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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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유방을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호방함도 대단하지만 그런 말을 이성계가 용납했을 정도면 당시 정도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도전이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가 건국될 때처럼 분열되어 있던 나라들을 통일한 게 아니라 쿠데타로 이룬 새 나라였다. 그러므로 정통성의 문제는 오로지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친명파이자 사대주의자인 정도전이, 비록 계획으로만 그쳤지만 랴오둥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이 신생국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과연 나중에 이 책은 세조 때 본격적인 국가 운영 지침서인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다.

《조선경국전》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 서론에서 강조되는 ‘인

’의 정치다. 공자는 주나라 시대에 생겨난 조상숭배와 사직을 뜻하는예

의 개념에 국가와 사회 조직의 원리인 인을 더해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창시했다(맹자도 역시 인에 의한 왕도
王道정치를 주장한 바 있다).
정도전이 국가 경영(경국)의 원리로 인을 내세운 것은 곧 유교 정치 이념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유교 국가의 왕은 사직에 충실하면 될 뿐 실무를 담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 경영의 실무는 과거제로 뽑은 관료들이 담당한다. 그래서 정도전은 관료들의 수장인 재상이 통치의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테면 국왕은 상징적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존재이고, 실제 정치와 행정은 재상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천자를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들이 천자를 보좌하는 전형적인 유교 정치의 밑그림이며, 주자학(성리학)을 정립한 주희
朱熹(1130~1200)의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제시한 조선 건국의 이념은 명확해진다. 그는 옛 주나라의 예법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조선을 유교 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인 동기로, 정도전은 이성계가 국왕이지만 조선의 기획자인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을 상징 권력으로 치부하고 관료가 실무를 담당하는 체제가 가장 바람직스럽다.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

‘심기리(心氣理)’의 심은 불교, 기는 도교, 리는 유교를 뜻한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경을 이용해 도교를 비판하고 노장사상을 이용해 불교를 비판하면서 결국 리를 본질로 하는 유교만이 최선의 이념이라고 찬양한다. 또한 《불씨잡변》에서는 논의의 차원을 더욱 끌어올려 철학적으로 불교의 윤회설을 공박하면서 불교를 숭상한 고려가 어떻게 멸망의 길로 치달았는지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 개념을 혼동하지 말라고 주장한 점이다.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도전에 따르면 자비는 무차별한 박애주의이므로 오히려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개념이다. 그 근거는 분명하다. 불교의 자비는 도덕적 개념이지만 유학의 인은 원래 정치와 국가 운영을 가리키는 개념이니까.

건국자가 죽고 난 다음에 왕위 계승전이 벌어진 고려와는 달리 조선의 개국 초기 증후군은 이성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절에 터져 나왔다.

무릇 새 왕조는 이른바 ‘개국 초기 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게 마련이다. 건국자의 특권과 권위는 보장되지만 건국자가 물러난 뒤에는 그 특권과 권위가 특정한 개인에게 순탄하게 상속되기 어렵다는 증상, 요컨대 후계 문제가 바로 그것

왕위 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나, 아니었나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에서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지금의 아내 강씨(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번
李芳蕃(1381~1398)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마음먹었다. 강씨는 고려 말 권문세족인 강윤성의 딸인데, 이성계는 처가의 도움에 보답할 겸 명문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고자 방번을 낙점했을 것이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 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
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군사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공신들은 막내를 계승자로 삼아 왕권을 더 제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일치했으므로1392년8월에 드디어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 불씨에 불을 댕긴 것은 어리고 힘없는 막내를 세자로 삼아 조선을 일찌감치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정도전이었다.

8월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권리를 누렸음에도 뭐가 부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거요?" 조선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왕자의 관점에서는 엄연한 ‘왕국’을 때 이르게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것이 악행이라면 악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꿈꾼 사대부 국가는 100여 년 뒤에 현실화된다.

왕위 계승은 왕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정몽주와 정도전을 살해한 방원을 추대했다. 그러나 아직 전면에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방원은 짐짓 서열을 운위하면서 둘째 이방과
李芳果(1357~1419)에게 양보했다

(이성계도 고려를 무너뜨릴 때 그랬듯이, 원래 쿠데타의 실세는 허수아비를 먼저 내세운 다음에 집권하는 절차를 밟는 법이다).

