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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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뜰한 선동가로 돌아온 유시민의 첫 번째 화두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지음/아포리아/2013)


이제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옳다고 믿는 방식 대로 하고 싶다고 한다. 정치란 '열정과 탐욕, 소망과 분노, 살수(殺手)와 암수(暗數)가 맞부딪치는 권력 투쟁'이며 정치인이란 그런 '정치가 내포한 비루함과 야수성을 인내하고 소화'하는 것이기에, 그는 정치인으로 보낸 지난 10년이 행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직업정치인으로는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때문일까? 유시민은 이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정치인으로 펴낸 지난 10년 간의 책들과 달리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도, 도덕적 딜레마에도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발언했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이 되기 전 '지식 소매상'으로 펴냈던 책들의 단단한 사유와 닮았으되, 훨씬 담백한 언어엔 숙련된 겸손마저 배어 있다. 정치인 유시민은 자유인으로의 복귀를 선언했으나, 이전 지식 소매상으로 활약하던 때의 유시민과는 또 달랐다. 그는 청춘을 다독이되 다그쳤고, '40대' 중년의 마음을 위로하되 충동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다만 옳은 방식으로,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연대하여 더불어 세상을 바꾸자고, 그는 이제 55세의 살뜰한 선동가였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열아홉 살의 유시민은 '도전하지도 않고 좌절한 현실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영문학을 전공하여 유학을 가서 나중에 철학자가 되길 바랐지만, 아들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유학은 애초 꿈꿀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 없이도 빨리 출세할 수 있는 법학과가 포함된 사회계열을 선택했다. 이루고 싶은 삶의 목표가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할 뿐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유시민을 맞이한 것은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과 뒤이은 전두환 정권이었다. 시대의 야만이 도전했고 그는 맞섰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능동적으로 세상과 부딪치지 못했다. 번민하면서 주저하는 내게, 세상이 먼저 부딪쳐 왔다. 세상은 나더러 체념하거나 굴복하라고 했고, 나는 거절하고 저항했을 뿐이다. 부당한 강요에 굴복하면 삶이 너무 비천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과 품격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다. 성년이 된 이후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한 감정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었다. 수치심과 분노, 슬픔, 연민, 죄책감,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본문 34쪽)

독방에서 미농지 넉 장에 먹지를 대고 써내려간, 그 유명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1985)엔 그러한 분노와 슬픔의 정서가 추동한 명문(明文)과 미문(美文)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시민의 모습도 그즈음에 있다. 결기 어린 문장들, 분노하는 지식인, 그리고 정치인 유시민. 

하지만 오늘 유시민은, 그런 과거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가치 없는 삶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원했던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과 깊은 사유를 통해 확신에 이르지 못한 가운데' 어떤 이념이나 명분을 받아들였고, 무엇보다 직업정치인으로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장 무거웠던 것은 직업정치인이라는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현실정치의 맥락에 포획당한 사람이었다. 나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른 것으로 규정당하고 해석되는 한 떳떳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회적 연대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계속 이렇게 산다면 온전하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본문 64쪽)

청춘을 위한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은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며 유독 안타까워 한다.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뉘우침이다. 그래서 이 책의 1장은, 청춘을 향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너의 원하는 삶을 고민하고 살아내라고 거듭 강조한다. 카뮈는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죽지 않고 사는 이유를 찾아 답해야 한다. 카뮈는 '세상과 삶 그 자체가 부조리라고' 말했다. 자살은 이 부조리를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가려면 이 부조리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있는 힘을 다해' 살아야 한다. 

삶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상처를 견딜 수 있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찾지 못한 이들은 작은 불운에도 쓰러지고 만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나 아프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처도 견딜 수 있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타인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

위로는 좋은 일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아픔을 덜어준다. 아프고 지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요즘은 책도 신문 방송도 모두 '힐링'이 대세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가 위로와 치유의 효과를 내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본문 51쪽)

40대 중년을 위한 질문,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올해로 마흔이 되었다. 작년 11월, 나의 삽십 대와 함께했던 직장을 떠났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하는 일들 사이에서 분투하던 나의 청춘은 그렇게 늙어갔다. 건강이 갑자기 안좋아졌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해마다 조금씩 가난해져 가는 비루한 현실은 욕망을 차츰 잃어갔다. 그리고 떠나기로 했고, 떠났다. 마흔을 맞던 나는, 그제서야 나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유시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에 가슴은 더욱 세차게 반응하였다. 그것은 생의 또다른 절박함이다. 

