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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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소설, 영화, 그리고 거짓말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소설을 먼저 볼지 영화를 먼저 볼지 정답이 없는 고민에 휩싸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소설의 내용이 어려우면 영화를 먼저 본다는 것이다. 인물과 배경 이미지가 선명해지면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대부분 소설을 영화보다 먼저 보는 편이다. 영화가 소설의 내용을 일부 재현하는 데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톤먼트>는 어떨까. 이언 맥큐언의 소설 속죄를 영화화한 <어톤먼트>는 조 라이트 감독의 작품이다. 조 라이트 감독은 <오만과 편견>으로 데뷔하여 두 번째 작품인 <어톤먼트>로 골든글로브 드라마부분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뒤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솔로이스트>, 소설 원작인 <안나 카레니나>를 그만의 감성으로 풀어냈으며, 2015년 현재 피터 팬의 시작을 그린 <>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문학, 특히 고전문학과 궁합이 좋은 감독으로 비친다. 그러니 영화가 원작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접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속죄는 어떨까. 스토리는 단순하다. 심지어 책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1부에서는 결말을 예고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은 꾸준히 넘어간다. ‘어떻게에 해당하는 단서를 감질나게 던져주니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문체는 약간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해낸 장점이 더 크다.


결국 나는 소설을 먼저 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만약 지금 누가 어느 쪽을 먼저 봐야 할지 묻는다면 영화를 먼저 보라고 하겠다. 소설이 낫다 영화가 낫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전부 <어톤먼트>의 거짓말 때문이다.


<어톤먼트>속죄의 스토리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영화는 시간의 제약이 있는 데다 재감상이 어렵기 때문에 소설과는 다른 연출이 필요한데, 소설의 섬세한 이야기에서 큰 줄기를 걸러 세련된 영상으로 담아낸 솜씨가 매우 훌륭했다. 특히 세실리아의 마지막은 속죄라는 주제와 걸맞는 상징성을 보여주었다. 다만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는 소설을 비틀었다


(스포일러 삭제)


영화만 본다면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로써 브리오니는 속죄하고 관객 또한 그녀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미 책을 보았다면 그 기쁨은 진실이 깎여나간 대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거짓말 속에 거짓말, 또 거짓말 속에 거짓말이 존재한다. 그 가장 바깥쪽에 <어톤먼트>가 있다. 그러니 가장 많은 거짓말을 내포한 <어톤먼트>를 먼저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속죄와 용서는 짝을 이룬다. 용서받지 않으면 속죄 또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용서할 사람이 사라진 브리오니는 평생 속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이만하면 됐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않고 죄책감을 59년간 이어나갔다는 건 이미 또 하나의 진실을 이룬다. 그 진실이 소설을 단순한 거짓말로 만들지 않는다.


로비가 누볐던 전쟁터, 1차 세계대전에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었다

누가 이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누구의 탓인지를 밝히려 들겠는가? 어느 누구도 지금 이곳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므로 전체적인 정황도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누구를 용서해야 할지 누구에게 속죄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브리오니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을 먼저 보나 영화를 먼저 보나 큰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볼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죄<어톤먼트>를 볼 누군가가 더 좋은 선택을 하도록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진실은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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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1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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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길들여진 새는 날 수 있는가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은 세계 3대 관현악단이다. 수석지휘자를 단원들의 투표로 선발하는 민주적인 전통이 유명한 반면, 지나친 보수성으로 페미니스트들의 지탄을 받아왔다. 1982년 수석지휘자였던 카라얀이 첫 여성 연주자로 채용한 자비네 마이어는 734의 투표 결과로 임명이 취소된 바 있다. 하프 파트 외에 여성 연주자가 정단원이 된 건 2000년에 이르러서였다.


