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2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염무웅.반성완 옮김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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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역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알아보고 싶어서 선택했다.
너무 좋은 강의를 들은 기분이다.

예술의 양식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각은 다른 정치적 성향을 지닌다.

1. 기하학적 장식 예술 : 전제주의, 보수주의(농업 사회와 관련)
2. 자연주의적(모방적 표현양식) 예술 : 자유주의, 진보주의

저자는 자연주의적인 예술이 먼저 발생했다고 말한다. 선사시대-구석기시대의 미술을 보면 대상(주로 동물)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했다. 이렇게 생생한 자연주의적 표현은 이 시기 예술의 목적이 주로 주술(마술)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대상과 정확하게 일치해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 혈거인들은 벽에 사냥감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것을 이미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었던 것이다. 이런 마술적인 목적에 의해 예술이 탄생했기에 자연스레 대상과 똑같이 그리는 자연주의적 양식을 띠게 된 것이다.

선사시대-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예술 양식은 자연주의에서 기하학적 장식 예술로 변하게 된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농업혁명“이다. 농업을 함으로써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그로 인해 사유재산과 지배-피지배 계층 및 종교가 생겨났다. 계층과 종교가 생긴 전제적인 사회에서 예술은 보통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에 비해, 신석기 시대의 기하학주의는 표현이 강렬하며 자연적인 형상을 고의로 왜곡한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크고 정확하게 그리고, 생략할 부분은 단순화시키는 예술방식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지배계층의 논리를 설파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예술은 이후의 사회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집트 벽화에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그것이다. 인물이 모두 측면을 향해 있고, 몸통은 정면을 향해 있는 몰개성한 그림들.

이집트인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적인 대상과 똑같이 그리는 것(자연주의)은 눈속임과 같은 저급한 행위이고, 엄격한 형식에 맞춰 대상을 추상화시키는 것(기하학주의)이 더 고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인물화에서 모든 인물의 가슴은 정면을 향해 있다. 어떤 자세를 취하더라도 몸만은 정면을 향해 있는 이 원리를 “정면성의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 원리는 이후로 중세까지 기나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 그림 내에서도 계층에 따라 화풍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에서 상류층은 정면성의 원리를 따른 기하학적 양식으로, 하인들은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엄격한 구분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운문으로, 하인들은 평범한 산문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고상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제주의 사회에서 기하학적 예술 양식이 유행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스 시대>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스 시기의 예술 양식을 “아케이즘”이라고 하는데, 아케이즘 이전의 예술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실용 예술이었다.

이전에는 마술/종교의 수단, 지배 계층의 선전 도구에 불과하던 예술이, 순수한 의미의 예술이 된 것은 기원전 7~6세기의 일이다. 참고로 이때의 그리스(이오니아)에서는 예술뿐만 아니라 순수한 학문(철학, 자연과학), 순수한 스포츠(고대 올림픽) 등 훌륭한 문화가 꽃피는데, 이는 그리스가 해양 상업 국가였기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 무역이 발달했기에 이곳저곳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2. 화폐를 자주 사용했기에 추상적인 사고에 능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기에 이르러 예술은 다시 다소 자연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그리스 시기에는 정면성의 원리가 약해진 이유는 당시 유행했던 철학 사조인 “소피스트”와 관련이 있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계몽의 선구자로서, 교육으로 인간을 계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선천적 혈통보다는 후천적 교육을,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주장했으며 이는 시점이 고정된 정면성의 원리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묘사하면 어느 시점에서든 감상할 수 있고, 개개의 시점은 어느 것이든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그때그때의 시각이 바뀜에 따라 대상 자체도 변한다는 소피스트들의 이론과 맞아떨어지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그리스 시대의 예술은 기하학적 양식(정면성의 원리)의 속박을 벗어던지게 된 것이다.

다만 이 시기 예술이 완전히 자연주의적인 것은 아니고, 기하학적 양식과 조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스 시기의 미술의 특징은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미와 선의 융합)”이다. 겉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우리는 아름답다(미)라고 한다. 도덕적으로 보기 좋은 것을 우리는 착하다(선)고 한다. 그리스 시기의 예술은 자연주의와 양식화(기하학주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내는데, “슬픔에 잠긴 아테나”나 “제신의 향연“을 보면 그 조화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겐 석굴암으로 유명한 간다라 미술, 즉 헬레니즘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4세기)이 동쪽으로 영토를 넓힌 결과 인도 북부 근처까지 그리스의 영향력이 닿게 되었다. 원래 인도에서는 불탑으로 부처를 기렸으나, 이 시기 불교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이 조각상을 만들며 점차 불상이 퍼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간다라이며,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는 최초의 국제적인 혼종문화였다.

<로마 시대>
”조각이 그리스 고전 미술을 대표하는 것처럼, 로마 시대 후기와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두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 후기 로마/기독교 미술의 특징이다. 이는 서사시적, 설명적인 예술의욕이며 가히 영화적이라고까지 말할 만하다. 대표적인 것이 “트리야누스의 기둥”인데, 이 기둥에 돋을새김 된 장면들은 마치 필름을 슬라이드로 넘기는 것처럼 연속적인 특징을 갖는다.

