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역사에서는 통일이 기본이고 가끔 분열기가 끼여 있었던 반면, 로마 제국 이후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던 유럽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기본이고 이따금 국지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이 점이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석굴암에서 굽어보는 바로 앞바다는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왜구가 경주를 침략하는 주요 노선인 탓으로 신라 왕실에서 불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절을 많이 지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정신적인 왜구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만약 성공했더라면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집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의 수준이다.
‘골(성골, 진골)’에 속하는 왕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원하는 직책을 가질 수 있었고, ‘품’에 속하는 귀족들, 그중에서도 최상층 세력인 육두품은 독서삼품과에 응시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유학을 가는 게 관직 임용에서나 학문적으로나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균전제란 쉽게 말해 토지[田]를 농민들에게 고르게[均]나누어주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인다는 제도다(일본의 반전제도 내용은 같다)
원래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토지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이전 왕조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새로이 분급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중기쯤 되면 토지가 부족해진다. 인구는 늘어나고 봉급을 주어야 할 관리도 늘어난다(관리의 봉급은 물론 토지다). 결국 그 부담은 농민들에게 지워지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떠난다. 당이 무너진 과정도 바로 그랬다.
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에서부터 45대 신무왕까지 여섯 명의 왕은 모두 원성왕의 증손이다. 비록 그중 세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는 했지만, 800년에서 839년까지 40년 동안 신라 왕위는 친형제 셋을 포함해서 형제들끼리 주고받은 셈이다. 만약 당의 제국 정부가 예전처럼 굳건했더라면 그렇듯이 신라의 왕위 계승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쿠데타로 집권한 신라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문책을 가했을 테니까. 그러나 당시 당의 황실은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으므로 변방의 사정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신라의 왕권마저 넘볼 수 있었던 이유는 당 제국이 더 이상 동북아시아 질서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선왕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당의 국력이 약해졌다는 배경의 덕분이다.
발해는 전성기 때조차도 랴오둥을 노리지 않았다. 그것은 발해의 운명을 위해 커다란 판단 실수였을 뿐 아니라 당말오대에 북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분위기에 역행하는 자세였다. 설령 힘이 모자란다 해도 당이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해는 어떻게든 랴오둥에 진출하려 노력했어야 한다. 만주를 근거지로 삼는 왕조로서 랴오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것은 일찍이 고구려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발해가 만주에 안주한 것은 곧 북방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를 대신해 세대교체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거란이었다. 몽골 초원의 동부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던 거란은 당의 약화를 틈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북조시대에 북조를 지배한 옛 선비족의 후예였다.
당 제국이289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을 때, 거란의 우두머리인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요 遼 를 건국했다
‘애제’라면 ‘슬픈 황제’라는 뜻이니까 황제의 시호로는 영 이상하게 보이는데, 시호 자체가 죽은 뒤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서 비운에 죽었거나 한 왕조의 마지막이 된 황제는 대개 애제 또는 공제(恭帝)라고 부른다. 재위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살해당한 신라의 혜공왕, 애장왕, 민애왕 등의 시호에 ‘공’이나 ‘애’가 들어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불행히도 진성여왕은200년 전의 선배 여왕들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그때는 비록 왕실은 흔들려도 나라는 튼튼할뿐더러 무엇보다 진골 귀족들의 충실한 지원을 받았으니까.
궁예가 첫 도읍지로 정한 오늘날 철원의 위성사진이다. 이것으로 궁예는 반란군의 수괴에서 일약 일국의 왕으로 출세했는데, 이렇듯 중부 지방에서 쉽게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신라가 전국적인 왕조가 되지 못하고 경주 정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곧이어 견훤이 전주에서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중국 측 사서에 옛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경우가 많은 탓으로 고구려는 고려라고도 불렸다). ●
후백제나 후고구려라는 국호에서 ‘후(後)’라는 수식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백제와 고구려였다. 견훤과 궁예가 옛 왕조의 부활을 선언한 데는 중국 역사에서 모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특히 분열 시대에 탄생한 새 왕조들이 전통과 권위의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옛 왕조들(특히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의 국호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907년에 중국의 당 제국이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고된 사태였지만 그래도 중국은 신라 왕실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였다. 이제 그 기둥이 무너졌으니 신라의 사직도 얼마 남지 않을 게 뻔했다.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데다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 데 불과했기에 중화 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 세계의 만만한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다.
