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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세트] 그린빌에서 만나요 (총4권/완결)
유시진 / 서울미디어코믹스 / 2015년 5월
평점 :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꼽을 수 있는 만화 가운데 하나인 유시진님의 <그린빌에서 만나요>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새해 기분이 새로운 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섭섭해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새로운 일들은 일어나니까요.
그러니, 준비하세요. 모든 새로운 것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화 스터디에서 발표할 계획을 세우느라 들춰 본 시점과 딱 맞는 말이 적혀 있었다. 가을에도 새로운 일이 일어날까?
주인공은 도윤이. 플루트를 전공하고 있는 우울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다. 우울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도 않고. 새로운 것이라곤 익숙하지 않은 도윤이의 아래층에 이름이 ‘사이비’와 ‘사이언’인 남매가 이사 온다. 고양이를 협동해서 구조한 것을 계기로 이 셋은 친해진다. 친해진다는 것의 의미는 여러가지겠지만, 이들은 우선 서로를 조금씩 편하게 대하기 시작하고, 같이 밥을 만들어 먹고, 고양이와 함께 놀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도윤이는 혼자서만 가지고 있던 자신의 트라우마에 관한 여러 생각과 관련된 질문들을 이 남매와 묻고 답하기 시작한다.
질문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확장되고,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주인공 도윤이는 관심이 없지만) 도윤이를 친구로서 좋아하는 친구 한수. 그리고 도윤이를 찍고 싶어 하는 영화부의 바다. 인간관계는 어느 하나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게 없다. 예상하지도 못한 친구의 말에 잊고 있었던 트라우마가 끌어올려지기도 하고, 그 트라우마를 더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도윤 자신이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이 만화를 구성하는 대사의 반에 가까운 분량이 주인공 도윤의 독백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도윤의 대화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과 나누는 대화는 거울처럼 기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타인과 나누는 대화는 그럴 수가 없어서, 도윤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자꾸만 새로운 사실을 깨우쳐 간다. 감정 때문에 자기 자신 외에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기. 도윤이와 이언 형이 나누는 대화를 잠깐 보면 이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나 하는 게 와 닿고, 새삼스럽게 타인과 나의 삶 또한 그만큼이나 다르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
"글쎄, 원치 않아서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라면-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까? 그렇지만... 그래도 불안한걸."
"왜?"
"왜냐면 그 기억들이,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잖아? 그런데 나는 기억 못하고 있는 거고. 막막하고 갑갑해진다구. 나를 이루고 있는 입자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보기가 너무 힘들다는 그런 기분이 들어서. 뭔가 거기에...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내가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것들이 말이야."
"음...내 생각에는 말이야. 기억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야. 그 기억들이 지금의 너를 이루고 있는 요소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건 지금 여기 있는 너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여기 존재하는 이 순간의 너에게 제대로 집중할 수 있다면-너는 아무 것도 놓치는 게 아니야."
"...정말 그럴까? 정말로?"
"응."
"...형은? 이 순간에 집중하면서 살아?"
"하하. 응. 나는 현재밖에 없는 사람이야."
왜 어떤 사람은 기록 광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중요한 일을 기록해 두지 않고 물 흐르듯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도윤이가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기억을 찾아내고 과거를 수집하려고 하는 전자의 사람에 가깝다면, 도윤이와 친해지게 되는 이비와 이언은 현재만을 사는 사람이다. 전자의 삶을 살 때 우울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은 건 사실이다. 일례로 나 자신을 들고 싶다. 나도 도윤이처럼 뭔가 소중한 걸 놓치지 않았을까, 어떨 때 갑자기 불안이 몰려오고는 하는데 과연 이 이유는 뭘까, 갑갑해 하면서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미처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 만화는 전자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후자로 바꿀 것을 요청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 다른 삶을 비교해 보며 뻗어나갈 수 있는 생각의 여러 갈래들을 시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다.
[이언 형이 그런 말을 했지. 형하고 이비 누나에겐 현재밖에 없다고. 그런 식으로 살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거야.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겠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말이야.
지금 이 순간을 잡아 놓을 수 있다면, 보관해 놓을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순간이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린 미래 어느 시점에 꺼내 볼 수 있다면
그것도 멋지지 않을까, 생각해.
왜냐면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사랑스러우니까.
미래의 지금이 될 그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더라도
또한 이 순간이 소중하다고 지금 느끼니까.]
