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세계에서는 갈등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게 느껴진다.

다시 말해 이야기 속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로 조금 거리를 두고 받아들이게 된다.

실생활에서는 피하려고 애쓰지만, 픽션에서는 넘칠수록 더 원하게 되는 게 갈등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이런 아이러니가 꽤 일리가 있다. 책은 인간의 ‘투쟁-도피fightorflight’ 본능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 책 속에서는 갈등을 경험한다 해도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갈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갈등을 겪기보다는 최대한 피해서 계획에 따라 그냥 끝까지 내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라면 문제가 다르다. 독자 입장에 서면 우리는 책을 움켜쥐고 온갖 곤경과 중상모략을 만끽하며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기왕에 비가 올 거라면 억수같이 쏟아져라!’ ‘끔찍하고 불가능한 선택지들을 내 앞에 데려와봐!’ ‘송곳니를 날카롭게 간 괴물을 데려와서 마구 풀어놓아도 좋아!

현실의 삶과 소설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지점에서 수렴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든 소설에서든 성취에는 극도의 희열이 동반된다. 현실 속의 우리나, 소설 속의 캐릭터나 가장 필요로 했던 어떤 것을 기어코 얻어내 의기양양해지는 순간은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다.

요컨대 갈등이 있는 곳에 승리도 있다는 뜻

따라서 현실을 사는 우리는 역경을 좋아하지 않고 대개 피하려 노력하지만, 사실 그것을 극복하는 행위는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독자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에 감응한다. 갖은 갈등과 고난을 맞이한 캐릭터가 투쟁해나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감정적인 울림을 던진다. 현실에서 겪는 삶의 문제를 돌아보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갈등은 캐릭터를 한계까지 밀어붙여 가장 절실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그의 진면목(윤리와 가치와 신념)을 드러낸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보았던 캐릭터의 모습과 이야기의 끝에 나타나는 캐릭터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갈등은 변화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