이 책의 2장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도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1980년 5월, 휴교령이 내리면 모든 도시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자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오직 광주의 학생회만 그 약속을 지켰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거리에 나섰으나 서울 시민들은 크게 반기지 않았고 시위하던 학생들은 망연자실했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 안양교도소에서 나온 지 보름 뒤에 군에 입대했다. 보초를 서던 어느 겨울날 영문도 모른채 지하 감방으로 끌려가 맞고 밟혔다. 동상이 번져 진물이 흘렀고 몸에는 옴이 잔뜩 올랐다. 그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수치심과 절망감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이는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본문 83쪽)  

죽음에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의적 선택이어야 한다고, 유시민은 주장한다. 스스로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죽음도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생명도 존엄한 것이므로 죽음도 존엄한 것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각자의 존엄한 권리라고 주장한다(다소 민감한 문제인 안락사 문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분명하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같은 것이다.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그 어떤 인생보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할 것이다. 질문이 같으므로, 답변도 다르지 않다. 유시민은 이 책의 3장을 통해,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로 답변하되, 4장 "삶을 마치는 헛된 생각들"을 통해 가치있는 삶을 망치는 못된 생각들을 맹렬히 비판한다. 

임상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을 '사랑, 일, 놀이'라고 하였고 유시민은 여기에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덧붙인다. 연대란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며,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유시민은 진보의 생물학을 주장한다. 진화론적 생물학은 인간이 설계된 대로 성장하고 자라도록 한다.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가족과 친족들이 서로를 돌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진보는 '혈연 집단에 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행동'과 정반대의 가치와 실천을 도모한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부자연스런 길을 선택한 진보주의는, 늘 역사의 소수로 존재한다. 대체로 소수이며, 현실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승리해도 그 승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정신은 역사적으로 계속 진화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주의는 패배했지만, 결코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2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의 정책 공약은 5년 전 낙선했던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의 공약도바 더 진보적이었다. 진보 세력은 선거에 졌을 뿐 역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옳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니 문재인 대통령을 보고 싶었던 시민들이 '멘붕'에는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본문 259쪽)


자유인 유시민의 선동

낙심하지 않은 진보는, 패배를 추스려 다시 연대한다. 연대하기 위해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는 것은 나의 유전자가 아니다. 나의 각성된 가슴이 분노하는 것이다. 각성된 마음들이 모여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더불어 전진해야 한다. 누군가는 목숨을 버려 진보를 지켜내고, 누군가는 촛불을 들거나, 누군가는 SNS로 그 가치를 실어 나른다. 누군가는 직업 정치인으로 나서고, 누군가는 평범한 시민으로 그 정치인의 후원자가 된다. 모두가 소중한 일이다. 

유시민은 이제 직업정치인이라는 불편한 옷을 벗고 자신이 가장 즐거워하며 할 수 있는 일, 즉 글을 쓰며 설렘으로 충만한 일상을, 품위 있는 노년의 삶을 꿈꾼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연대하여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기를 바란다. 결국 '나다운' 길을 찾아 놀고 일하고 사랑하되, '공동선'을 위해 뜨겁게 연대하는 삶. 유시민은 이제 자유인이 되어 그것을 힘껏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말_


1. 이 책의 출간 직후, 숱한 언론은 내용 중 안철수 관련 부분만 발췌하여 마치 유시민이 안철수를 '디스'한 것처럼 보도했고, 주로 기독교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일부 서평과 SNS에선 유시민이 칼뱅을 비판한 부분이 부각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반응이야말로, 유시민이 정치인으로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정황, 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보기에 유시민은, (문재인과 더불어)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진정으로 성공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고, 칼뱅에 대한 유시민의 비판도 별로 흠 잡을 것 없어 보였다(오히려 그 용기가 부러웠다). 더욱이 이 부분들은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2. 난 노무현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도 좋아하지만,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너무 곧고 옳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오류는, 그들 스스로 고백한 것으로 갈음하자. 난 안철수가 미심쩍다. 솔직히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박은주 김영사 대표의 말대로, 그의 담론은 늘 원론에 머물렀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안철수식 모델을 보편화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진보의 가치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안철수가 정치인으로는 성공하길 바란다. 안철수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정치인 유시민의 실패와 좌절, 자유인 유시민이 생각하는 진보의 가치는, 정치인 안철수에게도 좋은 통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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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종의 교회생각
박삼종 지음 / 홍성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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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혁명가였던 예수의 길을 꿈꾸다
[서평] 박삼종의 교회 생각(박삼종 지음/홍성사/2013)


한국은행이 2012년 12월 23일 발표한 가계신용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가계 빚은 922조 원으로 전년보다 10조 9000억 원이 증가했다고 한다. 가구당 평균 빚이 5천만 원 정도이고, 2011년 기준 연평균 소득은 4천만원이 조금 넘는다. 연 소득보다 빚이 더 많은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또한 가계부채의 질도 점점 악화된다. 제2금융권 총자산은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한다. 서민들은 고금리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제2금융권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11년 기준 물가상승율은 4퍼센트 정도이고, 실질임금상승률은 3.5퍼센트다. 전체 노동자 1900만 중 비정규직은 900만이고, 그중 최저 생계비 이하 비정규직이 400만이다. 청년 실업자는 110만 명으로, 다섯 명 중 한 명 꼴이다. 2010년 평균 자살율은 42.6명이다. 우리 사회는 승자독식 무한경쟁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99%의 사람들에게 짙게 드리워진 절망은 서서히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포기할 것을 종용한다. 

