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유방을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호방함도 대단하지만 그런 말을 이성계가 용납했을 정도면 당시 정도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도전이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가 건국될 때처럼 분열되어 있던 나라들을 통일한 게 아니라 쿠데타로 이룬 새 나라였다. 그러므로 정통성의 문제는 오로지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친명파이자 사대주의자인 정도전이, 비록 계획으로만 그쳤지만 랴오둥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이 신생국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과연 나중에 이 책은 세조 때 본격적인 국가 운영 지침서인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다.
《조선경국전》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 서론에서 강조되는 ‘인 仁 ’의 정치다. 공자는 주나라 시대에 생겨난 조상숭배와 사직을 뜻하는예 禮 의 개념에 국가와 사회 조직의 원리인 인을 더해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창시했다(맹자도 역시 인에 의한 왕도 王道정치를 주장한 바 있다). 정도전이 국가 경영(경국)의 원리로 인을 내세운 것은 곧 유교 정치 이념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유교 국가의 왕은 사직에 충실하면 될 뿐 실무를 담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 경영의 실무는 과거제로 뽑은 관료들이 담당한다. 그래서 정도전은 관료들의 수장인 재상이 통치의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테면 국왕은 상징적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존재이고, 실제 정치와 행정은 재상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천자를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들이 천자를 보좌하는 전형적인 유교 정치의 밑그림이며, 주자학(성리학)을 정립한 주희 朱熹(1130~1200)의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제시한 조선 건국의 이념은 명확해진다. 그는 옛 주나라의 예법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조선을 유교 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인 동기로, 정도전은 이성계가 국왕이지만 조선의 기획자인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을 상징 권력으로 치부하고 관료가 실무를 담당하는 체제가 가장 바람직스럽다.
‘심기리(心氣理)’의 심은 불교, 기는 도교, 리는 유교를 뜻한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경을 이용해 도교를 비판하고 노장사상을 이용해 불교를 비판하면서 결국 리를 본질로 하는 유교만이 최선의 이념이라고 찬양한다. 또한 《불씨잡변》에서는 논의의 차원을 더욱 끌어올려 철학적으로 불교의 윤회설을 공박하면서 불교를 숭상한 고려가 어떻게 멸망의 길로 치달았는지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 개념을 혼동하지 말라고 주장한 점이다.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도전에 따르면 자비는 무차별한 박애주의이므로 오히려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개념이다. 그 근거는 분명하다. 불교의 자비는 도덕적 개념이지만 유학의 인은 원래 정치와 국가 운영을 가리키는 개념이니까.
건국자가 죽고 난 다음에 왕위 계승전이 벌어진 고려와는 달리 조선의 개국 초기 증후군은 이성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절에 터져 나왔다.
무릇 새 왕조는 이른바 ‘개국 초기 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게 마련이다. 건국자의 특권과 권위는 보장되지만 건국자가 물러난 뒤에는 그 특권과 권위가 특정한 개인에게 순탄하게 상속되기 어렵다는 증상, 요컨대 후계 문제가 바로 그것
왕위 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나, 아니었나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에서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지금의 아내 강씨(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번 李芳蕃(1381~1398)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마음먹었다. 강씨는 고려 말 권문세족인 강윤성의 딸인데, 이성계는 처가의 도움에 보답할 겸 명문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고자 방번을 낙점했을 것이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 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 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군사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공신들은 막내를 계승자로 삼아 왕권을 더 제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일치했으므로1392년8월에 드디어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 불씨에 불을 댕긴 것은 어리고 힘없는 막내를 세자로 삼아 조선을 일찌감치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정도전이었다.
8월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권리를 누렸음에도 뭐가 부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거요?" 조선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왕자의 관점에서는 엄연한 ‘왕국’을 때 이르게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것이 악행이라면 악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꿈꾼 사대부 국가는 100여 년 뒤에 현실화된다.
왕위 계승은 왕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정몽주와 정도전을 살해한 방원을 추대했다. 그러나 아직 전면에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방원은 짐짓 서열을 운위하면서 둘째 이방과 李芳果(1357~1419)에게 양보했다
(이성계도 고려를 무너뜨릴 때 그랬듯이, 원래 쿠데타의 실세는 허수아비를 먼저 내세운 다음에 집권하는 절차를 밟는 법이다).
