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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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에게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의 시간은, 요란하게 윙윙거리는 자동차 엔진룸 속에서 고요히 닳아가는 타이밍벨트 같은 것이었다. 배다른 동생과 그 아이의 엄마 그리고 생부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이면, 그는 자신이 아직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해야 했다. -18쪽

아이는 비단 은성에게만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골고루 무심했다. 혜성에게도, 아빠에게도, 심지어 제 엄마에게조차 우유를 넣은 딸기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유지 앞에서 아빠와 새엄마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짝사랑에 빠진 얼간이처럼 굴었고, 그것은 은성에게 비밀스런 통쾌함을 안겨 주었다. -35쪽

인생에는 한들한들 부는 산들바람에 몸뚱이를 맡겨도 되는 시간이 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삶이란 조금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기차에서 시속 오십 킬로미터의 속도를 견디는 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55쪽

하지만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였다. 짱깨가 아닌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그것이 폭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었다. -158쪽

언니오빠오하 나이차이가 왜 많이 나는지, 오빠는 왜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지, 가끔 찾아오는 언니는 왜 자신을 향해 심술궂은 미소 한 번 보내지 않는지 그동안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가냘픈 물음표들이 꼿꼿이 몸을 세우고 아이를 노려보았다. -163쪽

서로의 영혼을 샅샅이 읽어 낼 의무가 없는 관계가 옥영의 숨통을 터주었다. 언제까지 좁은 야채칸에 꼭 붙어서 뭉그러져 가는 애기감자 두 알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31쪽

대한민국 곳곳의 하천과 호수, 바다에서는 연평균 천 구가 넘는 표류사체가 발견된다. -4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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