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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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뜰한 선동가로 돌아온 유시민의 첫 번째 화두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지음/아포리아/2013)


이제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옳다고 믿는 방식 대로 하고 싶다고 한다. 정치란 '열정과 탐욕, 소망과 분노, 살수(殺手)와 암수(暗數)가 맞부딪치는 권력 투쟁'이며 정치인이란 그런 '정치가 내포한 비루함과 야수성을 인내하고 소화'하는 것이기에, 그는 정치인으로 보낸 지난 10년이 행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직업정치인으로는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때문일까? 유시민은 이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정치인으로 펴낸 지난 10년 간의 책들과 달리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도, 도덕적 딜레마에도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발언했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이 되기 전 '지식 소매상'으로 펴냈던 책들의 단단한 사유와 닮았으되, 훨씬 담백한 언어엔 숙련된 겸손마저 배어 있다. 정치인 유시민은 자유인으로의 복귀를 선언했으나, 이전 지식 소매상으로 활약하던 때의 유시민과는 또 달랐다. 그는 청춘을 다독이되 다그쳤고, '40대' 중년의 마음을 위로하되 충동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다만 옳은 방식으로,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연대하여 더불어 세상을 바꾸자고, 그는 이제 55세의 살뜰한 선동가였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열아홉 살의 유시민은 '도전하지도 않고 좌절한 현실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영문학을 전공하여 유학을 가서 나중에 철학자가 되길 바랐지만, 아들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유학은 애초 꿈꿀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 없이도 빨리 출세할 수 있는 법학과가 포함된 사회계열을 선택했다. 이루고 싶은 삶의 목표가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할 뿐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유시민을 맞이한 것은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과 뒤이은 전두환 정권이었다. 시대의 야만이 도전했고 그는 맞섰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능동적으로 세상과 부딪치지 못했다. 번민하면서 주저하는 내게, 세상이 먼저 부딪쳐 왔다. 세상은 나더러 체념하거나 굴복하라고 했고, 나는 거절하고 저항했을 뿐이다. 부당한 강요에 굴복하면 삶이 너무 비천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과 품격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다. 성년이 된 이후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한 감정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었다. 수치심과 분노, 슬픔, 연민, 죄책감,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본문 34쪽)

독방에서 미농지 넉 장에 먹지를 대고 써내려간, 그 유명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1985)엔 그러한 분노와 슬픔의 정서가 추동한 명문(明文)과 미문(美文)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시민의 모습도 그즈음에 있다. 결기 어린 문장들, 분노하는 지식인, 그리고 정치인 유시민. 

하지만 오늘 유시민은, 그런 과거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가치 없는 삶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원했던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과 깊은 사유를 통해 확신에 이르지 못한 가운데' 어떤 이념이나 명분을 받아들였고, 무엇보다 직업정치인으로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장 무거웠던 것은 직업정치인이라는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현실정치의 맥락에 포획당한 사람이었다. 나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른 것으로 규정당하고 해석되는 한 떳떳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회적 연대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계속 이렇게 산다면 온전하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본문 64쪽)

청춘을 위한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은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며 유독 안타까워 한다.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뉘우침이다. 그래서 이 책의 1장은, 청춘을 향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너의 원하는 삶을 고민하고 살아내라고 거듭 강조한다. 카뮈는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죽지 않고 사는 이유를 찾아 답해야 한다. 카뮈는 '세상과 삶 그 자체가 부조리라고' 말했다. 자살은 이 부조리를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가려면 이 부조리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있는 힘을 다해' 살아야 한다. 

삶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상처를 견딜 수 있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찾지 못한 이들은 작은 불운에도 쓰러지고 만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나 아프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처도 견딜 수 있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타인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

위로는 좋은 일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아픔을 덜어준다. 아프고 지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요즘은 책도 신문 방송도 모두 '힐링'이 대세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가 위로와 치유의 효과를 내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본문 51쪽)

40대 중년을 위한 질문,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올해로 마흔이 되었다. 작년 11월, 나의 삽십 대와 함께했던 직장을 떠났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하는 일들 사이에서 분투하던 나의 청춘은 그렇게 늙어갔다. 건강이 갑자기 안좋아졌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해마다 조금씩 가난해져 가는 비루한 현실은 욕망을 차츰 잃어갔다. 그리고 떠나기로 했고, 떠났다. 마흔을 맞던 나는, 그제서야 나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유시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에 가슴은 더욱 세차게 반응하였다. 그것은 생의 또다른 절박함이다. 

