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뻔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믿고 싶어지는 말이 있다. 우리 사랑은 영원할 거야, 난 죽을 때까지 너만 바라볼 거야,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여…. 최소한 그런 말을 하는 순간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참으로 지키기 힘든 달콤한 거짓말이 바로 사랑의 약속 아니겠는가. 산도르 마라이는 평생 한 남자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한 여자의 거짓말 같은 사랑을 놀랍게도, 우울하거나 절망적이지 않은 말들로 그려 놓았다. 차라리 유쾌하기까지 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순수함을 잃어버렸다. 그의 숨결은 페스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에스터는 라요스를 사랑했다. 그것도 그가 떠나 버린 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줄곧. 왜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 언니와 결혼해 버린 것일까? 물어 보고 또 물어 보면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표를 가슴에 안고. 자기 거짓말에 도취해 울음까지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라요스의 매력에 끌려 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의아해하면서.

라요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는 갚지 않았고, 거짓말로 에스터의 어머니를 설득해 집을 저당잡히게 했으며, 모든 신뢰가 무너졌다고 생각한 마지막 순간에도 챙길 것은 다 챙겨 떠났다. 그러고는 이십 년이 지난 뒤 돌아와, 이제는 자신과 빌마 사이의 딸 에파를 위해 집을 내놓으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에스터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이렇게 불행해졌으니 보상하라고 말하면서.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에스터의 태도였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에스터라는 여인은 사는 동안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용서하는 쪽이,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을.

이 세상이 연극이라면, 누구라도 그 연극에서 주인공을 맡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드물게는 아예 처음부터 조용히 조연에 만족하면서 주인공의 그늘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자기가 맡은 역할, 그러니까 희생하고 농락당하면서도 끝까지 주인공을 위해 연극의 흐름을 해치지 않은 채 살다 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에스터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라요스는 이 세상이 연극이라고 소리치면서 주인공인 양 행세할 수 있었고, 결국은 모든 것을 챙겨서 떠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은 이 난봉꾼을 에스터는 완전히 용서해 버렸다.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 역시 결국은 어린아이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라요스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면이 없지는 않지’하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산도르 마라이의 필력 아니겠는가.

이십 년만에 찾아와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운전사에게 줄 잔돈이 없으니 어서 돈을 달라는 말이었을 때, 하루 낮 하룻밤을 온통 휘젓고 떠나면서 집 안의 잼이란 잼은 다 들고 가 버린 것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른다. 악인이 지니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인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책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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