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서희, 윤관, 김부식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해낸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 답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무관이 아닌 문관이다.
1198년 늦봄에 만적은 동료 노비들과 함께 개경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장 연설을 했다. "경계 庚癸(경인년과 계사년의 무신란, 즉1170년 정중부의 난과1173년 김보당의 난을 가리킨다)이래로 천한 노비가 고관대작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무신으로서 집권한 자는 경대승과 최충헌을 제외하면 모두 근본 없는 천민 출신이었으니,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
무신정권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국가의 질서 자체를 뒤흔들었다. "저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하급 관리, 양민, 천민까지 하극상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지도는 1170년 무신정권이 성립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보여준다.
최충헌이 왕위 계승보다 더 중시한 것은 실질적 집권자의 계승이었다(당시 일본에서 천황의 계승보다 바쿠후 정권의 소유자인 쇼군의 계승이 더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교정도감은 무신 정권기 내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게 되며, 무신 집권자는 자동으로 교정별감이 되는 전통이 생겼다. 당대의 일본사에 비유하면 무신 집권자는 바쿠후의 쇼군에 해당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우리 현대사에 비유하면 교정도감은 박정희 정권 시대에 설치된 중앙정보부이고, 교정별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장에 해당한다.
교정도감의 첫째 기능은 정치인과 관리 들에 대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권력이 실린 기관은 기능도 확대되게 마련이다. 사찰 기구로 출발한 교정도감의 기능은 점차 넓어져 행정과 세무는 물론 전반적인 국정의 중대사까지 두루 총괄하게 되었다.
별초란 이름 그대로 ‘특별히[別] 뽑은[招]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고려 초기부터 있었는데(윤관이 편성한 별무반도 별초의 하나다), 마별초라면 말할 것도 없이 기병대를 가리킨다. 그전까지 고려의 군대 조직은 궁성 경비대와 변방의 진지에 주둔한 군대 이외에 별도로 상비군이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이를테면 반란이 일어난다든가) 모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최우는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편성한 셈이다
한족 제국이든 이민족 제국이든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못하는 왕조는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면 금은 북송을 무너뜨린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대륙 정복을 추진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요처럼 단명한 제국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금은 거란이 랴오둥에 안주한 탓에 크게 뻗지 못했다는 점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도, 막상 북송을 정복하고 중원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성공에 도취해버렸다.
칭기즈 칸은 한반도는커녕 중국 대륙에도 관심이 없었다. 남송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달한 서역(중앙아시아)과의 경제적 교류에 일찌감치 주목한 그는 금을 제압하는 선에서 동방 경략을 일단락 짓고 서역 원정에 나섰다. 유목 제국의 우두머리답게 그는 중화 세계에 만족하는 한족의 천자라면 품지도 못할 꿈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예부터 동서 무역의 중추였던 비단길을 장악해 경제 대국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의 호라산(지금의 이란)까지 정복하자 그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몽골 제국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고려 정벌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은 1234년 금의 명맥을 끊었고, 그 이듬해에는 역사적인 유럽 원정을 시작했다. 바투가 이끄는 20만 명의 유럽 원정군은 특유의 기동성으로 6년 만에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유린하고 서유럽의 관문인 폴란드와 독일의 동부 접경지대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만 오고타이가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철군하게 된다. 당시 정복의 초점은 당연히 유럽 전선에 있었으므로 몽골에 고려는 정복의 대상이라기보다 후방 다지기의 대상에 불과했다. 실제로 고려 정벌도 몽골 주력군이 아니라 본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할당받은 칭기즈 칸의 동생 오치긴이 주도한 것이었다. 고려가 30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일본의 바쿠후와 고려의 무신 정권은 둘 다 상징 권력(일본 천황과 고려 국왕)과 실제 권력(쇼군과 무신 집권자)이 나뉘는 일종의 ‘이중권력’ 체제였다. 그런데 일본의 쇼군은 고려의 무신 집권자와 달랐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철저히 그늘에만 머물면서 권력의 단물만 빼먹은 데 비해, 일본의 쇼군은 천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나중에 보겠지만 몽골 침략에 맞설 때도 쇼군이 직접 나섰고, 중국 황제가 일본 왕으로 책봉한 대상도 천황이 아닌 쇼군이었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국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짓도 서슴지 않았으나, 일본의 쇼군은 천황의 혈통을 대단히 중시한 것은 물론 정기적으로 교토를 방문해 천황에게 문안을 드렸고 국가의 상징으로서 예우했다. 깡패 집단으로 끝난 고려의 무신 정권에 비해 일본의 바쿠후 정권이 훨씬 오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몽골은 고려의 그런 비상식적인 처사가 눈에 거슬렸다. 천도 두 달 뒤인1232년9월에 살리타는 개경으로 환도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강화도 망명 정권은 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허망하게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렇게 해서1232년7월부터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중앙정부는 망명 정부로 전락했다.