이 책의 2장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도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1980년 5월, 휴교령이 내리면 모든 도시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자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오직 광주의 학생회만 그 약속을 지켰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거리에 나섰으나 서울 시민들은 크게 반기지 않았고 시위하던 학생들은 망연자실했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 안양교도소에서 나온 지 보름 뒤에 군에 입대했다. 보초를 서던 어느 겨울날 영문도 모른채 지하 감방으로 끌려가 맞고 밟혔다. 동상이 번져 진물이 흘렀고 몸에는 옴이 잔뜩 올랐다. 그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수치심과 절망감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이는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본문 83쪽)  

죽음에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의적 선택이어야 한다고, 유시민은 주장한다. 스스로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죽음도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생명도 존엄한 것이므로 죽음도 존엄한 것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각자의 존엄한 권리라고 주장한다(다소 민감한 문제인 안락사 문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분명하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같은 것이다.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그 어떤 인생보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할 것이다. 질문이 같으므로, 답변도 다르지 않다. 유시민은 이 책의 3장을 통해,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로 답변하되, 4장 "삶을 마치는 헛된 생각들"을 통해 가치있는 삶을 망치는 못된 생각들을 맹렬히 비판한다. 

임상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을 '사랑, 일, 놀이'라고 하였고 유시민은 여기에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덧붙인다. 연대란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며,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유시민은 진보의 생물학을 주장한다. 진화론적 생물학은 인간이 설계된 대로 성장하고 자라도록 한다.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가족과 친족들이 서로를 돌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진보는 '혈연 집단에 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행동'과 정반대의 가치와 실천을 도모한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부자연스런 길을 선택한 진보주의는, 늘 역사의 소수로 존재한다. 대체로 소수이며, 현실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승리해도 그 승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정신은 역사적으로 계속 진화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주의는 패배했지만, 결코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2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의 정책 공약은 5년 전 낙선했던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의 공약도바 더 진보적이었다. 진보 세력은 선거에 졌을 뿐 역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옳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니 문재인 대통령을 보고 싶었던 시민들이 '멘붕'에는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본문 259쪽)


자유인 유시민의 선동

낙심하지 않은 진보는, 패배를 추스려 다시 연대한다. 연대하기 위해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는 것은 나의 유전자가 아니다. 나의 각성된 가슴이 분노하는 것이다. 각성된 마음들이 모여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더불어 전진해야 한다. 누군가는 목숨을 버려 진보를 지켜내고, 누군가는 촛불을 들거나, 누군가는 SNS로 그 가치를 실어 나른다. 누군가는 직업 정치인으로 나서고, 누군가는 평범한 시민으로 그 정치인의 후원자가 된다. 모두가 소중한 일이다. 

유시민은 이제 직업정치인이라는 불편한 옷을 벗고 자신이 가장 즐거워하며 할 수 있는 일, 즉 글을 쓰며 설렘으로 충만한 일상을, 품위 있는 노년의 삶을 꿈꾼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연대하여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기를 바란다. 결국 '나다운' 길을 찾아 놀고 일하고 사랑하되, '공동선'을 위해 뜨겁게 연대하는 삶. 유시민은 이제 자유인이 되어 그것을 힘껏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말_


1. 이 책의 출간 직후, 숱한 언론은 내용 중 안철수 관련 부분만 발췌하여 마치 유시민이 안철수를 '디스'한 것처럼 보도했고, 주로 기독교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일부 서평과 SNS에선 유시민이 칼뱅을 비판한 부분이 부각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반응이야말로, 유시민이 정치인으로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정황, 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보기에 유시민은, (문재인과 더불어)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진정으로 성공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고, 칼뱅에 대한 유시민의 비판도 별로 흠 잡을 것 없어 보였다(오히려 그 용기가 부러웠다). 더욱이 이 부분들은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2. 난 노무현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도 좋아하지만,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너무 곧고 옳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오류는, 그들 스스로 고백한 것으로 갈음하자. 난 안철수가 미심쩍다. 솔직히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박은주 김영사 대표의 말대로, 그의 담론은 늘 원론에 머물렀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안철수식 모델을 보편화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진보의 가치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안철수가 정치인으로는 성공하길 바란다. 안철수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정치인 유시민의 실패와 좌절, 자유인 유시민이 생각하는 진보의 가치는, 정치인 안철수에게도 좋은 통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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