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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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강모래를 흩날리는 바람 속에도 감정을 실어놓았다. 잘려나간 팔의 단면에서 悲哀를 느낄 수 있다. 고단한 여인의 살에서 나는 단내에서 처절함이 풍긴다. 석곽을 덮는 돌덮개를 덮는 병사의 심장은 돌처럼 굳어 있다. 늙은 야로의 안광에서 쇠의 종말이 내보인다. 그리고 가야의 금 열두 줄을 넘나드는 우륵의 손마디에서 悲歌의 가락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화려한 수사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지 않게 극도로 절제하려는 안간힘이 묻어 있다. 이러한 극도의 절제와 감정의 전이는 상대적으로 서사를 약하게 만들었다. 서사를 약하게 만든 것인지 상대적인 부각을 위해 서사를 약화시켰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서사의 약화로 인해 흔히 역사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박진감은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면 당대의 미문이라 찬사를 받는 작가의 취약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미문 속의 약한 서사라... 작가의 바로 전 장편 『칼의 노래』 역시 이러한 아쉬움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문장이 극도로 절제된 건조체라는 부언과 주인공이 화자라는 시점의 특징으로 인해 이는 작가의 의도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두번째 장편 『현의 노래』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작가의 취약점이 아닐까 슬며시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이는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고, 나는 아직 이를 확신할 만한 자신이 없다.

하지만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서사일 필요는 없다. 서사 일관도로 쓰여진,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여러 대하역사소설은 그 분량을 반으로 줄이고 인간의 감정을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이 없고 사실만 있는 역사소설은 푸석푸석하기 그지없다.

美文을 사용한 감정 이입은 이 소설의 最大 美德이다. 소리를 언어로 재현해 내려는 노력이 제자리를 못 찾고 떠도는 수많은 言語를 만들어내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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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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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적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투는 舜臣의 바깥이 아니라 그 내면에서 더 치열했다. 주적을 비롯한 다수의 적들이 주위에서 순신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 적들은 곧 오늘날 나의 적들이기도 하다. 지원군이 그러했고, 조정이 그러했다. 결국은 백성조차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른다. 이 적들은 칼로 베어질 수 없는 대상이기에 결국 순신은 스스로 자신의 전부를 다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순신에게 타협하지 않는 것은 온 세상을 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순신은 마지막 해전에서 모든 적들을 향해 一字陣으로 맞섰다.

역사소설에서 역동적인 이야기 전개가 아니라 내면의 갈등을 소재로 삼은 것은 이례적이다. 그것은 재미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을 모두 다 잡는 것은 괘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독백체가 이 소설의 미덕이다. 당시의 사건 속에 몸을 담고 있던 인간의 내면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까다롭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순신이 아니라 그 당시로 시간 이동을 해 간 읽는 ‘나’일 수가 있게 된다. 나는 순신이 되어 당시의 전황과 그가 처했던 상황을 보고, 듣고 느낀다. 그렇기에 역동적이지 않아서 밋밋하기만 한 이 소설을 끝까지 잡을 수 있었다.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은 상징과 비유가 가득한 수사적인 문장인 데 비해, 사실과 전투 장면을 서술하는 부분은 건조하기만 하다. 이는 작가가 말했듯 순신의 글투와 순신의 외향적인 성향을 미루어 그에 따라 의도한 장치인 듯하다. 허나 순신의 내면에서는 얼마나 복잡한 격랑이 몰아쳤겠는가. 격랑을 언어로 표현한 김훈의 글은 빼어나다.  

책머리에 쓴 글이 또한 좋다. 두 권을 읽는 동안 책머리에 쓴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모두 버리고 一字陣을 택한 작가의 절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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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허경진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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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보고서다. 출판사는 이 책을 평전으로 분류해놓았고, 책표지의 분위기도 소대헌, 호연재 두 부부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로 잡아놓은 듯하다. 그래서 두 부부의 역사적 삶을 고증하여 일생을 흥미롭게 재구성해놓았겠거니 기대했다. 그런데 실제 글은 기대이하다.

다루는 범주는 혼인, 살림, 식구, 일상, 교육, 안살림, 놀이, 관직, 문학생뢀 등 일생의 모든 분야를 두루 거치고 있다. 하지만 그 알맹이는 소대헌 송요화 고택에 내려오는 유물들을 정리하여 취합한 것의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

소대헌·호연재 부부의 한평생을 통해 17-18세기 사대부의 생활을 짐작하는 게 아니라, 송씨 가문에 내려오는 유물들을 설명하여 사대부의 생활을 설명하고 있다. 즉, 소대헌·호연재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유물 제공자일 뿐이다.

이 가문에는 300년 넘게 기록된 일기도 있고, 선조들의 편지 묶음인 《선세언독》도 있고, 호연재의 문집도 여러 권 전해오고, 《덕은가승》이라는 책도 있다. 그 유명한 《동춘당일기》도 있다. 일상을 알 수 있는 이러한 사료들이라면 허구적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살림에 관해서는 고택의 구조와 가구를 설명하고, 식구에 관해서는 ‘호구단자’와 ‘호패’를 분석하며, 일상에 관해서는 기록물과 계모임, 농사와 상거래에 대한 양반들의 일반적인 태도에 대해 설명하였다. 교육에 관해서는 《천자문》의 원리와 읽기, 쓰기에 양반 자제들이 교재로 삼은 것을 말하였고, 안살림에 관해서는 술 빚는 방법과 술 먹고 쓴 호연재의 시를 소개했으며, 놀이에 관해서는 종류와 방법을, 관직에 관해서는 급제, 면신례, 인수인계에 관해 설명하였다.