교회의 희망을 복원하다

한때 교회가 시대의 희망이었던 적이 있었다. 예수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불의한 사회구조 속에서 취득한 부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라고 하였고, 권력과 자기 의에 취한 위선적인 종교인에게 분노하고 책망하였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실상 불온했다. 가난한 자들을 편애하였고, 세상의 질서가 역전되는 세상을 꿈꿨다. 


한국교회만큼 집단적 증오의 대상이 또 있을까.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었던 적이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 사건은 단지 한 교회의 회심 사건이 아니라, 평양 전체를 뒤흔든, 한반도 전역으로 확장된 사회 변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교회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무능한 나라가 지켜 주지 못했던 재산과 생명을 교회가 지켜준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의 백성들에게 기독교란 계급 평등의 근대화 해방 공간이고, 보호 공간이고, 재산과 인명의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본문 75쪽)

하지만 교회에서 발발한 사회개혁 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좌초되기 시작한다. 일부 미국 선교사들은 선교 자원을 활용하여 자기 재산을 축적하거나 확보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일제 당국과 기독교 및 교회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억압받던 백성의 고통과 불의한 사회적 구조를 묵인한채, 신앙과 정치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근본주의 신앙을 강화했다.  

대전 동구에 평화의마을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저자 박삼종은 이 책 <박삼종의 교회 생각>을 통해, 승자독식 무한경쟁 체제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교회의 희망을 복원해 내고 있다. 그 복원에의 시도는, 애초 민중들의 희망이었던 복음이, 어찌하여 오늘 날 증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그 원인으로 '신사참배 체제'를 지목하며, 숙고와 성찰을 요구한다. 

신사참배 체제의 극복을 위해

한국교회는 '계급 평등의 근대화 해방 공간'으로 민중의 벗으로 부흥하였으나, 세력화된 교회는 이원론적 근본주의 신앙으로 권력과 타협했다. 1931년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신사 설치를 장려했고, 일본인의 민족 신앙인 신도에 참배하게 하였다. 일부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당하고 순교하기도 하였지만, 주류 기독교는 진보와 보수와 상관없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동참했다. 저자는 신사참배 참여는 단지 종교적인 행위 뿐만 아니라,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의 하부동원 체제에 적극 가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일제에게 멸사보국행위라는 명분 아래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고, 멀쩡한 교회 건물을 팔아 국방 헌금하고, 징병 모집에 적극 응하고, 위안부도 보내고, 돈 모아 비행기 헌납하고 이런 일을 교단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본문 83쪽)

이러한 사실은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교회는 이 부분을 금기시하고 침묵한다. 해방 이후에도 신사참배 체제는 유지되었다. 감리교도인 이승만은 친미정권을 만들며 친일 세력을 대거 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 요직의 22% 정도를 기독교인으로 채웠다(당시 기독교인의 인구 비율은 1%).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은 박정희 유신 개발 독재체제로 이어졌고, 한국교회는 권력을 지탱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 이데올로기의 하부동원조직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권력과 밀착된 교회는 국가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하였다. 신사참배 체제는 '제자도의 왜곡, 정신분열적인 기복신앙, 번영신학의 정신구조를 만들어' 냈다.

유신 개발 독재는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의 근대적 재현이고, 박정희의 딸이자 유신독재의 당사자인 박근혜는 이 신사참배 체제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상징물입니다.(본문 84-85쪽)
정치 목사들에 의해 교회가 정치권력의 힘에 호소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구성물이 조찬기도회와 한기총입니다.(본문 94쪽)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 사건 10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2007년 '어게인 1907' 운동을 펼쳤고, 2008년 70년 만에 처음으로 일제 때의 신사참배를 공식 회개했다. 하지만 '울부짖고 기도만 했을 뿐'이다.

그곳에서 회개를 선포했던 어떤 분은 성범죄를 지은 목사의 죄를 사랑으로 덮어 주자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수천억 원을 들여 교회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헌금으로, 그 많은 돈으로, 한국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살로 죽어가는 그 수많은 학생들의 가정을 위해 교회는 무엇을 했나요?(본문 118쪽)   

한국교회는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으로 성도를 회유하여 급성장하였다. 하지만 몰락의 조짐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얼마 전 검찰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를 100억대 배임과 탈세 혐의로 고발하였고, 복음주의권 대표적인 교회였던 사랑의교회는 초대형 예배당 건축으로 사회의 비판 여론에 직면하였고 오정현 담임목사는 논문 표절 의혹에 휩싸였다.
 
