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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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세조도 그랬듯이, 원래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의 경우는 좀 달랐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인 만큼 왕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훈구파가 사라졌다. 세조의 집권을 도왔다는 공로만 두고두고 우려먹으며50년 동안 버텨온 그들이었지만 이제 그 약발은 완전히 떨어졌고,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실체마저 거의 사라졌다.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비정통적인 왕위 계승이 있을 때는 이렇게 새로 공신 세력이 생겨나는 현상을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세조가 창건한 원각사
圓覺寺
가 헐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로 선박을 건조한 것은 불교 탄압의 정점이다. 그 때문에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인 지금 서울 도심의 탑골공원

오늘날의 대학교나 대학원보다도 한 급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를 오늘날 사법고시에 비유한다면 성균관은 고시 합격생들을 교육하는 사법연수원에 해당한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우선 사마시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은 당연히 단경왕후의 복위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대사간
大司諫(사간원의 책임자)이행
李荇(1478~1534)은 복위론을 주장한 박상
朴祥(1474~1530)과 김정
金淨(1486~1521)을 유배시켰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조광조다.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을 제기했다.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무릇 대사간이라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사간원은 비록 관청이지만 민간의 언론이 없던 시절에 유일한 언론기관이었다), 이행이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시킨 것은 언로를 막은 커다란 잘못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조광조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마당을 얻었다는 뜻이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광조의 주장을 더욱이 반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그전까지는 유학 이념이 사회와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삼촌─조카 사이인 예종과 성종이 자매를 비로 얻은 것이나 형제간인 연산군과 중종이 각각 신수근의 누이와 딸을 비로 얻은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조차 유교적 예법이 지켜지지 않았다.

조광조의 개혁은 국가 이념을 바로잡는 데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 사회에 유교적 관념과 예식, 생활양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향약은 처음부터 성리학 이념을 향촌 사회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만들어진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나쁜 일은 서로 바로잡아주며[過失相規], 이웃끼리 서로 예의로써 대하고[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이것이 향약의4대 강령이다. 취지 자체는 좋지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어야 할 도덕을 관 주도의 인위적 캠페인으로 집행하려 한 것은 유학 국가만이 가능한 발상이었다.

성리학을 생활의 영역까지 관철시키려 한 조광조의 발상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관이 시민사회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게 그렇다. 더욱이 그 뿌리에는 시민사회를 관이 지배하기 쉬운 방식으로 재편하려는 불순한 의도도 있었다.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캠페인도 근본을 따져보면 유학 이념에 따른 정치 공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인재의 선발을 위해 과거제보다 천거제를 중시한 것은 사림파의 전통이었다. 그 문헌적 근거는 《대학(大學)》에 있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보다 근본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수신(修身)에 철저한 인재를 뽑으려면 시험을 치르는 것보다는 평소에 언행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1519년에 조광조의 건의로 시행된 현량과
賢良科
다. 국가를 위해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천거해 관직에 등용시킨다는 현량과

인물 추천제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 쉽다는 점이다(적어도 시험을 치러 성적순으로 인물을 선발하는 과거제보다는 객관성이 부족하다). 과연 조광조가 현량과를 도입한 의도는 곧 드러난다. 그는 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바 있던 박상과 김정은 물론 김식
金湜(1482~1520), 안처겸
安處謙(1486~1521)삼 형제 등 소장파 성균관 유생들을 천거해 요직에 임명했다.

존경 받는 원로 정승들까지 반대파로 돌아선 것은 조광조를 위해서나 개혁을 위해서나 좋지 않았다. 결국 그런 불찰이 조광조의 개혁을 불발시키게 된다.

일단 조광조는 선제공격을 가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반정공신들 가운데 자격 미달인 자가 많다는 상소를 올린 게 먹혀든 것이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태조 때의 개국공신들도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공신들의 수가 너무 많다."라는 개혁파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조광조 일파의 주장이 채택되면서76명의 공신들이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공신전과 노비 들이 몰수되었다.

현량과를 관철시킨 것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반발은 있었으나 기본 취지가 좋은 데다 전 사회가 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못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간의 성과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조광조는 내친 김에 궁지에 몰린 훈구파에 치명타를 가했는데, 결국 그 주먹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중종은 자신이 반정을 통해 즉위한 만큼 공신의 자질론을 앞세운 개혁파의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조선에서는 군주지만 황제의 책봉을 받으므로 황제에게는 신하(제후)의 신분이다. 황제를 받들어 모신다는 점에서는 국왕도 사대부와 같은 처지다(이것을 사대부들은 "천하동례天下同禮, 즉 천자 앞에서는 누구나 같다."라고 말했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천하의 주인은 오직 천자 하나뿐이므로 사대부는 천자를 제외한 모두?조선 왕도 포함된다?를 탄핵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들의 이런 군주관은 17세기에 중국 대륙을 ‘오랑캐’인 만주족이 정복할 때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그런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그는 그의 개혁을 처음부터 충실하게 지지해주었던 가장 중요한 후원자를 잃게 된다.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는 중종이라 해도, "학문이 고명해지면 다른 일은 자연히 노력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것"이라면서 학문의 지극한 경지에 오르도록 하라는 조광조의 말에 거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광조와 김정 등 개혁 주도 세력은 유배되었다가 곧 사약을 받았다. 촉망받던 소장학자 김식은 유배지에서 군신천세의
君臣千歲義(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영원하다)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를 짓고 자결했다. 물론 그 밖에도 수십 명이 옥사하고 파직당했다. 이해가 기묘년이기에 이 사건을 기묘사화
己卯士禍

원래 만주는 중국의 영향권 바깥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 제국밖에 없었다.