아무리 고려의 사직과 왕권이 보잘것없다 해도 일국의 왕과 중신들이 국토와 백성들을 버리고 조그만 섬으로 가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장기적으로 대몽 항쟁을 위한 준비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은 억지 변명에 불과하다. 사실은 훨씬 간단하다.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감행한 극약 처방이다. 몽골이 고려를 정복하고 내정까지 좌지우지한다면 국왕까지는 인정한다 해도 그늘의 권력자까지 배려하지는 않을 게 뻔하다. 따라서 최우는 낙동강 오리알이 될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최우는 강화도 정부에서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니 개인적으로 천도의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토와 백성들은 그 천도 때문에 다시 한 번 큰 화를 입게 된다.
문화재의 측면에서 볼 때 이3차전으로 고려는 하나의 문화재를 새로 만들었고 다른 한 문화재를 잃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새로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했고(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최대의 사찰인 경주 황룡사가 불타 무너졌다.
1251년에 제위에 오른 몽케(재위1251~1259)는 다시 고종의 입조와 개경 환도를 요구했다. 그런데 최우를 계승한 아들 최항(崔沆, ?~1257)은 아버지의 쇠고집을 물려받은 데다 속임수가 능했다. 몽골에 사신을 보내 왕을 강화도에서 내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막판에 다른 왕족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에 몽케는 크게 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국가의 위기와 정권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최항은1253년에 몽골군이 침략해오자 또다시 속임수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강화도 맞은편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고종이 마치 뭍으로 나온 것처럼 꾸며 거기서 몽골 사신을 영접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그게 처음이기는 했으나 같은 속임수에 두 번 속을 바보는 없다. 결국 이듬해 여름부터 시작된 몽골의6차 침략은 사상 최대의 피해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해에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성은 무려20만6800여 명이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라고 되어 있다. 무신 집권자가 저지른 무지한 사기극의 대가는 고려 백성들이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장기 집권 가문이 사라진 이상 적어도 터무니없는 대몽 항쟁이 더 이상 지속될 이유는 없었다. 이듬해 고종이 몽골과의 타협으로 태자를 대신 입조시키면서28년에 걸친 무모한 항쟁은 마침내끝났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고려는 전란의 피해를 입기 전에 진작부터 몽골에 대해 확실한 사대 관계를 취했어야 한다.
1270년 원종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개경 환도를 단행했는데,40년 만의 환도를 기념한 것은 경축 행사가 아니라 반란이었다. 반란의 주역은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고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군대, 즉 별초군이다. 창립자이자 총지휘자인 무신 집권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군대는 깡패 조직으로 변했다. 그들이 새로 뽑은 우두머리 배중손 裵仲孫(?~1271)은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 남아 반란을 일으켰다. ●
흔히 삼별초는 몽골 침략에 최후까지 항전한 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망명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됨에 따라 실업자가 된 강화도 수비대가 ‘구조 조정’에 반대해서 파업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동병상련의 심정인 고려 백성들이 그들의 반정부 쿠데타를 지지해준 덕분에 그들의 허명이 후대에 과대 포장되었다.
삼별초의 난이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백성들 사이에 몽골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컸기 때문이지만 그 밖에도 이유가 더 있다. 당시 백성들은 몽골의 가혹한 징발에 시달렸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징발이었을까? 바로 쿠빌라이, 즉 원 세조 世祖(재위1260~1294)가 시도한 일본 정벌이다.