지금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회심이며, 구체적 실천이다. 한국교회들이 은행권에 진 빚이 4조 5천억에 이른다. 대부분 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한 빚이다. 교회 성장이란 허상은 거대한 예배당에 투영된 욕망으로 점철된다. 

'선물의 경제 공동체'를 꿈꾸다 

저자는 신사참배 체제의 극복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 '믿음은 곧 정의'이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세속 권력에 대항하는 바른 정치적 영성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을 바탕으로한 시민 불복종 운동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또한 '전쟁과 폭력을 획책하는 내외의 세력들에게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우리 이웃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경제민주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선물의 경제 공동체'를 대안 담론으로 제시한다. 

'약탈적 금융사회'의 높은 사회적 생존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거의 모든 이들이 불행해지고 약한 부분부터 파산하는 '빚 권하는 사회'입니다. 개인과 가계에 전적으로 책임이 지워진 이 높은 사회적 생존비용을 낮추고 결혼, 출산, 육아, 교육, 거주, 복지, 의료 등을 공동체가 책임짐으로써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선물의 경제 공동체'는 대가의 경제, 거래 관계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시장 경제를 사는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가 앞으로 고민하고 나아갈 방향입니다.(본문 135쪽)

저자는 '선물의 경제 공동체'를 대전 동구의 교회 공동체에서 실험하고 있다. 목회자나 사역자에 의존하는 교회 시스템을 개혁하고, 수직 구조가 아니라 서로가 벗으로 생활하고 연대하며, 다함께 노동하는 자립적 기반을 가진 생산 공동체, 지역에 뿌리내린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저자의 확신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선물의 경제가 흐르는 변방에서부터 새로운 변화'가 솟구칠 수 있을까. 나의 생각에, 저자의 확신은 가능성이기 이전에 옳은 길이다. 변방의 불온한 혁명가였던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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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봄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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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봄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다

[서평] 체르노빌의 봄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맹슬기, 이하규 옮김길찾기2013)



인간은 '자연을 통제한다'는 오만하고도 이기적인 야욕으로 20세기를 지배하려 했다. 화학 비료의 사용, DDT와 같은 강력한 살충제를 동원하여 작물의 생산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DDT의 대량 살포는 자연 생태계를 근원적으로 말살하기 시작하였고 인류의 생존 기반에도 차츰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아무도 그 심각한 위기를 짐작하지 못할 때,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을 출간하여 대중의 생태학적 경각심을 일깨웠다. 1962년의 일이었다. 


카슨은 자신을 고소한 거대 화학기업들의 자본과 싸웠다. 카슨의 책은 출간된 지 50주년이 되었고, 그녀의 용기는 어떤 상징처럼 오늘의 우리에게 간직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생태계는 실존적 위협과 직면하고 있다. 카슨의 경고 대로 해수면은 계속 상승하고, 산호초는 파괴되며,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된다. 당장 우리도 겨울과 초여름을 하루 차이로 오가며, 찬란했던 계절 봄을 그리워하고 있다. 

체르노빌, 인류 최악의 범죄

1986년 4월 26일,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가 체르노빌에서 발발한다. 당시 소련 당국은 체르노빌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다. 체르노빌은 세워진 지 2년 밖에 안 된 최신식 원자력 발전소로 소련 기술력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1986년 완공 목표로 5번, 6번 원자로가 건설 중이었고, 향후 총 10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질 계획이었다. 그런데 4기 원자로에서 발생한 사고로 체르노빌은 재앙에 휩싸인다. 


소련 당국은 사고 발생 35시간이 지난 후에야 주민 4만8천 명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1200여 대의 버스와 200여 대의 트럭을 동원했다. 유럽은, 특히 가장 많은 원자력 발전소를 보유한 프랑스는 언론을 동원하여 자국 원전의 안전성을 홍보하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소련 당국은 철저히 정보를 통제하고 은폐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최대의 재앙을 감출 수는 없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4천 명의 사람들이 방사능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피폭된 500백만 명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생존해 있고, 3백만의 아이들이 평생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한다. 하지만 여러 NGO 단체들은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원자력기구의 통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최소 2만5천 명에서 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현재 피폭으로 인해 암을 앓고 있는 최소 50만 명의 환자를 제외하고도 말이다. 2010년, 뉴욕의 사이언스 아카데미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 2004년까지 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남편을 포옹하는 것은 금지였다! 만질 수도 없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 "내 자궁은 피폭됐다. 그건 무언가에 의해 박살이나 난 듯 아무것도 없게 됐다..." "새들은 마치 장님이라도 된 듯이, 아니면 미치기라도 한 듯이 유리창에 부딪쳤다... 자살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본문 6-8쪽)