배다른 형들은 냉혹했다. 폐위된 어린 세자 이방석은 유배 조치를 받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되었고, 곧이어 그의 형인 이방번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한반도의 경우는 중국보다 시기적으로 한 왕조씩 뒤처진다. 즉 통일신라는 중국의 한 제국처럼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당 제국처럼 과거제를 도입했으면서도 귀족과 호족 들이 중앙 정치를 주물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의 송과 비교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실제로 건국 초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은 본격적인 사대부 왕국으로 탈바꿈해 송 대처럼 망국적인 당쟁에 시달리게 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맨 먼저 할 일은 두 번 다시 그런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
를 의정부
議政府
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제각기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 삼군부
三軍府
를 설치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의 노력은 비정하다 할 만큼 철저했다. 그의 쿠데타에 일등공신으로 기여한 처남 민무구
閔無咎
의4형제를 죽인 일이나 심복인 이숙번
李叔蕃
을 유배 보낸 것은 단순한 토사구팽의 차원을 넘어 명백한 숙청이었다. 그 덕분에 재위 몇 년 만에 그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할 만한 사대부나 관료 세력은 씨가 말라버렸다. 이제 사대부는 국왕의 충실한 관료가 되거나 순수한 사림
士林

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림이라는 말은 고려 말에 처음 사용되었는데, 조선 초까지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는 의미였다. 즉 관리로 임용되지 않았거나 그럴 의사가 없는 유학자인데, 지금으로 치면 순수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본격적인 사대부 국가가 되는 16세기부터 사림은 제도권 바깥에 있으면서(즉 신분상으로는 관리가 아니면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므로 왕조 교체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가 일정한 유형처럼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건국된 왕조는 새 토지제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까지는 대체로 잘나간다. 그러나 그 제도가 수명을 다하는 중기 무렵부터 제도의 모순이 노출되면서 경제가 붕괴한다.

전시과에는 현직 관리가 죽어도 봉급으로 받은 토지가 국가에 반납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결과로 고려는 중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지주들이 토지 겸병에 나서면서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과전법을 만든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는 그간의 오랜 관행으로 사실상 사유화된 토지를 다시 수조권만 재분배하는 것으로 바꾸려 했을 뿐이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는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
收租權
만을 허용하는 제도

따라서 과전법도 전시과의 결함을 그대로 노출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시과나 과전법에서 모두 세습을 인정한 토지는 공신전(功臣田)이다. 호족들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 왕건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성계 역시 적지 않은 개국공신들(그의 아들들도 포함된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그래서 공신전은 수조권과 무관하게 사전으로 취급되어 세습될 수 있었다. 이런 예외 조항이 있는 한 아무리 엄격한 토지제도라도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태종은 원래 면세의 특혜까지 누렸던 공신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했지만 공신전의 세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재정의 목표는 국가가 재산을 그러모으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거두어들인 재정 수입에 맞게 재정 지출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사회 간접 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이므로 국가의 재정 지출 가운데 으뜸은 단연 관리들의 봉급이었다

태종의 최대 업적은 바로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것이다.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자신의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것

양녕은 왕위에 관심이 없어 아버지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청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땠든 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무백관’이 세자의 교체까지 건의하고 그 뜻을 관철시킬 만큼 발언권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적 역량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여건 또한 최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즉위하던 때와 달리 왕위 계승과 관련된 잡음이 전혀 없는 상태로 출발했다는 게 최대의 강점이었다(여기에는 아버지와 형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개국공신이 없다는 것도 좋은 환경이었다. 정도전을 위시해 조준, 권근 등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따라서 발언권이 큰)공신들은 제거되거나 죽었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즉위 초에 권력 안정으로 부심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본연의 업무인 통치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 해도 모든 일을 혼자 도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현전
集賢殿
을 활성화시킨 것은 그 때문이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에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뜻으로 휴가를 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그런 실용서까지도 유학자들이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서 말하는 유학이란 특정한 ‘학문 분과’가 아니었다. 유학은 학문의 특정한 과목이 아니라 학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서양에 비유하면 중세의 신학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농사법과 의학, 약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실용적 학문

동양의 전통에 따르면 원래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인쇄술이 개발되어도 ‘장서용’ 역사서나 찍어서 서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전통에 맞서 세종은, 비록 농서나 의약서 같은 실용서에 국한되었지만 서적을 민간에 널리 보급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혁신적인 군주였다.

이 점에서 서양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세종의 시대, 그러니까 15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지 50년도 못 되어 유럽 전역에 출판사, ­인쇄소가 생기고 서적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일반 민중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모토는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인쇄술과 함께 이른바 동양의 4대 발명품으로 불리는 종이, 나침반, 화약 등도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발명되는 데 그쳤으나 서양에서는 발명되거나 도입되자마자 순식간에 민간에 널리 퍼져 실생활에 이용되었다.