●두 차례의 태풍으로 국난을 넘긴 덕분에 당시 일본인들은 그 태풍을 신이 내린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1274년의 위기를 넘기자 호조 도키무네는 "신이 일본을 수호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을 처형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함께 세계 제국 몽골이 정복을 시도했다가 유일하게 실패한 곳으로 기록에 남았다.
삼별초의 난과 일본 원정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에야 비로소 모든 뒤풀이가 끝났다. 이제 원에 반대하는 고려 내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었고, 일본 정벌 전쟁에 용병으로 징발될 만큼 고려는 원의 완전한 속국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원에 가 있던 세자는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려로 귀국하더니 독특한 방식으로 슬픔을 달랬다. 아버지가 아끼는 애첩과 그 배후 세력을 모조리 잡아 죽인 것이다. 세자는 어머니가 마흔 살도 못 되어 죽은 탓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겠지만, 졸지에 아내와 애인을 모두 잃은 충렬왕은 이듬해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원에 있을 때부터 매 사냥에 탐닉했으므로 더욱 왕위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왕위가 보잘것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은 아버지 충렬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고려 역사상, 아니 한반도 역사상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정상적인 왕국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농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성장한 세도가들은 이내 정치 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권문세족이라고 불리는 신종 ‘족속’이다.
개국 초기에 호족, 다음에 외척, 그다음에 무신, 또 그다음에 권문세족이 차례로 내정을 좌지우지
신흥 유학인 주자학이 도입되자 충렬왕은 전통적인 국립대학이던 국자감을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주자학은 중화사상에 철학의 옷을 입혀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 전통적인 유학의 이념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천하의 중심은 중화 세계이며, 사방의 이적 夷狄(오랑캐)들이 중화 세계를 중심으로 받들고 사대하는 게 우주의 질서이자 조화다. 주희는 그 중심을 이 理 로, 주변을 기 氣 로 지칭하면서 화이론을 이기론으로 교묘하게 대체했다. 지금은 기가 승한 시대, 즉 오랑캐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이것은 우주의 질서가 깨진 결과다. 따라서 결국 근본인 이로 돌아갈 것이다.
바야흐로 고려의 권력 구도는 수구 대 진보로 나뉘었다(친명 노선을 진보라고 부르기는 곤란하지만 당시로서는 진보에 속했다). 인물로 볼 때는 권문세족 대 신진 사대부의 대립이었고, 외교적으로는 친원 대 친명, 종교적으로는 불교 대 유교의 대립이었다.
최영이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이성계의 쿠데타가 민간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최영이 보기에는, ‘근본’도 없는 홍건적 두목이 세운 나라가 원을 몰아낸 것만 해도 용납할 수 없는데, 고려에 압력까지 가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세운 대응책은 너무도 과감하고 대담했다. 놀랍게도 한반도 북부를 확실히 영토화하는 것을 넘어 내친김에 랴오둥까지 정벌하자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원정이 무리라는 것을 최영이 과연 진짜로 몰랐을까? 당시 최영과 이성계 모두 홍건적과 왜구의 토벌로 이름이 높았으나, 떠오르는 해는 최영보다 스무 살이나 젊은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이미 1383년부터 정도전과 교류하고 있었으므로 최영은 이성계를 제거하지 않으면 신진 사대부 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길지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리한 랴오둥 정벌은 좋은 기회가 된다. 이성계와 정도전도 역시 그 점을 알았기에 원정을 반대했을 것이다.
무신 정권과 권문세족의 오랜 지배가 끝난 뒤에 전국의 토지는 거의 다 임자가 정해져 있었다. 토지가 부족해 새 관리는커녕 기존의 관리에게조차 봉급을 줄 게 없었다.
기존의 모든 토지 소유관계를 무효화하고 밑그림부터 새로 그려야만 토지제도와 국가 재정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었다. 새 나라가 서야만 한다는 생각은 여기서 무르익었다.
묘청은 새 나라를 세운 것이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려왕조로 볼 때는 명백한 반란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이 사건이 묘청의 난이라고 기록되었다. 사실 묘청은 거사 소식을 당당하게 고려 조정에 전했으며,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칭제까지 했으면서도 직접 황제나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별도로 왕을 옹립하지도 않았다. 인종의 마음이 돌아설 여지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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