마리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과학자다. 방사능의 발견으로 1927년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지만,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끝내 그녀를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학은 비밀스럽게 여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847년 샬롯 브론테는 남성 필명으로 제인 에어를 발표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프랜시스 버냇의 소공녀를 비롯하여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등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감성 소설이 차례차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여성이 쓰는 소설은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를 위한 도덕적 교훈 안에서 주로 생존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20세기에 들어서야 재평가되었으며, 프랑켄슈타인의 저자로만 알려진 메리 셸리의 정치적 입장을 작품 속에서 찾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은 소녀문학이 번성하기 시작한 1868년에 작은 아씨들을 발표했다. 에세이와 스릴러 장르를 거쳐 오다가 소녀문학에 이르러 큰 성공을 거둔 루이자는 다시 성인용 작품으로 회귀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루이자가 상업성과 타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돈과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기 위해 여성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우 드물었다. 여성 작가들의 고뇌와 갈등은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 중 조를 통해 잘 드러난다.


소설을 팔아 자립의 기쁨을 알지만, 상업적인 통속소설에 매진했다가, 반성하고 예술성을 추구하기까지 조는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그 시기에 조는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었다. 병아리 예술가였다. 에이미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기는 사람은 비웃음만 당할 뿐이라고 말하자 조가 대답한다

비웃음에 굴하지 않는 혁명가들이 없다면 이 세상은 결코 잘 돌아가지 못할걸. 너는 오래된 세상에 묻혀 있고 난 새 세상을 갈망하니까 생각이 다를 수밖에. 넌 가장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 난 가장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살 테니.(2102p)


그러나 결혼 적령기를 넘기면서 조는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을 향해 눈을 돌린다

예전에 조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뭔가 굉장한 일을 하고 싶다고 자주 말했는데, 지금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부모님이 주신 행복만큼 자신도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려고 애쓰면서 부모님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2311p) 

그리고 현실을 바라본다

노처녀, 이게 미래의 나야. 펜을 배우자로 삼고 자식들 대신 글을 가족으로 삼아 앞으로 이십 년 동안 약간의 명성을 얻겠지.(2318p) 

결국 조는 바에르 교수와 결혼하고, 예술가가 아닌 교육자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조는 실패한 걸까. 현실 앞에서 타협해버린 걸까. 가부장제 사회에 길들여지고 만 걸까.


그러기에는 조의 행동이 파격적이다. 조는 바에르 학원에 장애인과 혼혈아까지 받아들인다. 작은 아씨들의 시대 배경인 1863년은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직후이지만, 인종차별은 그대로 남아 있어 혼혈아를 받아들인 학교는 문을 닫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는 혁명가처럼 그 일을 해치운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에 조는 말한다

좋은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때를 기다릴 거야. 이 모든 경험과 모습들이 내 글에 녹아들 날이 오겠지.(2391p)


새를 키우는 주인들은 애완조의 안전을 위해 윙 트리밍을 한다. 윙 트리밍이란, 애완조의 속 날개깃털을 잘라 멀리, 오래, 높이 날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윙 트리밍을 하면 새장 밖으로 나와 산책할 수 있지만, 윙 트리밍을 하지 않으면 새장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조는 여성성이라는 윙 트리밍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시대에 갇힌 여성들이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작은 아씨들의 저자인 루이자 메이 올컷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과는 달리 조는 바에르 교수와 결혼한다. 바에르 교수는 연인이자 아버지의 모습을 두루 갖춘 데다 흔치 않은 여성의 조력자였다.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남성상이기에 저자는 그 인물에게 가난과 나이라는 굴레를 얹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아씨들에서 체제에 순응한 교훈성을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저자의 지성과 유머는 선한 사람들이 미소 지으며 기꺼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섬세하게 그려낸 소녀들의 고민과 성장담은 현재에도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뿐만 아니라 개성적인 인물들이 한데 모여 벌이는 일은 모험소설 못지않게 흥미롭다. 사랑해야 할 딸들이 그 안에 모두 있으니 감히 그 매력을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덕분에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작은 아씨들에 숨어 있는 새로운 생각들을 불편함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베스의 여성적인 희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러주거나, 조에게 불행한 결혼을 하느니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충고하거나, 매기와 존에게 평등한 부부 역할을 강조하거나, 독신 여성을 비웃지 말라고 당부하는 부분들이 그러하다. 만약 작은 아씨들이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면, 그 말들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었을까. 때로는 전복보다 조화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견고한 가부장제의 벽은 현대에 와서도 유리천장처럼 곳곳에서 발견된다. 윙 트리밍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행복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마치가의 딸들은 한 차례 탐색과 저항 뒤에 진정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따뜻한 가정으로, 평온한 죽음으로, 진실된 후원으로, 개혁적인 교육으로 실현되었다.