프랑스의 건축학도 출신의 만화가 엠마뉘엘 르파주의 책 <체르노빌의 봄>은,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새잎)를 인용하여 당시 체르노빌의 충격을 시각화한다. 이 책은 실화이며, 저자의 생생한 증언이다. 르파주는 2008년 4월에 체르노빌에 방문하여 2012년 11월까지 무려 4년의 작업을 거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1986년 4월, 원전 사고 이후 26년만에 잃어버린 체르노빌의 봄을 복원한 것이다. 



목판과 연필, 수채화로 덧입혀진 그림은 세밀하고 정교하고 사려 깊다. 독자들은 그림에 몰입하여 어느새 르파주와 함께 체르노빌의 숲을 거닌다. 그러다 문득, 놀라 멈춘다.르파주가 그랬던 것처럼, 오염에 내가 노출된 것이 아닌지 움추리며 악몽 같은 현실과 직면하는 것이다.  

황폐한 땅의 신성한 공포

르파주는 예술가 동료들(데생악퇴르 데생악퇴르/Dessin'Acteurs: 프랑스어로 ‘행동하는 데생’을 의미)과 함께 체르노빌에 갔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증언뿐만 아니라 참여자, 행동가, 투사가 되길 바랐다. 그들은 마치 레이첼 카슨의 결기와 비슷했다. 그들은 원자력 발전소로부터 40km, 방사능에 오염된 금지 구역에서 20km 떨어진 볼로다르카란 작은 마을에서 지내며, 금지 구역을 탐사하기 시작한다. 르파주와 그의 동료는 폐허의 실상을 그림으로 옮긴다. 

그들은 황폐화 된 땅에서 신성한 공포를 느꼈다. 금지 구역은 엄격히 통제된 땅이다. 그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장갑을 끼고 발목까지 덮는 부츠를 신고 다시 비닐로 덮었다. 방사능 측정기를 휴대하고 수시로 체크하며 외부 활동 시간을 철저히 지켰다. 방사능에 노출된 이끼와 풀, 나뭇가지를 피했다. 땅에 앉아서도 안 되고 땅에 떨어진 것은 무엇이든 버려야 했다. 땅은 물론, 지하층도 오염되어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착용한 장비는 모두 버리고 한 명씩 방사능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그들의 탐사는 진행되었다. 

"체르노빌의 폐허에는 낭만이 아닌 인간의 죄의식이 서려있다."(본문 93쪽)  

오염된 땅의 참사가 오롯이 보존된 끔찍한 현실 속에서, 금지 구역의 숲에서 르파주는 충만한 신록과 조우한다. 상상한 것일까. 르파주는 그것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환상에 압도된다는 것이다. 르파주는 현기증이 났다.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민하며, 르타주는 자신의 그림 밑에 방사능 수치를 적어 놓았다. "5.50 마이크로시버트(안전 수치는 0.10 이하)". 오직 방사능 측정기만이 "이곳은 오염되었으니 떠나시오!"라고 경고했다. 레이첼 카슨의 아련한 환상이, 여기에도 아련히 놓여 있다. 


볼로다르카란 마을. 그들은 처음엔 금지 구역의 숲에 가는 것보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어떤 이는 실제 나이보다 스무 살은 더 늙어보이기도 했고, 어떤 여인은 10대에서 성장이 멈춘 채 술에 절어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체르노빌 지역은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금을 받았지만, 더러는 자신들의 가혹한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술과 신앙에만 의지한 채 살았다. 

르파주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차츰 마을에 적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들을 환대했다. 그곳 사람들은 늘 어깨를 들썩이며 연주하고 노래하였다. '프랑스인들의 집'은 마을 사람들이 넘나드는 즐거운 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르파주도 그 사람들 속에서 빛나는 삶을 발견한다. 체르노빌의 봄이 그처럼 건재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금지된 땅, 그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을 그곳을 그리웠을 것이다. 잃어버린,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은, 그들의 노스탤지어였다. 

원자력 발전소 밀집도 세계 1위인 우리나라 

우리나라엔 23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 부산과 울산 사이에 6개가 가동 중이고, 2개를 더 짓고 있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 밀집도는 세계 1위이다. 숱한 사고로 말썽인 원자력 발전소도 어떻게든 더 쓰려고 한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한국>이라는 책을 펴낸 강은주는 "23개의 핵발전소를 가진 우리나라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발전소의 수명이 다한 후에도, 동굴에 갇힌 폐기물의 먼 미래도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가. 신기술은 위험을 생산하고 자본주의는 이를 증폭시킨다"라고 경고한다.