새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헌 왕조를 무너뜨리는 아픔을 겪어야 정상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고려는 새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고 모순에 찬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첫 번째는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 세력 간의 모순
그는 즉위한 뒤 곧바로 호족들에게 일일이 사신을 보내면서 저자세를 취했다. ● 935년 자신에게 투항해온 견훤을 상부 上父 라고 부르며 받든 것은 그런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다(견훤은 그보다 불과 열 살가량 위였으니 왕건의 저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 그의 정책을 중폐비사(重幣卑辭)라고 부른다. 말뜻은 비단[幣]을 주고 말[辭]을 낮춘다는 것인데, 실제로 왕건은 호족들에게 재물을 주고 후하게 대하면서도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겸손하게 행동했다. 고압적인 궁예와는 정반대였으니 호족들은 당연히 만족했다. 아버지 때부터 오랜 2인자로 처신한 데서 몸에 익은 태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자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왕건이 생각한 안전장치는 신라의 상수리제도를 모방한 기인 其人 제도였다. 지방 관리를 수도에 파견하게 하는 상수리제도에 비해 기인제도는 관리가 아니라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삼는 것이므로 더 강력했다.
혈연보다 더 강력한 안전판이 또 있을까? 호족들을 다 친척으로 만들면 된다. 즉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 가족이니 서로 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릴 수 있고 국왕은 호족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스물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그의 아들들은 알려진 것만 해도 무려 스물다섯 명이었다. 이 왕자들이 고려왕조의 첫 번째 진통을 부른다.
그 덕분에 왕건은 고려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를 거느린 국왕이 된다(조선시대의 왕들은 더 많은 처첩을 거느렸지만 그때는 후궁이 제도화되었으므로 비교하기 어렵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도 무려 스물아홉 명(왕후 여섯 명, 부인 스물세 명)인데, 거의 대부분이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결과였으니 그야말로 ‘육탄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943년에 왕건이 죽자 일단은 맏아들인무 武 가 혜종 惠宗(재위943~945)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가 오래 버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맏이라는 강점은 있으나 스물다섯 명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그 기준이란 바로 외가의 힘이다. 왕자들 모두 아버지는 왕건으로 같으므로 왕자들의 ‘실력’은 곧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왕건은 미약한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근친혼을 적극 장려한 바 있었다(근친혼이 금기시되는 것은 유학이 뿌리를 내리는 조선시대부터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권 안정을 위해 각지의 호족들과 통혼을 맺어 살아 있을 당시엔 효과를 보았으나, 사후에는 왕위 계승을 두고 분쟁을 넘어 내전까지 치르게 됐다. 훈요십조에는 권력 승계의 원칙이랄 게 없고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후대의 혼란을 왕건이 자초한 셈이 되었다.
문제는 사병 조직의 근간이 노비라는 점이었다.
호족들이 많은 노비를 거느리게 된 것은 주로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호족들이 멋대로 토지를 병합하면서 토지에 딸린 양민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았기 때문이다.
956년에 광종은 노비안검법 奴婢按檢法 을 시행했다. 노비들을 풀어주라는 조치였는데, 말하자면 노예해방인 셈이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인도주의적인 데 있지 않고 호족들의 무장 조직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게다가 노비안검법은 광종에게 짭짤한 부수입도 주었다. 노비에서 양민으로 신분 상승한 그들이 이제 호족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조세를 바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호족들은 경제적 기반이 약해졌고, 그만큼 중앙 재정은 튼실해졌다.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은 자기 마음대로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지방행정을 주무르는 데서 나왔다. 따라서 그것마저 뿌리 뽑지 않으면 호족들의 세상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광종이958년에 추진한2차 개혁은 바로 과거제였다.