도윤이는 현재밖에 살고 있지 않은 이비와 이언 틈 속에서도 이렇게 이 순간을 잡아놓고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도윤이 소중한 시간을 남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 기저에는 소중하게 보낸 시간이 적었다는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이혼해서 같이 살지 않는 도윤의 어머니는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도윤은 그런 무관심한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애정을 요청해봤자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요청 전부터 낙담했다. 도윤은 어머니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플루트를 잘 불게 되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열심히 연습했지만, 어머니는 플루트에 관심이 있었던 거지 자신이 부는 플루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낙담은 더욱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 이후로 플루트를 관두고, 어머니와는 더 이상 같이 살지 않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도윤은 정적이 가득한 집에서의 삶의 축으로 플루트를 다시 선택한다. 어쩌면 이 플루트를 계속 불다 보면 어머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다.
도윤은 그렇게 다시 플루트를 분다. 불면서 플루트 자체,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플루트가 만들어내는 음악을 공유하면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게 된다. 즐거운 일은 즐거운 일일 뿐, 처음 이 플루트를 시작한 동기라거나 앞으로도 계속 이 플루트를 불게 해주는 원동력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플루트를 재미있게 불고 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 뼘 한 뼘 눈에 보이게 성장해 나간다.
바다는 그런 도윤이를 찍는다. 자신을 자꾸자꾸 묻고 싶어 하고,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다시 한 번 돌이켜 기억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도윤이를.
"내가 찍고 싶은 건...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움직임. 소소한 것들. 처음으로 생각해보고, 깨닫고, 뭔가 느끼는 현장.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 작고 사소해도 절실한 것들. 그런 재료들을 모아서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정리하고 다듬어주는 게 내가 하고 싶은 방식이야.“
이런 것들을 찍고 싶어 하는 바다와 도윤은 도윤의 이야기로 구성된 몇 장면의 다큐를 찍는다. 처음에는 캠코더에 대고 얘기하는,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기분으로 얘기해 나가던 도윤이는 어느 시점부터는 자신이 캠코더 뒤의 바다에 대고 얘기하고 있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관계는 친구라는 사실도.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기대에 가득 차 다가오다가 사실은 도윤에게 아무것도 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멀어져 가는 게 두려워서 도윤은 일부러 방어 대책을 세우듯 모두를 무신경하게 대해왔다. 그렇지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친구가 어느새 되어 있다는 사실에 도윤은 놀란다.
도윤이 처음으로 아주 사랑했던 이비와 이언은 (도윤이는 정체를 모르지만, 그리고 만화 내에서도 확실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지만) 인간은 아니다. 이비는 인간의 시력을 먹고 살고, 이언은 인간의 미각을 먹고 산다. 그들이 노렸던 도윤이가 점차 성장해가고 서로 사랑하며 보내는 날들 속에서 그들은 도윤이의 시각이나 미각을 빼앗고 싶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먹지 않아서 점차 투명해져가는 나날들 가운데서 그들은 도윤이에게 작별인사와 함께 사랑한다는 말을 해줘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도윤이는 그들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당황한다. 인간은 왜 사랑한다는 말을 말로써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기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는데 사랑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지 겁먹기도 한다. 그래서 친구 바다의 소통 방식대로 도윤은 비디오를 녹화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그들에게 전하기로 결심한다.
[내 입으로 말을 하는 것... 전하려고 하는 것... 그 부분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몰라. 응. 전해야 할 거야. 당신들이 듣고 싶어 하니까. 내 마음을. 오고 가는 것이 기본일 테니까. 그게 소통이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걸. 내 사랑이 사랑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불안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건 내 한계 내에서 사랑이 맞는 거고... 나름대로 내 안에서는 가장 빛나는 것이니까...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녹음한 도윤의 비디오테이프는 이비와 이언 집 우편함에 넣어지고, 벌써 그들이 이사를 갔다는 걸 확인한 도윤은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찾지만 벌써 뜯겨져 있다. 세상에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만큼 그들이 자신의 비디오테이프를 확인해 주었을 것이라고 도윤은 근거 없이 확신한다. 또한 그들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기로 하고,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를 믿을 만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남는다는 걸 알게 된다. 이 비디오테이프는 돌고 돌아 만화의 시작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막 이사 온 이언과 이비는 주어 없이 사랑한다는 고백이 담긴 도윤의 비디오테이프를 우편함에서 발견한다.
모든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납득 가능한 말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 거고. 이 만화 속에서 상상되는 ‘소통을 도와주는 외계인들’이 정말 이들의 사랑고백을 연결해 주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의 사랑, 조건부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점차 조건 없이 마음을 나누고,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만큼 커가는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과정은 정말 아름답고 행복했다. 이들이 기억날 때마다, 이들이 어디선가 행복하고 있기를 빌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