1446년9월에 세종은 훈민정음
訓民正音
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면서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쓰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어학적으로도 우리말은 교착어이고 중국어는 굴절어다(쉽게 구분하면, 교착어는 어근에 접두사나 접미사 같은 게 자유롭게 붙어서 이루어지는 말이며, 굴절어는 각 낱말의 의미가 고정되고 분리된 성격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문법에서도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글을 통해 완벽한 의사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였다.

흔히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 창제되었다고 알려졌는데, 한자의 ‘발음기호’도 창제 목적의 하나였을 것이다. 한자가 도입된 삼국시대 초기 이래 1000여 년이 지나면서 한자의 발음이 중국과 많이 달라진 것을 바로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자는 원래 그림에서 출발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추상화되어 기호가 되고 그 기호가 최종적으로 정리된 결과로서 탄생한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한자, 알파벳의 원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등이 모두 그렇다. 즉 문자는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지배 집단이 일정한 기간 동안 연구해 문자 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또 그 문자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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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종횡무진 한국사 1 - 단군에서 고려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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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태도가 많이 묻어나오지만 재미있게 잘 봤다.
“사람의 역사”가 아닌 “땅의 역사”를 지향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허영을 채우기 위해 역사를 이용해온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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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서희, 윤관, 김부식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해낸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 답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무관이 아닌 문관이다.

1198년 늦봄에 만적은 동료 노비들과 함께 개경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장 연설을 했다. "경계
庚癸(경인년과 계사년의 무신란, 즉1170년 정중부의 난과1173년 김보당의 난을 가리킨다)이래로 천한 노비가 고관대작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무신으로서 집권한 자는 경대승과 최충헌을 제외하면 모두 근본 없는 천민 출신이었으니,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무신정권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국가의 질서 자체를 뒤흔들었다. "저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하급 관리, 양민, 천민까지 하극상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지도는 1170년 무신정권이 성립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보여준다.

최충헌이 왕위 계승보다 더 중시한 것은 실질적 집권자의 계승이었다(당시 일본에서 천황의 계승보다 바쿠후 정권의 소유자인 쇼군의 계승이 더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교정도감은 무신 정권기 내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게 되며, 무신 집권자는 자동으로 교정별감이 되는 전통이 생겼다. 당대의 일본사에 비유하면 무신 집권자는 바쿠후의 쇼군에 해당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우리 현대사에 비유하면 교정도감은 박정희 정권 시대에 설치된 중앙정보부이고, 교정별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장에 해당한다.

교정도감의 첫째 기능은 정치인과 관리 들에 대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권력이 실린 기관은 기능도 확대되게 마련이다. 사찰 기구로 출발한 교정도감의 기능은 점차 넓어져 행정과 세무는 물론 전반적인 국정의 중대사까지 두루 총괄하게 되었다.

별초란 이름 그대로 ‘특별히[別] 뽑은[招]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고려 초기부터 있었는데(윤관이 편성한 별무반도 별초의 하나다), 마별초라면 말할 것도 없이 기병대를 가리킨다. 그전까지 고려의 군대 조직은 궁성 경비대와 변방의 진지에 주둔한 군대 이외에 별도로 상비군이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이를테면 반란이 일어난다든가) 모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최우는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편성한 셈이다

한족 제국이든 이민족 제국이든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못하는 왕조는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면 금은 북송을 무너뜨린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대륙 정복을 추진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요처럼 단명한 제국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금은 거란이 랴오둥에 안주한 탓에 크게 뻗지 못했다는 점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도, 막상 북송을 정복하고 중원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성공에 도취해버렸다.