배다른 형들은 냉혹했다. 폐위된 어린 세자 이방석은 유배 조치를 받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되었고, 곧이어 그의 형인 이방번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한반도의 경우는 중국보다 시기적으로 한 왕조씩 뒤처진다. 즉 통일신라는 중국의 한 제국처럼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당 제국처럼 과거제를 도입했으면서도 귀족과 호족 들이 중앙 정치를 주물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의 송과 비교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실제로 건국 초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은 본격적인 사대부 왕국으로 탈바꿈해 송 대처럼 망국적인 당쟁에 시달리게 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맨 먼저 할 일은 두 번 다시 그런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 를 의정부 議政府 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제각기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 삼군부 三軍府 를 설치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의 노력은 비정하다 할 만큼 철저했다. 그의 쿠데타에 일등공신으로 기여한 처남 민무구 閔無咎 의4형제를 죽인 일이나 심복인 이숙번 李叔蕃 을 유배 보낸 것은 단순한 토사구팽의 차원을 넘어 명백한 숙청이었다. 그 덕분에 재위 몇 년 만에 그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할 만한 사대부나 관료 세력은 씨가 말라버렸다. 이제 사대부는 국왕의 충실한 관료가 되거나 순수한 사림 士林 ● 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림이라는 말은 고려 말에 처음 사용되었는데, 조선 초까지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는 의미였다. 즉 관리로 임용되지 않았거나 그럴 의사가 없는 유학자인데, 지금으로 치면 순수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본격적인 사대부 국가가 되는 16세기부터 사림은 제도권 바깥에 있으면서(즉 신분상으로는 관리가 아니면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므로 왕조 교체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가 일정한 유형처럼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건국된 왕조는 새 토지제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까지는 대체로 잘나간다. 그러나 그 제도가 수명을 다하는 중기 무렵부터 제도의 모순이 노출되면서 경제가 붕괴한다.
전시과에는 현직 관리가 죽어도 봉급으로 받은 토지가 국가에 반납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결과로 고려는 중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지주들이 토지 겸병에 나서면서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과전법을 만든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는 그간의 오랜 관행으로 사실상 사유화된 토지를 다시 수조권만 재분배하는 것으로 바꾸려 했을 뿐이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는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 收租權 만을 허용하는 제도
따라서 과전법도 전시과의 결함을 그대로 노출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시과나 과전법에서 모두 세습을 인정한 토지는 공신전(功臣田)이다. 호족들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 왕건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성계 역시 적지 않은 개국공신들(그의 아들들도 포함된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그래서 공신전은 수조권과 무관하게 사전으로 취급되어 세습될 수 있었다. 이런 예외 조항이 있는 한 아무리 엄격한 토지제도라도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태종은 원래 면세의 특혜까지 누렸던 공신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했지만 공신전의 세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재정의 목표는 국가가 재산을 그러모으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거두어들인 재정 수입에 맞게 재정 지출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사회 간접 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이므로 국가의 재정 지출 가운데 으뜸은 단연 관리들의 봉급이었다
태종의 최대 업적은 바로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것이다.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자신의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것
양녕은 왕위에 관심이 없어 아버지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청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땠든 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무백관’이 세자의 교체까지 건의하고 그 뜻을 관철시킬 만큼 발언권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적 역량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여건 또한 최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즉위하던 때와 달리 왕위 계승과 관련된 잡음이 전혀 없는 상태로 출발했다는 게 최대의 강점이었다(여기에는 아버지와 형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개국공신이 없다는 것도 좋은 환경이었다. 정도전을 위시해 조준, 권근 등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따라서 발언권이 큰)공신들은 제거되거나 죽었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즉위 초에 권력 안정으로 부심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본연의 업무인 통치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 해도 모든 일을 혼자 도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에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뜻으로 휴가를 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그런 실용서까지도 유학자들이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서 말하는 유학이란 특정한 ‘학문 분과’가 아니었다. 유학은 학문의 특정한 과목이 아니라 학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서양에 비유하면 중세의 신학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농사법과 의학, 약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실용적 학문
동양의 전통에 따르면 원래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인쇄술이 개발되어도 ‘장서용’ 역사서나 찍어서 서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다. ● 그런 전통에 맞서 세종은, 비록 농서나 의약서 같은 실용서에 국한되었지만 서적을 민간에 널리 보급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혁신적인 군주였다.
이 점에서 서양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세종의 시대, 그러니까 15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지 50년도 못 되어 유럽 전역에 출판사, 인쇄소가 생기고 서적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일반 민중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모토는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인쇄술과 함께 이른바 동양의 4대 발명품으로 불리는 종이, 나침반, 화약 등도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발명되는 데 그쳤으나 서양에서는 발명되거나 도입되자마자 순식간에 민간에 널리 퍼져 실생활에 이용되었다.
1446년9월에 세종은 훈민정음 訓民正音 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면서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쓰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어학적으로도 우리말은 교착어이고 중국어는 굴절어다(쉽게 구분하면, 교착어는 어근에 접두사나 접미사 같은 게 자유롭게 붙어서 이루어지는 말이며, 굴절어는 각 낱말의 의미가 고정되고 분리된 성격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문법에서도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글을 통해 완벽한 의사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였다.
흔히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 창제되었다고 알려졌는데, 한자의 ‘발음기호’도 창제 목적의 하나였을 것이다. 한자가 도입된 삼국시대 초기 이래 1000여 년이 지나면서 한자의 발음이 중국과 많이 달라진 것을 바로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자는 원래 그림에서 출발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추상화되어 기호가 되고 그 기호가 최종적으로 정리된 결과로서 탄생한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한자, 알파벳의 원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등이 모두 그렇다. 즉 문자는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지배 집단이 일정한 기간 동안 연구해 문자 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또 그 문자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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