소단락을 지나치게 많이 끊은 감이 있다 싶었다. 그러나 그로인해 이러한 글을 부드럽고 흥미 있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겠다. 편집에 공을 들였으나 글이 가진 기본적인 한계를 깰 수는 없었다. 표지가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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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제페, 사로잡힌 남자 이야기
이시이 신지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우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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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가슴은 차가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은 차가운 가슴을 덥히기 위해 밖에서 뜨거운 것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게 아닐까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하나에 몰두하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꼼지락거린다.

사로잡힌다는 말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어린왕자의 친구인 여우가 말하는 ‘길들여짐’이나, 한용운이 노래하는 ‘복종’과 비슷한 말인 듯싶다.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말은 내가 온전히 그것과 같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무언가에 길들여지고 결국 복종하게 되는 일. 내가 진정으로 바라서 하게 되는 복종이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도 많고 신경써야 할 일도 많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에 사로잡혀 지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염려해야 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바보나 하는 짓거리임에 틀림없겠지만, 나는 차라리 그런 바보가 되고 싶다. 하지만 바보가 되기엔 나는 너무 걱정이 많다.

사로잡힌 남자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마지막에는 결국 한 사람에게 사로잡힐 것이라고 예견은 했다. 또한 실용서로 각인된 일본서에 대한 불신 때문에 혹시나 하는 염려는 했다. 하지만 꽤나 ‘쿨’했다. 여러 일본서에서 그들의 편집증적인 특성을 발견하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로잡힌다는 것도 편집증에 가깝지만, 이 책은 약간 거리가 있다. 작가는 아랫단계의 편집증에서 한 단계 뛰어넘어 사로잡힘의 행복을 보여주고 있다. 고개를 외로 약간 틀고 보면 급박하고 기능을 따지는 이 시대에 대한 냉소, 혹은 충고로 보이기도 한다.

아, 나도 무언가에 사로잡히고 싶다. 설사 차가운 가슴을 덥히기 위해 끝없이 뜨거운 것을 찾아 헤맬지라도 지치지 말고. 결국 아주 뜨거운 것에 사로잡혀서 이 가슴 타버릴지라도. 바보가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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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우울한 걸까?
김혜남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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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우울에 빠진 날_ 어느새 스스로 우울증이 있다고 인정해 버렸다. 혹시나 우울증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도, 아닐 거라고 부인했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유는 되지 않는다. 우울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 그것은 우울에 대해 쉽게 잘 설명하고 있는 이 책에서도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다. 우울은 나의 것_ 인간에게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인이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성장 속도도 느리고 육체적인 한계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동물에 대해 열등감을 느껴 그것이 우울로 발전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이보다 더 우울할 순 없다_ 우울의 주된 요인인 한계는 스스로의 한계일 수도 있고, 타자와의 한계일 수도 있고, 사회와의 한계일 수도 있다. 이상이 너무 높거나 뻔한 일이 되지 않을 때, 혹은 혼자 떨어져 외로움을 느낄 때 스스로의 한계로 말미암아 우울해진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지만 나는 점점 뒤쳐질 때 우울해진다. 살리에르의 우울과 절망. 사회는 점점 빨리 변하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하려 하며, 그 속도와 트랜드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무가치함으로 낙인 찍는다. 밀어 올리면 또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구덩이 밖으로 밀어 올리는 허망한 시지프스의 삶. 우리는 모두 시지프스가 가진 본원적인 우울을 지니고 있다.

우울은 미친 짓이다_ 신이 지배하던 암흑기에는 우울을 감히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신의 따사로운 은총 안에서 우울해지는 것은 죄악이었으니까. 현대 사회에서도 우울한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재빨리 돌아가는 사회에서 우울해져 있을 틈이 없다. 자기계발류, 경제경영류의 책과 조력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우울하다는 것은 쓸데없이 딴생각에 빠져 있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위를 보라. 가장 중요한 가치는 확장과 돈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감사자들이 있지 않은가?

재밌는 우울_ '내부의 공허함을 외부의 충격으로 메우려는가.' 권태와 우울의 관계를 설명한 멋진 말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죄다 권태롭다. '뭔가 재미있는 일 좀 없을까'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닌다. 머릿속은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고, 만날 사람이 너무나 많은데도 권태롭다. 하지만 권태는 바쁘거나 한가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이 텅 빈 듯이 쓸쓸하니 권태로울밖에. 그렇다고 외부의 충격이 없애줄 수 있을까? 회충약이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외부의 충격도 점점 강해지면 모를까.

우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_ 우울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본성을 자꾸만 멀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내 안의 우울을 인정하고, 가만히 응시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한계와 본성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더 이상은 괴로워지지 않고, 바닥에 다다를 때까지, 그리고 다시 차오를 때를 기다릴 수가 있다. 이상이 너무 멀리 있으면 내 다리가 짧다거나 내 팔이 길지 않음을 한탄하며 우울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버릴 수 있다. 평범함을 두려워하지 말자. 뛰어나지 않아도, 남들과 똑같이 살더라도 나름대로의 의미와 즐거움은 곳곳에 있다. 또한 우울도 곳곳에 숨어 있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애써 피하려들지도 말자. '아무리 피하려 애써도 곳곳에 복병은 숨어 있다.'

… 이상은 자기 최면이었다.

우울한 시인의 사회_ 이 책은 정신과전문의가 쓴 심리에세이다. 심리에 대해서 이토록 쉽고 잘 설명한 글을 본 적이 없다. 추천사에 나와 있듯 쉬운 글 속에 심리학의 전문적인 내용이 잘 녹아들어 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큼 사람의 마음을 꼭 집어내는 부분도 많다. 우울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와 같은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한계와 소외에만 그 책임이 있는 거라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자기 최면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가 몰고 가는 아우토반과 같은 속도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치와 점점 무감각하게 만드는 마취에 따르는 우울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스스로를 개조해 페르소나라도 만들어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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