<중세>
중세는 흔히 한 시대로 알기 쉬우나, 사실은 세 시대로 구분된다.

1. 봉건제
2. 궁정 기사 시대
3. 도시 시민 계급 시대

각 시대는 쉽게 구분될 정도로 차이점이 뚜렷하지만, 세 시대의 공통점은 바로 “형이상학(종교적) 세계관”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즉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다. 따라서 중세 예술을 알려면 먼저 기독교 예술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1. 상징주의
2. 서사시적/설명적 양식 -> 메시지 전달 중시

개인적으로 중세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이 생긴 그림이 끝도 없이 나와서 재미가 없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위와 같은 특징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회화는 보통 상징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문맹이 많던 시기라 성서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자연히 정면성의 법칙(기하학적 양식화)가 부활하고,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디테일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중요한 인물이 있으면, 설령 기둥에 가려진 부분이 있더라도 인물을 기둥 앞으로 그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종교적인 믿음을 떠나) 순전히 예술적인 눈으로는 조야하게 보인다.

초기 기독교 회화는 장인이 아닌 수도사들이 직접 그렸는데, 그래서 실제로 표현력 부분에서도 조야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기독교 예술관에서 예술은 오로지 교리의 주입 수단이었기에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감각보다는 정신이 우위가 되는 시기가 바로 중세였다.

다음으로는 중세의 세 시기를 시대별로 알아보자.

1. 봉건제(9~11세기)
중세 초기인 봉건제는 지방 봉건 영주가 왕만큼, 혹은 왕보다 더 세력이 강해진 시기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간단하다. 오랜 (종교)전쟁으로 인해 왕은 전쟁 자금이 필요하게 되는데, 중앙의 자금이 부족하니 지방의 귀족들에게 땅을 하나둘 떼어주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린 것이다.

봉건제의 가장 큰 특징은 “화폐도 교역도 없는 자급자족 체제”라는 것이다. 시장이 없고, 따라서 자급에 필요한 한도를 넘어 생산할 필요가 없기에, 경제가 발전할 힘이 부족했다. 도시(수도)는 사라지고 지방이 사람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동의 자유도 없었다. 개인은 없고 공동체 위주의 종교적인 생활을 했다. 기독교적 가치를 소유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기에, 이를 변형하는 건 전부 교만으로 치부했다.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하는데, 봉건제는 정말로 하나의 빛만 있는 시기였다.

요컨대 지금의 자본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시기가 바로 봉건제 시기다.

이 시기의 예술 양식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있다. 엄격한 형식화(양식화)와 추상화로써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 수도원은 마치 성처럼 위풍당당했지만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갈수록 더욱 금욕적이고 소박하게 변한다.

2. 궁정 기사 시대(12세기)
중세 중기에는 기사라는 계급이 등장한다. 나중에는 세습신분이 되지만 원래 기사는 직업군인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봉건 영주들의 시종이었다. 봉건 영주들 또한 그들의 조상대에서는 군인이었으나 세습 귀족이 되면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기에, 그들을 대신해서 싸울 사람들을 만든 것이다. 그게 바로 기사였다.

기사들은 공훈을 쌓은 뒤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세습 계급이 된다. 그들의 고용주인 봉건 영주들과 정확히 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

하지만 초기의 기사들은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출신성분이었기에, 귀족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열등감이 심했다. 그래서 그들은 혈통적이고 외면적인 귀족이 아닌, 내면적인 귀족임을 자처하고 정신을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기사도이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아는 젠틀함은 사실 기사들의 열등감에서 시작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움”에 집착하는 것은 뉴비들의 특징인가 보다.

기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문학의 소재로 “연애”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기사 문학에 나타나는 연애관은 <돈키호테>에 잘 드러나 있다. 귀부인에게 자신의 공훈을 돌리고, 영주에게 바치는 충성처럼 귀부인에게 사랑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문학의 소재로서 ”연애”는 이전에는 전혀 없던 것이다. 중세 초기는 성자 이야기뿐이었고,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여자는 그저 전리품으로서 얻어지는 것 정도의 지위였다. 따라서 근대 낭만적 연애관의 근간은 기사 문학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예술 양식은 “고딕” 양식이다. 고딕은 수직적인 선을 건축에 도입함으로써, 웅장한 성당을 만들어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이 시기에는 범신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한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는 자연주의의 정신이 엿보인다. 따라서 고딕은 자연주의와 자유주의로의 회귀가 시작된다. 그러나 중세는 중세였기에 완전한 자연주의는 아니었다.


3. 도시 시민 계급 시대
봉건제 이후 중세의 중심은 지방이었으나 이제 도시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유명한 말처럼, 도시에는 자유가 있었다. 도시에는 화폐와 상거래가 통용되었으며, 상업을 통해 큰돈을 번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한다. 이들이 바로 도시 시민 계급(부르주아)다.