칭기즈 칸은 한반도는커녕 중국 대륙에도 관심이 없었다. 남송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달한 서역(중앙아시아)과의 경제적 교류에 일찌감치 주목한 그는 금을 제압하는 선에서 동방 경략을 일단락 짓고 서역 원정에 나섰다. 유목 제국의 우두머리답게 그는 중화 세계에 만족하는 한족의 천자라면 품지도 못할 꿈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예부터 동서 무역의 중추였던 비단길을 장악해 경제 대국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의 호라산(지금의 이란)까지 정복하자 그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몽골 제국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고려 정벌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은 1234년 금의 명맥을 끊었고, 그 이듬해에는 역사적인 유럽 원정을 시작했다. 바투가 이끄는 20만 명의 유럽 원정군은 특유의 기동성으로 6년 만에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유린하고 서유럽의 관문인 폴란드와 독일의 동부 접경지대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만 오고타이가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철군하게 된다. 당시 정복의 초점은 당연히 유럽 전선에 있었으므로 몽골에 고려는 정복의 대상이라기보다 후방 다지기의 대상에 불과했다. 실제로 고려 정벌도 몽골 주력군이 아니라 본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할당받은 칭기즈 칸의 동생 오치긴이 주도한 것이었다. 고려가 30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일본의 바쿠후와 고려의 무신 정권은 둘 다 상징 권력(일본 천황과 고려 국왕)과 실제 권력(쇼군과 무신 집권자)이 나뉘는 일종의 ‘이중권력’ 체제였다. 그런데 일본의 쇼군은 고려의 무신 집권자와 달랐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철저히 그늘에만 머물면서 권력의 단물만 빼먹은 데 비해, 일본의 쇼군은 천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나중에 보겠지만 몽골 침략에 맞설 때도 쇼군이 직접 나섰고, 중국 황제가 일본 왕으로 책봉한 대상도 천황이 아닌 쇼군이었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국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짓도 서슴지 않았으나, 일본의 쇼군은 천황의 혈통을 대단히 중시한 것은 물론 정기적으로 교토를 방문해 천황에게 문안을 드렸고 국가의 상징으로서 예우했다. 깡패 집단으로 끝난 고려의 무신 정권에 비해 일본의 바쿠후 정권이 훨씬 오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몽골은 고려의 그런 비상식적인 처사가 눈에 거슬렸다. 천도 두 달 뒤인1232년9월에 살리타는 개경으로 환도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강화도 망명 정권은 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허망하게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렇게 해서1232년7월부터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중앙정부는 망명 정부로 전락했다.

아무리 고려의 사직과 왕권이 보잘것없다 해도 일국의 왕과 중신들이 국토와 백성들을 버리고 조그만 섬으로 가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장기적으로 대몽 항쟁을 위한 준비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은 억지 변명에 불과하다. 사실은 훨씬 간단하다.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감행한 극약 처방이다.
몽골이 고려를 정복하고 내정까지 좌지우지한다면 국왕까지는 인정한다 해도 그늘의 권력자까지 배려하지는 않을 게 뻔하다. 따라서 최우는 낙동강 오리알이 될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최우는 강화도 정부에서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니 개인적으로 천도의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토와 백성들은 그 천도 때문에 다시 한 번 큰 화를 입게 된다.

문화재의 측면에서 볼 때 이3차전으로 고려는 하나의 문화재를 새로 만들었고 다른 한 문화재를 잃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새로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했고(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최대의 사찰인 경주 황룡사가 불타 무너졌다.

1251년에 제위에 오른 몽케(재위1251~1259)는 다시 고종의 입조와 개경 환도를 요구했다. 그런데 최우를 계승한 아들 최항(崔沆, ?~1257)은 아버지의 쇠고집을 물려받은 데다 속임수가 능했다. 몽골에 사신을 보내 왕을 강화도에서 내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막판에 다른 왕족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에 몽케는 크게 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국가의 위기와 정권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최항은1253년에 몽골군이 침략해오자 또다시 속임수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강화도 맞은편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고종이 마치 뭍으로 나온 것처럼 꾸며 거기서 몽골 사신을 영접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그게 처음이기는 했으나 같은 속임수에 두 번 속을 바보는 없다. 결국 이듬해 여름부터 시작된 몽골의6차 침략은 사상 최대의 피해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해에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성은 무려20만6800여 명이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라고 되어 있다. 무신 집권자가 저지른 무지한 사기극의 대가는 고려 백성들이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장기 집권 가문이 사라진 이상 적어도 터무니없는 대몽 항쟁이 더 이상 지속될 이유는 없었다. 이듬해 고종이 몽골과의 타협으로 태자를 대신 입조시키면서28년에 걸친 무모한 항쟁은 마침내끝났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고려는 전란의 피해를 입기 전에 진작부터 몽골에 대해 확실한 사대 관계를 취했어야 한다.

1270년 원종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개경 환도를 단행했는데,40년 만의 환도를 기념한 것은 경축 행사가 아니라 반란이었다. 반란의 주역은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고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군대, 즉 별초군이다. 창립자이자 총지휘자인 무신 집권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군대는 깡패 조직으로 변했다. 그들이 새로 뽑은 우두머리 배중손
裵仲孫(?~1271)은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 남아 반란을 일으켰다.

