵은 강연보단 소설을 읽어야 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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