빠른 길이 어렵다면 돌아가면 된다. 짧은 날갯짓일지언정 새장 밖을 맛본 새에게 새장 안은 답답하기 마련이다. 꿈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새장 밖 세상은 서서히 넓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땐 그랬지라고 웃으며 회고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작은 아씨들을 웃으며 읽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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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 2015-10-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글이네요. 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울림이 남을 듯합니다. 작가와 작품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푸릇푸릇 2015-10-18 22:59   좋아요 0 | URL
느낌 한 조각 공유해 주시니 제가 감사합니다. 저도 예전과 다르게 <작은 아씨들>을 보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닥터 지바고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9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박형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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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던 한숨처럼

 

 

1917, 군의로 일하다 부상당한 지바고는 병원에서 간호원이 된 라리사와 재회한다. 멜류제예보에서 지바고는 라리사에게 말한다.

혁명이, 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던 한숨처럼, 의지와는 관계없이 터졌죠. 모든 이가 소생하고 재생했으며 모두가 전환점을 맞아 변하게 됐죠.


1905년 철도파업이 일어났을 때 지바고와 라리사는 아직 유라와 라라로 불리는 학생이었다. 빠벨, 또냐, 니까, 미샤도 학생이었다. 그보다 어린 아이도 있었다. 빠벨과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유수쁘까, 즉 갈리울린이었다.


철도파업을 공모한 찌베르진은 비열한 세계를 미워했다

지나치게 먹고 살이 찐 마나님이 노동자들을 오만하게 얕보며, 이러한 부류들의 희생물이 되어 술고래가 된 사람들이 기껏 자신의 동료들이나 괴롭혀서 쾌감을 느끼는 비열함과 허위의 세계

그런 세계를 바꾸기 위해 파업을 공모했으며 파업은 곧 혁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터져 나온 한숨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멜류제예보에서 라리사는 갈리울린을 알아보고 깜짝 놀란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이건 <어린아이들이 총을 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이 자라서 모두가 병사로 이곳에 있고, 모든 평범한 국민이 그 아파트와 그와 똑같은 마을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라리사는 빨치산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지바고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인,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들의 세대가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에요.


어쩌면 전쟁을 겪지 않았다면 내전은 그처럼 격렬하게 흘러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혁명이 시작되는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전쟁은 어린아이를 싸울 줄 아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그리고 혁명은 싸울 줄 아는 어른에게 명분을 주었다. 그들은 적과 백으로 갈라져 적백내전을 시작한다. 전쟁처럼 한쪽을 끝장내는 살육전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빠벨은 적군이었고, 갈리울린은 백군이었다. 이념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은 가치를 잃었다.


라라는 이어서 말한다.

주된 불행은, 그러니까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악의 근원이 된 것은, 개인 의견의 가치를 믿지 않게 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이제 스스로의 도덕 감각에 쫓아 행동하는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맞추어 함께 노래 불러야 한다. 외부에서 억지로 떠맡긴 관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진 거예요.


커다란 물살에 휩쓸릴 때는 그 물살이 해일인지, 소용돌이인지, 파도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라라는 시대의 물결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그 정체를 올곧은 눈으로 직시한다. 그것은 줄곧 지바고가 키워왔으나 누구에게도 공감 받지 못한 개성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다. 영혼의 짝을 만난 지바고는 쏟아내듯 시를 쓴다.

예술이란 늘 미에 봉사하고, 미는 형식에서 오는 기쁨이고, 형식이란,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이것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유기체적 생명의 열쇠이며, 따라서 비극까지 포함한 모든 예술 작품은 존재의 기쁨을 표현한다고 하는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나 지바고와 라리사의 행복은 짧았다. 혁명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지만, 혁명은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혁명은 다시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제 그 아이들은 지바고의 시에 열광한다. 또 다른 한숨을 담아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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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이야기 - <연어>, 그 두번째 이야기
안도현 지음, 유기훈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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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견디는 저 연어들처럼


1997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12월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복권으로 석방되었다. 2001년에는 911 테러가 있었고, 2003년에는 대구 지하철 참사가 벌어졌다. 2009년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이 발생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 달 뒤 천안함이 침몰했고, 다시 한 달 뒤 연어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그래서일까. 안도현의 연어 이야기는 사뭇 조심스럽다.