흔히 삼별초는 몽골 침략에 최후까지 항전한 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망명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됨에 따라 실업자가 된 강화도 수비대가 ‘구조 조정’에 반대해서 파업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동병상련의 심정인 고려 백성들이 그들의 반정부 쿠데타를 지지해준 덕분에 그들의 허명이 후대에 과대 포장되었다.

삼별초의 난이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백성들 사이에 몽골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컸기 때문이지만 그 밖에도 이유가 더 있다. 당시 백성들은 몽골의 가혹한 징발에 시달렸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징발이었을까? 바로 쿠빌라이, 즉 원 세조
世祖(재위1260~1294)가 시도한 일본 정벌이다.

●두 차례의 태풍으로 국난을 넘긴 덕분에 당시 일본인들은 그 태풍을 신이 내린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1274년의 위기를 넘기자 호조 도키무네는 "신이 일본을 수호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을 처형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함께 세계 제국 몽골이 정복을 시도했다가 유일하게 실패한 곳으로 기록에 남았다.

삼별초의 난과 일본 원정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에야 비로소 모든 뒤풀이가 끝났다. 이제 원에 반대하는 고려 내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었고, 일본 정벌 전쟁에 용병으로 징발될 만큼 고려는 원의 완전한 속국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원에 가 있던 세자는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려로 귀국하더니 독특한 방식으로 슬픔을 달랬다. 아버지가 아끼는 애첩과 그 배후 세력을 모조리 잡아 죽인 것이다. 세자는 어머니가 마흔 살도 못 되어 죽은 탓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겠지만, 졸지에 아내와 애인을 모두 잃은 충렬왕은 이듬해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원에 있을 때부터 매 사냥에 탐닉했으므로 더욱 왕위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왕위가 보잘것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은 아버지 충렬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고려 역사상, 아니 한반도 역사상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정상적인 왕국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농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성장한 세도가들은 이내 정치 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권문세족이라고 불리는 신종 ‘족속’이다.

개국 초기에 호족, 다음에 외척, 그다음에 무신, 또 그다음에 권문세족이 차례로 내정을 좌지우지

신흥 유학인 주자학이 도입되자 충렬왕은 전통적인 국립대학이던 국자감을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주자학은 중화사상에 철학의 옷을 입혀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 전통적인 유학의 이념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천하의 중심은 중화 세계이며, 사방의 이적
夷狄(오랑캐)들이 중화 세계를 중심으로 받들고 사대하는 게 우주의 질서이자 조화다. 주희는 그 중심을 이

로, 주변을 기

로 지칭하면서 화이론을 이기론으로 교묘하게 대체했다. 지금은 기가 승한 시대, 즉 오랑캐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이것은 우주의 질서가 깨진 결과다. 따라서 결국 근본인 이로 돌아갈 것이다.

바야흐로 고려의 권력 구도는 수구 대 진보로 나뉘었다(친명 노선을 진보라고 부르기는 곤란하지만 당시로서는 진보에 속했다). 인물로 볼 때는 권문세족 대 신진 사대부의 대립이었고, 외교적으로는 친원 대 친명, 종교적으로는 불교 대 유교의 대립이었다.

최영이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이성계의 쿠데타가 민간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최영이 보기에는, ‘근본’도 없는 홍건적 두목이 세운 나라가 원을 몰아낸 것만 해도 용납할 수 없는데, 고려에 압력까지 가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세운 대응책은 너무도 과감하고 대담했다. 놀랍게도 한반도 북부를 확실히 영토화하는 것을 넘어 내친김에 랴오둥까지 정벌하자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원정이 무리라는 것을 최영이 과연 진짜로 몰랐을까? 당시 최영과 이성계 모두 홍건적과 왜구의 토벌로 이름이 높았으나, 떠오르는 해는 최영보다 스무 살이나 젊은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이미 1383년부터 정도전과 교류하고 있었으므로 최영은 이성계를 제거하지 않으면 신진 사대부 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길지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리한 랴오둥 정벌은 좋은 기회가 된다. 이성계와 정도전도 역시 그 점을 알았기에 원정을 반대했을 것이다.

무신 정권과 권문세족의 오랜 지배가 끝난 뒤에 전국의 토지는 거의 다 임자가 정해져 있었다. 토지가 부족해 새 관리는커녕 기존의 관리에게조차 봉급을 줄 게 없었다.

기존의 모든 토지 소유관계를 무효화하고 밑그림부터 새로 그려야만 토지제도와 국가 재정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었다. 새 나라가 서야만 한다는 생각은 여기서 무르익었다.

