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으레히 떠올린다. 따뜻한 저녁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아빠, 엄마, 아이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는 장면. 바로 이런 장면. 하지만 이것은 판타지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결혼 후 남편의 암투병으로 저자 자신과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다. 저자는 스스로 가족에서 개인인 나를 분리하고 ‘나’와 사회를 성찰하는 탐구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정상 가족과 그렇지 않으면 낙인찍어 비정상 가족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의 편견을 깨뜨린다. 사회의 기본 구성으로서 가족을 인정하지만 우리라는 집단에서 벗어나 나와 너라는 개인이 개인으로서 바로 설 때 그것의 연대로서, 공동체로서의 가족도 의미있다는 것이다.
아픈 환자나 장애인이 구성원으로 있는 가족도 비정상. 아이를 낳지 않고 부부로만 구성된 가족도 비정상. 입양한 가족도 비정상. 1인 가구도 비정상. 이혼을 하여 부 또는 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도 비정상. 이렇게 생각하면 정상인 가족이 더 소수일 것이다.
가족구성원 하나가 높은 지위에 오르면 다른 가족 구성원의 지위도 암묵적으로 향상되는 현상, 아버지가 공적인 일을 하면서 특정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 자녀나 아내도 거의 그런 사람으로 취급받는 현상과 관련 있다. 거꾸로 자식이 출세하고 성공하면 부모가 떵떵거리고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부모 당사자든 그 주위 사람이든 자식의 지위를 부모의 지위와 동일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속한 집단과 역할에 따라 나 자신을 다르게 느끼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 몇 년 사이 ‘갑질’이라는 용어가 뉴스에 많이 등장했다. 한국은 엄연히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활동하는 시스템’을 채택했지만, 그 시스템 기준에 따르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 모양뿐이다. 어느 기업가의 자녀나 부인의 행태라든지, 공관병을 자신의 하수인처럼 부리는 모습 등이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 소개를 할 때 어떤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성격이나 취미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직업을 말한다. 그 직업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나이를 묻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상하의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가족은 화목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환상의 역설. 화목한 가족이란 환상이 클수록 그 가족은 서로에게 환장할 가족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각박해지고, 경쟁이 심해질수록 가족 안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이 그렇게 배타적으로 자신의 가족만을 특별하게 여길 경우 가족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추락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 가족, 우리 아들, 우리 딸 이라고 하는 말들에 대해서.
박나래는 코미디를 하면서 아무리 망가지고 우스운 모습이 돼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개그우먼 박나래일 뿐, 인간 박나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미디를 하는 박나래는 그녀의 다른 많은 모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상한 분장으로 우스운 모습을 보여도, 심지어 사람들을 웃기는데 실패해도 인간으로서 ‘나’가 실패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종종 이야기한다. 나는 가면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여러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여러 모습 전체가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여러 책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자존감을 어떻게 형성하고, 갖고 있느냐가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 같다.
공동체에서는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다.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도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너무 공동체를 강조하다 보니 그룹에 속하지 않거나 개인적인 의견을 발표해도 이기주의자라는 평을 듣는다. 저자는 연대라고 하는 것도 우선 공동체에서 개인을 분리해 너와 나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서도 개인에 대한 린치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로 보기 때문에 해결이 요원하다. 저출산의 문제나 비혼 등도 개인주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며 동거, 미혼 부모, 입양에 대한 인식 개선이 그 출발이다. 양보와 배려의 첫 번째 대상은 나 자신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공중 도덕을 지키는 것은 첫 번째 나를 위해서다. 그 부수적 효과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개인이 고립된 개인을 뜻하지 않는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영위하는 자립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렇게 개인 바로 설 때 공동체, 가족도 바람직한 모습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