실제로 얼마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비변사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했다.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은 이순신의 수군을 제외하면 거의 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군제는 오히려 시대를 역행했다. 군역을 면하게 해주는 대신 베를 받던 관행(당시 베는 현금이었다)이 방군수포제
放軍收布制
라는 정식 제도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돈을 주고 국방의 의무를 면제하는 게 합법화된 격이다.
그랬으니 당시 조선의 국방력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차라리 세조처럼 칼을 앞세워 정변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편이 더 솔직하고 ‘건강’했다. 물론 그것도 조선이 왕국이던 조선 초기이기에 가능했지만). 연극처럼 허구적인 반역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사화들을 일종의 ‘반역극’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가히 모함의 전성시대

조선 중기의 4대 사화로 불리는 무오년, 갑자년, 기묘년, 을사년의 사화에서 앞의 두 사화는 연산군이 일으킨 것이지만, 중종과 명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는 사대부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그녀는 즉각 대윤의 일당을 잡아들이고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윤임을 비롯한 수십 명이 처형되고 유배된 이 사건은 을사사화
乙巳士禍
라고 불린다

대자보는 조선의 병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었지만, 윤원형은 오히려 그것을 을사사화가 불충분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그래서 봉성군을 비롯해 수십 명의 반대파가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작은 사화가 또다시 벌어졌다. 이 사건을 정미사화
丁未士禍

사화를 일으켜 공신이 된 자들은 과거 훈구파만큼의 경륜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아무래도 대세는 사림파를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현역 군부가 부패하면 사관학교가 상대적으로 청렴해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까?). 특히 사림의 뜻있는 유생들은 혼탁한 중앙 정치를 버리고 낙향해 전국 각지에서 서원
書院
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이들이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성장하게 된다(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사실 이량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
仁順王后
의 외삼촌이었으니 결과는 처음부터 보지 않아도 뻔했다(자신의 외삼촌을 제거하기 위해 처외삼촌을 기용한 격이다).

흔히 말하는 ‘관군’은 오늘날로 치면 군대가 아니라 경찰력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에는 변방을 지키는 비변사 이외에 특별한 군 조직이 없었다

삼포왜란에 놀라 비변사
備邊司
라는 군사 기구를 설치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국방을 전담하는 정규군 조직

덕흥군 자신도 한창 젊은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새 직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덕흥군은 나중에 죽은 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격상된다. 이것이 대원군이라는 직함의 시작이다. 즉 대원군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닌 상황에서 아들이 왕으로 옹립되었을 때 그 왕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직함이다.

이성계의 역성 쿠데타에 반대한 윤이와 이초는 명 황실에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보고했다. 정치적으로 신진 사대부의 대표인 이성계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이인임은 성주 이씨고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까 말도 안 되는 보고였지만

당시 명은 조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므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무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명의 사관은 주원장의 치세를 기록한 《태조실록》에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올려버렸다.
가뜩이나 신생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문제로 부심하고 있었던 이성계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때마침 조선에 온 명 사신에게 사실을 수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이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주청사를 보냈다. 하지만 명은 태조의 유훈이 실린 《대명회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서 약을 올렸다.

다툴 이유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사대부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심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권력의 정점에 올랐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운다. 이것을 좀 거친 용어로 표현하면 당쟁이고, 세련되게 포장하면 붕당정치
朋黨政治
다.

국왕을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졌다. 이념에서도 전 사회가 성리학으로 완전히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사대부들 간의 권력 다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시시콜콜하게 말꼬리나 잡으며 박 터지게 싸운 경우는 없다.

권신 이량을 축출하는 데 공이 컸던 심의겸은 인순왕후의 동생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사림의 세상에서는 왕실 외척이라는 게 오히려 단점이었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대부들 간에 명망이 높았고 선후배 관계도 좋았다.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지만 학파로는 동지였던 이이와 성혼은 정파로도 서인에 속하는 동지였다.

정여립
鄭汝立(1546~1589)이라는 제자가 묘한 행적을 보였다. 스승인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편으로 붙는가 싶더니 이이가 죽자 서인의 단독 거두가 된 성혼을 거세게 비판한 것이다(이이를 배반한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었으니, 이래저래 이조전랑은 골치 아픈 자리였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정여립은 곧 서인들에게 밀려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정여립은 고향에서의 영향력을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측근들로 대동계
大同契
라는 일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매달 한 차례씩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지역의 유지라는 신분을 넘어 정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치 공작으로 나아갔다. 승려들과 규합해 전주에서 장차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둥, 목자
木子
가 망하고 전읍
奠邑
이 흥할 것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민간에 퍼뜨린 것이다(‘木子’는 ‘李’이고 ‘奠邑’은 ‘鄭’이므로―邑은?과 같다?그 소문은 이씨가 망하고 정씨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 초기부터 《정감록(鄭鑑錄)》이 나돌았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 이 책은 도참설과 풍수지리 등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깔고 은유와 파자(破字)를 많이 써가면서 장차 정씨 성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하리라는 내용

정철
鄭澈(1536~1593)은 이 사건을 특별히 담당하는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동인의 우두머리인 이발
李潑(1544~1589)을 비롯해 수십 명의 동인 측 사대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유배시키며 오랜만에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꾀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지만, 역모가 사건으로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대규모 옥사가 빚어졌으니, 역시 ‘말만의 역모’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정여립 모반 사건은 앞서의 사화들과 궤를 같이한다. 다만 사화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제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아니라 사대부들 간에 사적인 친분 관계(당파)조차 쉽게 대형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서 동인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고 말았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
建儲(‘儲’란 세자를 뜻한다)문제라고 불리는 사건인데, 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였다.

정철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차라리 그것을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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