묘청은 새 나라를 세운 것이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려왕조로 볼 때는 명백한 반란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이 사건이 묘청의 난이라고 기록되었다. 사실 묘청은 거사 소식을 당당하게 고려 조정에 전했으며,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칭제까지 했으면서도 직접 황제나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별도로 왕을 옹립하지도 않았다. 인종의 마음이 돌아설 여지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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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역사에서는 통일이 기본이고 가끔 분열기가 끼여 있었던 반면, 로마 제국 이후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던 유럽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기본이고 이따금 국지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이 점이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석굴암에서 굽어보는 바로 앞바다는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왜구가 경주를 침략하는 주요 노선인 탓으로 신라 왕실에서 불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절을 많이 지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정신적인 왜구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만약 성공했더라면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집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의 수준이다.

‘골(성골, 진골)’에 속하는 왕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원하는 직책을 가질 수 있었고, ‘품’에 속하는 귀족들, 그중에서도 최상층 세력인 육두품은 독서삼품과에 응시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유학을 가는 게 관직 임용에서나 학문적으로나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균전제란 쉽게 말해 토지[田]를 농민들에게 고르게[均]나누어주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인다는 제도다(일본의 반전제도 내용은 같다)

원래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토지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이전 왕조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새로이 분급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중기쯤 되면 토지가 부족해진다. 인구는 늘어나고 봉급을 주어야 할 관리도 늘어난다(관리의 봉급은 물론 토지다). 결국 그 부담은 농민들에게 지워지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떠난다. 당이 무너진 과정도 바로 그랬다.

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에서부터 45대 신무왕까지 여섯 명의 왕은 모두 원성왕의 증손이다. 비록 그중 세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는 했지만, 800년에서 839년까지 40년 동안 신라 왕위는 친형제 셋을 포함해서 형제들끼리 주고받은 셈이다. 만약 당의 제국 정부가 예전처럼 굳건했더라면 그렇듯이 신라의 왕위 계승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쿠데타로 집권한 신라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문책을 가했을 테니까. 그러나 당시 당의 황실은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으므로 변방의 사정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신라의 왕권마저 넘볼 수 있었던 이유는 당 제국이 더 이상 동북아시아 질서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선왕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당의 국력이 약해졌다는 배경의 덕분이다.

발해는 전성기 때조차도 랴오둥을 노리지 않았다. 그것은 발해의 운명을 위해 커다란 판단 실수였을 뿐 아니라 당말오대에 북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분위기에 역행하는 자세였다. 설령 힘이 모자란다 해도 당이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해는 어떻게든 랴오둥에 진출하려 노력했어야 한다. 만주를 근거지로 삼는 왕조로서 랴오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것은 일찍이 고구려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발해가 만주에 안주한 것은 곧 북방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를 대신해 세대교체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거란이었다. 몽골 초원의 동부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던 거란은 당의 약화를 틈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북조시대에 북조를 지배한 옛 선비족의 후예였다.

당 제국이289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을 때, 거란의 우두머리인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요

를 건국했다

‘애제’라면 ‘슬픈 황제’라는 뜻이니까 황제의 시호로는 영 이상하게 보이는데, 시호 자체가 죽은 뒤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서 비운에 죽었거나 한 왕조의 마지막이 된 황제는 대개 애제 또는 공제(恭帝)라고 부른다. 재위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살해당한 신라의 혜공왕, 애장왕, 민애왕 등의 시호에 ‘공’이나 ‘애’가 들어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불행히도 진성여왕은200년 전의 선배 여왕들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그때는 비록 왕실은 흔들려도 나라는 튼튼할뿐더러 무엇보다 진골 귀족들의 충실한 지원을 받았으니까.

궁예가 첫 도읍지로 정한 오늘날 철원의 위성사진이다. 이것으로 궁예는 반란군의 수괴에서 일약 일국의 왕으로 출세했는데, 이렇듯 중부 지방에서 쉽게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신라가 전국적인 왕조가 되지 못하고 경주 정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곧이어 견훤이 전주에서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중국 측 사서에 옛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경우가 많은 탓으로 고구려는 고려라고도 불렸다).