중세 후기는 바로 이 시민 계급이 예술의 주 수요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귀족과 농민의 중간 계급인 시민이 등장함으로써 문화(예술)의 새로운 수요층이 되었다. 이해타산에 밝고 합리주의적인 시민 계급은 이상주의적인 기사의 자리를 대체했다.

자연히 기사는 몰락했다. 기사 계급의 몰락은 점진적인 것이었으나 꾸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상주의적인 이야기는 시민 계급의 심금을 울려 후에 수많은 기사 소설로 승화된다.

중세 후기에는 예술가가 일하는 장소가 건축 현장과 분리된다. 이전에는 모든 예술은 건축 현장에서 만들어졌다. 조각도 벽화(회화)도 모두 건축물을 장식하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벽화는 패널화로, 조각은 작고 아담한 형태로 바뀌면서 예술은 비로소 건축과 분리된다. 예술가의 외따른 일터가 생긴 것이다. 아틀리에의 탄생이다.

도시화폐적인 생활조건은 자연주의로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속세적인 소재가 쓰이고, 디테일과 원근법을 시도하는 회화가 등장한다.

벽화는 패널화에서 판화로 변화해 민중들에게까지 예술이 닿게 된다.

오랜 터널의 끝자락에서 시대는 바뀔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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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5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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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이런 걸로 읽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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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세계에서는 갈등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게 느껴진다.

다시 말해 이야기 속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로 조금 거리를 두고 받아들이게 된다.

실생활에서는 피하려고 애쓰지만, 픽션에서는 넘칠수록 더 원하게 되는 게 갈등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이런 아이러니가 꽤 일리가 있다. 책은 인간의 ‘투쟁-도피fightorflight’ 본능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 책 속에서는 갈등을 경험한다 해도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갈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갈등을 겪기보다는 최대한 피해서 계획에 따라 그냥 끝까지 내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라면 문제가 다르다. 독자 입장에 서면 우리는 책을 움켜쥐고 온갖 곤경과 중상모략을 만끽하며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기왕에 비가 올 거라면 억수같이 쏟아져라!’ ‘끔찍하고 불가능한 선택지들을 내 앞에 데려와봐!’ ‘송곳니를 날카롭게 간 괴물을 데려와서 마구 풀어놓아도 좋아!

현실의 삶과 소설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지점에서 수렴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든 소설에서든 성취에는 극도의 희열이 동반된다. 현실 속의 우리나, 소설 속의 캐릭터나 가장 필요로 했던 어떤 것을 기어코 얻어내 의기양양해지는 순간은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다.

요컨대 갈등이 있는 곳에 승리도 있다는 뜻

따라서 현실을 사는 우리는 역경을 좋아하지 않고 대개 피하려 노력하지만, 사실 그것을 극복하는 행위는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독자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에 감응한다. 갖은 갈등과 고난을 맞이한 캐릭터가 투쟁해나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감정적인 울림을 던진다. 현실에서 겪는 삶의 문제를 돌아보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갈등은 캐릭터를 한계까지 밀어붙여 가장 절실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그의 진면목(윤리와 가치와 신념)을 드러낸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보았던 캐릭터의 모습과 이야기의 끝에 나타나는 캐릭터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갈등은 변화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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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안나 카레니나 1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6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더클래식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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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근본부터 잘못된 느낌입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은 열린, 문동, 민음 아무거나 좋으니 제발 이 책으로는 읽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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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여 페이백] 재난에 맞서는 과학
박진영 / 민음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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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말 정치적인 격변 상황에 연대체는 새로운 가능성의 틈을 열었다. 2016년 6월 20일 결성된 ‘가습기살균제 참사 전국네트워크(가습기넷)’는 11월 5일부터 진행된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시위에 참여해 피해자 중심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다.
87)
촛불시위 정국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적극적이었다.

누구나 환경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현실에는 재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

정치 참여의 효용은 내 삶이 당장 바뀌지 않는 한 감지하기 어렵다.

연구 조작으로부터 5년 뒤 검찰이 확인한 바는 이렇다. 옥시는 서울대 연구진에 2억 5000여 만 원, 호서대 연구진에 1억여 만 원 규모의 연구를 발주했다. 두 연구 보고서는 옥시의 살균제로 흡입독성시험을 반복했을 때 대조군과 노출군에서 사망한 동물이 없었고 임상적으로 특이한 증상 또한 없었다고 했다. 물론 거짓이었다. 연구진은 데이터를 고의로 조작하거나 누락해 살균제의 독성을 축소하며 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결과를 왜곡했다.

기업과 결탁해 과학적 불확실성을 만드는 과학자는 대중과 시민사회의 공분을 산다. 사람들은 언제나 안전한 제품, 건강에 해가 되지 않을 제품을 쓰길 원한다.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이라면 마땅히 안전할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믿고 소비 생활을 한다. 생각보다 많은 기업이 과학을 무기로 제품의 안전성을 흐리며 판매 활동을 이어 갔다는 사실은 충분히 지탄받을 만하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된 전문가를 분석한다는 나의 말에 현장의 사람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옥시 청부과학자들을 떠올린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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