폭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외치며 연어 떼를 이끌던 은빛연어와 달리 은빛연어를 닮은 자식은 종내 벽을 뛰어넘으려고만 한 걸 후회한다. 대신 바다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연어 떼는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던 초록강은 이제 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한다.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는 사랑을 이루고 앵둣빛 알이 꿈꿀 미래로서 북태평양을 그렸지만, 그 자식들은 죽음으로 이별하고 험난한 현실로서의 북태평양으로 뛰어든다.


노인과 청년의 시각차라고 이해해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거기에 시대적 흐름을 더해 본다. 과거 억압의 시대에는 저항의 대상이 분명했기에 두드려 부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통제의 시대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학교로, 학교에서 자라는 연어들은 비록 몸집은 커졌을지언정 꿈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학교를 원망하거나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한다. 통제의 시대에는 저항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며드는 것을 선택한다. 절망하여 포기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강물의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병들어버린 사회를 살아가기 버겁더라도 제 안의 강물 냄새를 끊임없이 기억한다. 강물의 냄새를 잊지 않아야 비로소 그것은 숙명이 된다. 북태평양을 떠나 강물을 다 거슬러 올라야 겨우 다다를 수 있기에 한 차례 저지르는 행동보다 꿋꿋이 견디는 의지가 더 중요해진다. 연어에서 폭포를 올라가는 행동이 조명되었지만, 연어 이야기에서는 거친 바다를 견디는 삶이 조명된 이유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 강물의 원류는 동일하다.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저자에게 고맙다.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보아주어서. 단순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한차례 뭇매를 맞은 뒤에도 꿋꿋이 지켜낸 믿음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은 계속되는 사건사고에 지치신 듯하지만 또 한번 그만의 시각으로 희망을 노래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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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어른을 위한 동화 2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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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의 냄새를 기억하는 저 연어들처럼

 

연어, 라는 말 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


연어가 강에서 보내는 시간은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의 십 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은빛 몸체가 펄떡거리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풍경이 떠오른다.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을 흥얼거리기라도 하면 그 풍경은 생생하게 뇌리에 와 박힌다. 그러니 과학적으로는 틀릴 말일지언정 문학적으로는 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연어에게 강물은 태어난 곳, 고향을 의미한다. 성장해 바다로 떠난 연어는 강물의 냄새를 기억하고 돌아와 삶을 마치기 전에 알을 낳는다. 따라서 고향은 과거인 동시에 미래이기도 하다. 연어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과거를 현재와 엮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현재를 미래와 엮는다. 다시 태어난 연어는 부모가 한 일을 되풀이하지만, 어제의 강물이 오늘의 강물과 다르듯이 연어의 삶 또한 항상 같지 않다. 부모가 어떤 길을 걸었는가에 따라 자녀의 운명이 바뀐다. 그러니 연어에게 강물이란 고향이자 숙명이다. 강물의 냄새를 기억하는 건 제 본성을 간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아무리 바다에서 오래 지내더라도 연어의 코끝에는 언제나 강물 냄새가 묻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안도현의 연어는 어떤 냄새가 날까.


물론 강물 냄새일 것이다. 다만 그 강물은 인간사회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의 과거를 역사라 부르기에 1996년 당시 상황을 살펴보았다.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한 데 이어 1995년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다. 1996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했고, 연어가 출간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민주화 운동과 전쟁이 있었다. 자유, 라는 말을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억압의 시대에 사람들은 연어 떼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다. 구시대가 무너지고 새 시대를 맞이하듯이 연어의 결말은 매우 희망적이다.


연어에게 강물이 고향이며 미래이자 숙명이듯이, 연어에게 강물은 인간의 본성이고 의지이며 희망이다. 그래서 고맙다.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보아주어서. 문학은 동시대의 삶을 그려내며, 특히 고전은 인간의 본질을 담기에 시대를 견딘다. 그렇다면 연어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게 아닐까.


연어라는 책 속에는 강물 냄새가 난다. 향긋한 사람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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