후백제나 후고구려라는 국호에서 ‘후(後)’라는 수식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백제와 고구려였다. 견훤과 궁예가 옛 왕조의 부활을 선언한 데는 중국 역사에서 모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특히 분열 시대에 탄생한 새 왕조들이 전통과 권위의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옛 왕조들(특히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의 국호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907년에 중국의 당 제국이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고된 사태였지만 그래도 중국은 신라 왕실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였다. 이제 그 기둥이 무너졌으니 신라의 사직도 얼마 남지 않을 게 뻔했다.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데다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 데 불과했기에 중화 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 세계의 만만한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다.

새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헌 왕조를 무너뜨리는 아픔을 겪어야 정상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고려는 새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고 모순에 찬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첫 번째는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 세력 간의 모순

그는 즉위한 뒤 곧바로 호족들에게 일일이 사신을 보내면서 저자세를 취했다.

935년 자신에게 투항해온 견훤을 상부
上父
라고 부르며 받든 것은 그런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다(견훤은 그보다 불과 열 살가량 위였으니 왕건의 저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 그의 정책을 중폐비사(重幣卑辭)라고 부른다. 말뜻은 비단[幣]을 주고 말[辭]을 낮춘다는 것인데, 실제로 왕건은 호족들에게 재물을 주고 후하게 대하면서도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겸손하게 행동했다. 고압적인 궁예와는 정반대였으니 호족들은 당연히 만족했다. 아버지 때부터 오랜 2인자로 처신한 데서 몸에 익은 태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자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왕건이 생각한 안전장치는 신라의 상수리제도를 모방한 기인
其人
제도였다. 지방 관리를 수도에 파견하게 하는 상수리제도에 비해 기인제도는 관리가 아니라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삼는 것이므로 더 강력했다.

혈연보다 더 강력한 안전판이 또 있을까? 호족들을 다 친척으로 만들면 된다. 즉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 가족이니 서로 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릴 수 있고 국왕은 호족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스물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그의 아들들은 알려진 것만 해도 무려 스물다섯 명이었다. 이 왕자들이 고려왕조의 첫 번째 진통을 부른다.

그 덕분에 왕건은 고려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를 거느린 국왕이 된다(조선시대의 왕들은 더 많은 처첩을 거느렸지만 그때는 후궁이 제도화되었으므로 비교하기 어렵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도 무려 스물아홉 명(왕후 여섯 명, 부인 스물세 명)인데, 거의 대부분이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결과였으니 그야말로 ‘육탄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943년에 왕건이 죽자 일단은 맏아들인무

가 혜종
惠宗(재위943~945)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가 오래 버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맏이라는 강점은 있으나 스물다섯 명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그 기준이란 바로 외가의 힘이다. 왕자들 모두 아버지는 왕건으로 같으므로 왕자들의 ‘실력’은 곧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왕건은 미약한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근친혼을 적극 장려한 바 있었다(근친혼이 금기시되는 것은 유학이 뿌리를 내리는 조선시대부터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권 안정을 위해 각지의 호족들과 통혼을 맺어 살아 있을 당시엔 효과를 보았으나, 사후에는 왕위 계승을 두고 분쟁을 넘어 내전까지 치르게 됐다. 훈요십조에는 권력 승계의 원칙이랄 게 없고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후대의 혼란을 왕건이 자초한 셈이 되었다.

문제는 사병 조직의 근간이 노비라는 점이었다.

호족들이 많은 노비를 거느리게 된 것은 주로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호족들이 멋대로 토지를 병합하면서 토지에 딸린 양민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았기 때문이다.

956년에 광종은 노비안검법
奴婢按檢法
을 시행했다. 노비들을 풀어주라는 조치였는데, 말하자면 노예해방인 셈이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인도주의적인 데 있지 않고 호족들의 무장 조직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게다가 노비안검법은 광종에게 짭짤한 부수입도 주었다. 노비에서 양민으로 신분 상승한 그들이 이제 호족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조세를 바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호족들은 경제적 기반이 약해졌고, 그만큼 중앙 재정은 튼실해졌다.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은 자기 마음대로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지방행정을 주무르는 데서 나왔다. 따라서 그것마저 뿌리 뽑지 않으면 호족들의 세상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광종이958년에 추진한2차 개혁은 바로 과거제였다.

과거제의 ‘형식’은(관리 임명권을 중앙에서 쥐게 되므로)호족 세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과거제의 ‘내용’은(유교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과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을 이룬다는 꿈은 이미 물 건너갔고, 결국 중앙정부는 호족들과 다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속현
屬縣(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행정구역)이다.