과거제의 ‘형식’은(관리 임명권을 중앙에서 쥐게 되므로)호족 세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과거제의 ‘내용’은(유교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과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을 이룬다는 꿈은 이미 물 건너갔고, 결국 중앙정부는 호족들과 다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속현 屬縣(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행정구역)이다.
쉽게 말해 중앙정부가 파견한 지방관은 대호족의 ‘손님’처럼 형식적인 수령의 지위만 유지하고 사실상의 지방행정은 호족이 알아서 관장하는 식이다. 모두335개에 이르는 고려의 현 가운데 속현의 비율이 무려90퍼센트 이상
(이후 속현은 조금씩 줄었으나 완전히 소멸한 것은 중앙집권화가 확실히 이루어진 조선시대의 일이다).
중국의 송에 해당하는 한반도 왕조는 후대의 조선이다. 당에서 시행된 과거제가 송대에 꽃피웠다면, 고려에서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사회의 골간이 되었다. 송이 완벽한 유교 제국이었다면, 조선은 완벽한 유교 왕국이었다. 즉 송과 조선은 둘 다 유학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 지배 체제의 완성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겠지만 송과 조선에서 당쟁이 극에 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유학이 체제 내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면 그다음에는 유학 내부의 논쟁이 벌어지는 게 순서일 테니까.
전시과에서 토지를 분급하는 기준에는 관품 官品 과 더불어 인품 人品 이라는 모호한 요소가 섞이게 된다.
인품이란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뜻하는 용어다. 쉽게 말해 세력이 큰 호족은 인품도 높다는 것이다
관품과 더불어 인품이 전시과의 기준이라는 것은 곧 고려가 관료제를 지향하면서도 실은 귀족 체제에 머물고 말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국가가 관리들에게 토지를 녹봉으로 내준다고 해서 토지 자체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유권 자체를 주면 근본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토지를 받은 관리가 퇴직하고 나서 반환받을 수도 없어질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재정(토지)이 바닥나 새로 관리를 뽑을 수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과에 따라 관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란 토지의 완전한 소유권이 아니라 재임 기간 중 할당받은 토지의 생산물(즉 조세)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 收租權 이다. ●
유학의 경전인 《시경 詩經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의 사람 중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이것을 왕토 王土 , 왕민 王民 사상이라고 부르는데, 정치적 지배자가 나라 전체의 주인이라는 동양 특유의 사상이다. ● 이 사상에 따르면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이므로 토지를 누구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산관 散官(퇴임한 관리)은 임기가 끝났으므로 법제상으로는 토지의 수조권을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퇴직금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수조권을 반납하고 나면 관리와 그의 가족들은 먹고살 길이 없다. 그래서 관리가 퇴임한 뒤에도 사실상 수조권은 계속 보장된다. 이런 관행이 자리 잡으면서 그 토지의 수조권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애초에 녹봉으로 받은 토지가 사실상 그 가문의 소유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화폐경제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관리들에게는 월급봉투 대신 토지를 주었다. 그러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은 왕(국가)에게 두고서 수조권만 준 데서 모든 폐단이 비롯된다.
신라에서 고려로 이행할 때 중국에서는 당?송 교체기였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할 때 중국에서는 원?명 교체기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거란을 멀리하라고 가르친 훈요십조는 고려왕조가 실은 새우의 처지임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찍이 진시황은 원교근공 遠交近攻(멀리 있는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한다)이라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대륙 통일을 이룬 바 있었지만, 그것은 주체가 힘과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나 쓰는 전략이다. 바깥으로 내세울 것 없고 안으로 취약한 고려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요를 적대시하고 먼 송에 사대하려 한 모순된 대외 정책은 결국 한반도에 피바람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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