불과 1000킬로미터 밖에서 터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바람의 방향만 의지한 채 국민들에겐 그저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체르노빌 사고 직후 프랑스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후쿠시마 사고를 다루는 일본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 정부도 그저 감추고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린, 왜 이리도 순진하게 그것을 덜컥 믿어버리는 것일까. 잠재적 재앙을 그저 방기하는 것도 무서운 죄악과 다름 아니다. 레이첼 카슨이 인용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해악을 깨닫지 못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책이다. 지극한 슬픔은 결국 아름다움에 닿는다. 그 절절한 마음은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는 까닭이다. 체르노빌의 경우,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체르노빌은 2011년 3월에 터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전조였을 뿐더러, 우리에게 던지는 아득한 슬픔이자 경고이다. 찬란한 봄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다. 거대 자본과 단호히 맞섰던 레이첼 카슨, 혹은 목숨을 담보로 체르노빌에 들어가 극심한 폐허의 현장을 복원했던 르파주와 그의 동료들처럼,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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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은수연 지음 / 이매진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 대한 서평은 두 버전으로 썼습니다. 하나는 또다른 성폭력 피해자인 철학자 수잔 브라이슨의 책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와 비교하여 트라우마의 문제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면, 다른 하나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자인 저자 은수연에게 초점을 맞추되, 우리나라 성폭력의 현실과 성평등의 문제를 부각시키고자 했습니다. 두 서평을 각기 다른 매체에 기고하였으며, 오늘은 두 번째 서평만 블로그에 올려놓습니다. 
오마이뉴스에 14번째로 채택된 글이며(오름)"9년간 아빠에게 당한 딸의 기록, 외면할 수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나의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의 빛나는 이정표
세계 여성의 날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자 은수연을 기억하다

[서평]<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은수연 지음/이매진/2012)

서평(book review)은 '다시 읽기의 기록'이다. 다시 읽어야만 해석은 성찰에 닿고, 비로소 나의 텍스트가 된다. 나의 텍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 책을 '마스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난 책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하는 편이다. 책의 정신과 나의 정신이 만나는 지점, 그리하여 어떤 갈망 혹은 가치로 기억되는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나의 텍스트로 기억하고 간직하겠다는 의지이다. 피에르 자네는 "기억이란 하나의 행동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서평은 그런 면에서, 하나의 행동이어야 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을 받았고, 다시 읽기 시작한 지난 며칠 악몽과 불면에 시달렸다. 무언가를 더 보태기 어려운 텍스트가 있는 법이다. 이번엔 특히 텍스트에서 도망쳐야 글이란 걸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다시 읽기와 도망치기를 반복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무려 9년간 이어온 아빠의 성폭행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빠는 늘 엄마를 때렸고 아이들은 그것을 지켜보았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아빠는 삼남매를 끌고 시골 할머니집으로 갔다. 그날 밤, 아빠는 딸을 성폭행했다. 충동적인 실수가 아닌, 치밀한 계획 아래 실행된 잔혹한 폭력이었다. 여자아이는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그 이듬해 임신하여 낙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 폭력은 딸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가해졌다. 아빠는 기절할 때까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때린 뒤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게 하였고, 수능 전날 호텔에서 성폭력을 하려다가 저항하는 딸을 밤새 때리고 짓밟았다. 무려 9년간 이어온 친족 성폭력이었다. 

가족들에게 아빠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엄마는 맨몸으로 매맞는 일이 일상이었고,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빠가 딸을 성폭행한다는 것을 가족들은 알았지만, 다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리어 엄마는 늘 '너 때문에'라고 딸을 나무랬다. 아빠는 때리다가 성에 차지 않으면 혁대를 풀어 손에 감아쥐고 내리쳤다. 딸은 그런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때리다가도 시간이 되면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수요 예배를 인도하러 갔다. 아빠는 목사였다. 

대학생이 된 딸은 이렇게는 더 이상 살지 못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도망치고 잡혀오기를 반복했다. 첫 번째 가출은 그녀를 상담한 어느 여교수 때문에 실패했다. 교수는 그녀 몰래 집으로 연락하여 데려가라고 했다. 심지어 엄마에게 "이 아이도 오랜 시간 그 일을 당해서 그걸 즐긴 건 아닐까요?"라고 물었단다. 그렇게 집으로 잡혀가면 다시 죽을 만큼 맞았다. 가출하면 아빠는 엄마와 남동생을 앞세워 딸을 기어코 찾아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탈출에 성공하고 아빠는 성폭력특별법에 의해 구속되어 7년간 감옥에 갇혔다. 

