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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오르한 파묵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목할 만한 매혹적인 작가다. 화가를 꿈꾸었으나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대학에선 건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스물세 살 때였다. 그리고 7년 뒤, 첫 소설이 세상에 나오고, 그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하며 빛나는 성취를 질주한다.
파묵은 화가와 소설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은 오로지 이성으로 쓰고, 그림은 오로지 재능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다분히 회화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물론, 그곳의 배경은 세밀한 그림처럼 묘사된다. 이 책은 파묵의 문학 여정 및 소설 이론에 대한 회고이다.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11면)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우선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12면)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18면)
이 책은 소설가와 독자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독자(소설가)는 소박한 독자와 성찰적인 독자로 나뉜다. 소박한 독자는 소설을 어떤 회화 작품을 감상하듯 감성적으로 읽는다. 성찰적 독자는 분석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파묵의 결론은 조금 식상하나 지당하다. 즉 소박한 읽기와 성찰적 읽기가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 책의 마지막 6장이 그것을 말한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압축된 공간이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작가적 상상력의 어떤 신비로운 지점이다. 소설가는 이 지점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독자는 중심부를 찾기 위해 읽기에 집중한다. 특히 독자는 그 중심부에 닿기 위하여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단어, 그림, 사물을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 감성적 읽기가 결여된 소설은 제대로 그 중심부에 닿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찰적 읽기가 없이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20면)
내게 소설 창작이란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는 예술입니다. 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든 문장에서, 모든 문단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중심부를 찾고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163면)
조금 미안하고 난데 없는 결론이지만, 파묵은 강연보단 소설을 읽어야 더 매력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