쉽게 말해 중앙정부가 파견한 지방관은 대호족의 ‘손님’처럼 형식적인 수령의 지위만 유지하고 사실상의 지방행정은 호족이 알아서 관장하는 식이다. 모두335개에 이르는 고려의 현 가운데 속현의 비율이 무려90퍼센트 이상

(이후 속현은 조금씩 줄었으나 완전히 소멸한 것은 중앙집권화가 확실히 이루어진 조선시대의 일이다).

중국의 송에 해당하는 한반도 왕조는 후대의 조선이다. 당에서 시행된 과거제가 송대에 꽃피웠다면, 고려에서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사회의 골간이 되었다. 송이 완벽한 유교 제국이었다면, 조선은 완벽한 유교 왕국이었다. 즉 송과 조선은 둘 다 유학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 지배 체제의 완성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겠지만 송과 조선에서 당쟁이 극에 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유학이 체제 내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면 그다음에는 유학 내부의 논쟁이 벌어지는 게 순서일 테니까.

전시과에서 토지를 분급하는 기준에는 관품
官品
과 더불어 인품
人品
이라는 모호한 요소가 섞이게 된다.

인품이란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뜻하는 용어다. 쉽게 말해 세력이 큰 호족은 인품도 높다는 것이다

관품과 더불어 인품이 전시과의 기준이라는 것은 곧 고려가 관료제를 지향하면서도 실은 귀족 체제에 머물고 말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국가가 관리들에게 토지를 녹봉으로 내준다고 해서 토지 자체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유권 자체를 주면 근본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토지를 받은 관리가 퇴직하고 나서 반환받을 수도 없어질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재정(토지)이 바닥나 새로 관리를 뽑을 수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과에 따라 관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란 토지의 완전한 소유권이 아니라 재임 기간 중 할당받은 토지의 생산물(즉 조세)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
收租權
이다.

유학의 경전인 《시경
詩經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의 사람 중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이것을 왕토
王土
, 왕민
王民
사상이라고 부르는데, 정치적 지배자가 나라 전체의 주인이라는 동양 특유의 사상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이므로 토지를 누구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산관
散官(퇴임한 관리)은 임기가 끝났으므로 법제상으로는 토지의 수조권을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퇴직금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수조권을 반납하고 나면 관리와 그의 가족들은 먹고살 길이 없다. 그래서 관리가 퇴임한 뒤에도 사실상 수조권은 계속 보장된다. 이런 관행이 자리 잡으면서 그 토지의 수조권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애초에 녹봉으로 받은 토지가 사실상 그 가문의 소유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화폐경제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관리들에게는 월급봉투 대신 토지를 주었다. 그러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은 왕(국가)에게 두고서 수조권만 준 데서 모든 폐단이 비롯된다.

신라에서 고려로 이행할 때 중국에서는 당­?송 교체기였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할 때 중국에서는 원­?명 교체기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거란을 멀리하라고 가르친 훈요십조는 고려왕조가 실은 새우의 처지임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찍이 진시황은 원교근공
遠交近攻(멀리 있는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한다)이라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대륙 통일을 이룬 바 있었지만, 그것은 주체가 힘과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나 쓰는 전략이다. 바깥으로 내세울 것 없고 안으로 취약한 고려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요를 적대시하고 먼 송에 사대하려 한 모순된 대외 정책은 결국 한반도에 피바람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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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연개소문은 평양성 남쪽에서 휘하 병력의 열병식을 한다는 구실로 귀족들을 초대했다. 귀족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100여 명이나 초청을 받았는데 어쩌랴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의 예상과 달리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곧바로 궁중에 들어가 영류왕까지도 살해해버렸다. 그런 다음 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
大莫離支
가 되어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했다.700년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쿠데타였다.

우두머리는 둘일 수 없는 걸까? 불행히도 짝을 이루어 나라를 구해냈던 두 영웅인 영류왕과 을지문덕은 막상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는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영류왕은 장수왕 이래 고구려 왕실의 전통적인 정책인 남진을 고집한 반면, 을지문덕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틈타 랴오둥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랴오둥은 길이 멀어(원래 랴오, 즉 요遙라는 땅이름부터가 ‘멀다’는 뜻이다)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고구려는 수성을 잘하여 정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 정벌의 어려움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밤낮으로 두 달간을 공략한 끝에 당 태종은 안시성을 부술 수 없음을, 아울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신라의 가장 큰 임무는 전투보다 ‘보급’

일찍이 고구려 정벌에서도 중국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은 바로 군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오히려 보급 병력이 정작 필요한 전투 병력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앞서 본 것처럼 수의 고구려 침공 때는 보급 병력이 전투 병력의 두 배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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