성폭력에 관한 불편한 진실

여성가족부가 펴낸 '2010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인구 10만 명당 성폭력 발생빈도는 32.5명으로, 가장 수치가 낮은 일본(1.2명)과는 30배 넘게 차이가 났고, 미국(28.6명)과 영국(24.1명), 프랑스(16.6명)보다도 높았으며, 해마다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수치는 당연히 신고된 건수만을 기준으로 하며, 피해자가 오히려 극심한 수치심에 시달리는 성폭력 특성상 신고되지 않은 수많은 범죄들이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성폭력은 끔찍한 비율로 발생하는 일상적 범죄다.

성폭력은 사회의 남성성을 강화하고 피해자 뿐만 아니라 여성의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여성들이 스스로 조심한다면, 남성을 자극하지 않고 여성성을 절제하고 조신한다면 성폭력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도리어 '네가 그럴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추궁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추론들은 명백한 허위이며,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가하는 또다른 폭력이다. 이러한 사회의 부당한 시선 속에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선뜻 고발하지 못한다. 가해자의 복수, 사람들의 차가운 편견, 가십성 기삿거리로 다루는 사회의 시선 등 감당해야 할 두려움과 수치심은, 성폭력에 못지않은 고통인 까닭이다.

저자는 '은수연'이란 필명을 선택했다.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는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은수연'이란 이름은 합당하다. 그녀는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기어코 살아났으니까. 그녀는 아빠와도 맞서 싸워야 했지만, 세상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70~80퍼센트가 정신 질환에 걸린다고 떠들어대는 정신과 의사의 말도 상당히 불쾌하다. 소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폭력을 당한 여주인공들을 볼 때도 심기가 불편하다. 그 여자들은 엽기적이고, 침울하고, 어둡고, 우울하게 살면서 연쇄 살인을 하기도 하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다 극의 말미에 가서는 엄청난 비밀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그 여자는 어릴 적에 성폭력을 당했다'라는 이야기로 여주인공의 문제 행동을 이해시킨다.(19-20면)

용기를 내어 치유의 길로 떠나다


저자는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난 다음, 비로소 자신이 자유로움을 좋아하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으로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를 신청하고, 처음으로 혼자 미용실도 갔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며, 치유를 위한 첫걸음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빠를 벗어나면 다 해결될 것 같았지만, 그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동화 속에서 힘들게 살던 여주인공은 고통에서 벗어나면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로 끝이지만, 나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 밝은 겉모습이 다 덮을 수 없는 것들이 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기억. 그건 무서운 거다. 무엇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고, 없앨 수 없다. 보상받을 수는 더더욱 없다. 지금 내가 자유롭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몸, 내 마음, 내 영혼, 내 시간에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엷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56-57면)

그녀는 어느 순간 괜찮은 척 하기를 멈춘다. 그리고 어느 때고 슬픔이 벅차오르면 울었다. 슬퍼하는 대로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그로 인해 남자친구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떠났지만,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깊고 깊은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갔다. 무엇보다 시간을 견뎌야 가능한 일이었다. 

세살이 돋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76면)

그리고 그녀는 상처에 맞서 싸운다. 상처를 노출하고, 표출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빠를 직면하고 용서하기로 결정한다. 감옥에서 7년을 보내고 나온 아빠는 여전히 지독한 이기심을 가졌고,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고, 여전히 그는 목사였다. 반면 저자는 혼자였고 가난했고 여전히 눈물 많은 가녀린 존재였지만, 아빠를 용서하고 자유로워지기를 선택한다.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저자는 살아남기 위해 지금껏 버텼다면, 앞으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삶을 살아내겠다는 당찬 꿈을 향해 길을 나선다.  

수연, 이제 '용기'를 내기 위해 떠난다.(227면)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자 은수연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이 날을 맞이하여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관하는 2013년 한국여성대회가 '여성, 빈곤과 폭력 없는 세상으로'라는 기치를 내걸며 개최된다. 성평등은 아직도 요원하다. 우리나라의 성별 임금 격차는 38.9%로 OECD 1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는 전체 여성 노동자의 61.8%로 남성의 1.5배다. 성 격차지수는 108위로 OECD 최하위다(2012 세계경제포럼 참조). 성폭력 문제도 앞서 살핀 대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이번 한국여성대회는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자로, 국내 최초의 친족 성폭력 수기를 쓴 은수연 씨로 선정하였다. 

나는 딸아이를 데리고 이번 여성대회에 참여할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아무리 아픈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고, '견뎌내지 못할 아픔은 없고 끝이 없는 고통은 없다'고,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고 말하는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은수연'이란 존재를, 나의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희망의 이정표로 고이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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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란 어떤 걸까? 평화그림책 3
하마다 케이코 지음, 박종진 옮김 / 사계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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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딸아이와 읽는 평화, 평화그림책

「평화란 어떤 걸까?」(하마다 게이코 글·그림|박종진 옮김|사계절, 2011)




한참 세상을 알아가는 호기심 많은 일곱살 예지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물어봅니다. 유치원에도 가지 않고 거리엔 태극기가 걸려있고 텔레비전에선 대통령님이 참석하는 기념식을 중계하는 오늘은 3·1절입니다. 


"일본이란 나라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았고 힘으로 다스렸어. 그래서 어느날 참다못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지. 그날이 3.1절이야..." 


그러나 예지는 아직도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일본이 왜 그랬는지도 궁금하지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았는 건 우리 안에서도 흔한 일이 되었으니까요. 그저 일본은 나쁜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인데 다만 힘이 없었을 뿐이라고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나쁜 일본에 맞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지만, 이 대한민국 안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은 무얼 외쳐야 하는지 설명하기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꺼냈습니다. 일본 작가 하마다 게이코의 그림책 <평화란 어떤 걸까?>입니다. 


3·1절, 다시 평화를 생각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한 역사적 맥락과 지정학적 이유가 있겠지요. 우리나라가 그리 힘없이 나라를 빼았긴 것도, 단지 나쁜 나라 일본을 만나서는 아니겠지요.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우리나라가 일본처럼 힘있는 나라였을 때 대륙을 지배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륙에 있던 나라의 후예들은, 한반도의 저 나라에게 나라를 빼았겼다고 회상할 테죠. 우리는 비록 한때지만, 그때를 자랑스런 역사로 간직할 테죠. 

이 평화그림책은 '우리 어린이들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국·중국· 일본 세 나라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함께 기획한' 것입니다. 그 시리즈 중 세 번째로, 이 책은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평화란 무엇인지를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다소 무시무시합니다. 검정색 비행기가 검푸른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하늘 아래 공을 가지고 뛰도는 아이들, 엄마의 손을 잡고 거니는 아이들, 할머니와 손자,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폭탄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고 한 아이가 타던 자전거가 뒹굴고 있습니다. 작가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않는 것" 그리고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평화라고 말합니다. 



무시무시한 그림이 지나면,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고 "왜냐면,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있는 권리, 그 최고의 행복을 지키는 것. 평화는 그런 겁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역사적 명분은 늘 그러하듯 권위적 언어로 기술되지만, 정작 그 명분은 우리의 평화를 빼았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누군가를 향한 폭력은, 피해자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평화도 앗아갑니다. 누군가를 짓밟고 누리는 평화는 결코 평화일 수 없으며,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행복은 더 이상 행복일 수 없습니다. 평화는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평화는 "배가 고프면 누구든 먹을 수 있고, 찬구들과 함께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평화는 이런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는 인정하고 차별은 넘어서는 것, 함께 살기 위하여 잘못했을 땐 사과할 줄 알아야 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에게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뜻하는 바를 힘껏 이루어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제주 4·3 항쟁, 그리고 제주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미군정 체제와 관리들의 행태에 불만을 품고 주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경찰은 시위하던 이들에게 발포하였고, 이를 계기로 시민들의 항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항거는 이듬해 4월 3일, 주민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집니다. 이른바 '제주 4·3 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민 25,000-30,000명, 군인 180명 내외, 경찰 140명의 전사자가 생겼습니다. 참혹한 비극이 제주도를 휩쓸었습니다. 

비극의 땅 제주도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지난한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정마을은 절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 투쟁은 계속됩니다. 강정에서 시작된 그 투쟁은, 기어코 제주도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들고자 하는 희망에 닿았습니다. 강주일 주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오늘, 제주도 관덕정에선 제2차 '제주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대회가 있었습니다. 관덕정은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의 항거가 시작된 곳입니다. 문정현 신부, 송강호 박사 등이 주도한 이 선언문에는 "관덕정에서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을 하는 이유는 선열들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며 "불의의 폭력에 맞선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고 정의가 수난 받는 개탄스런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들이 염원하는 평화는 아득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림책 이야기를 하지요. 작가는 "목숨은 한 사람에게 하나씩, 오직 하나뿐인 귀중한 목숨. 그러니까 절대 죽여서는 안 돼. 죽임을 당해도 안 돼. 무기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합니다. 무력으로 평화를 강제하는 해군기지는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평화는 공존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방법

평화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거하는 이곳에 자리잡은 공존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오늘, 3·1절을 맞아 나의 소중한 딸에게 이 책을 읽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이가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네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살아내길 희망합니다. 

어쩌면 이 그림책은 아이들이 아니라, 온갖 탐욕에 눈이 먼, 약자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는, 무력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도대체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른들이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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