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달라이 라마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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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故 김광석은 사람들과 헤어질 때 곧잘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행복하세요.” 행복해진다는 일, 우리들의 지상목표가 아닐까. 한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극도로 행복한 순간, 즉 쾌락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행, 불쾌감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나친 행복을 없애면 불행에 대한 상대적인 두려운 느낌도 약해져 이른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기분이 한껏 들뜨지 않고, 나락에 빠지지도 않게 하여 고른 기분 상태를 유지하는 게 행복에 이르는 첫 단계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행복과 불행을 도식화해서 깎고 보태어 평균화한다는 게 억지긴 하다.

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행복에 이르는 첫 단계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게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라고 한 달라이 라마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안에 긍정, 친절, 만족 등의 밝은 이미지를 키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수행을 해야 한다. 마음의 수행을 통해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버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키워야 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인정의 과정이기도 하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장애는 더 이상 불행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은 곧,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즈음에 이르면 늘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세상은 과연 긍정적인가? 스스로는 친절하고 만족스럽게 살려고 하지만, 과연 이 사회는 친절하고 만족스럽게 살도록 내버려두는가? 모든 것에 만족하려 한다면 진실을 외면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주변 환경의 틀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라는 말이 아닐까? 아직도 이 물음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다.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빼앗긴 나라의 지도자로서 달라이 라마가 그래도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할 때 행복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행복해도 되는 걸까?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는 있겠다.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의 차이, 즉 버려져 있던, 기름진 땅과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렸을 때의 차이. 그것은 곧 생명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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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우울한 걸까?
김혜남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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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돼지가 우울에 빠진 날_ 어느새 스스로 우울증이 있다고 인정해 버렸다. 혹시나 우울증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도, 아닐 거라고 부인했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유는 되지 않는다. 우울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 그것은 우울에 대해 쉽게 잘 설명하고 있는 이 책에서도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다. 우울은 나의 것_ 인간에게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인이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성장 속도도 느리고 육체적인 한계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동물에 대해 열등감을 느껴 그것이 우울로 발전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이보다 더 우울할 순 없다_ 우울의 주된 요인인 한계는 스스로의 한계일 수도 있고, 타자와의 한계일 수도 있고, 사회와의 한계일 수도 있다. 이상이 너무 높거나 뻔한 일이 되지 않을 때, 혹은 혼자 떨어져 외로움을 느낄 때 스스로의 한계로 말미암아 우울해진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지만 나는 점점 뒤쳐질 때 우울해진다. 살리에르의 우울과 절망. 사회는 점점 빨리 변하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하려 하며, 그 속도와 트랜드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무가치함으로 낙인 찍는다. 밀어 올리면 또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구덩이 밖으로 밀어 올리는 허망한 시지프스의 삶. 우리는 모두 시지프스가 가진 본원적인 우울을 지니고 있다.

우울은 미친 짓이다_ 신이 지배하던 암흑기에는 우울을 감히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신의 따사로운 은총 안에서 우울해지는 것은 죄악이었으니까. 현대 사회에서도 우울한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재빨리 돌아가는 사회에서 우울해져 있을 틈이 없다. 자기계발류, 경제경영류의 책과 조력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우울하다는 것은 쓸데없이 딴생각에 빠져 있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위를 보라. 가장 중요한 가치는 확장과 돈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감사자들이 있지 않은가?

재밌는 우울_ '내부의 공허함을 외부의 충격으로 메우려는가.' 권태와 우울의 관계를 설명한 멋진 말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죄다 권태롭다. '뭔가 재미있는 일 좀 없을까'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닌다. 머릿속은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고, 만날 사람이 너무나 많은데도 권태롭다. 하지만 권태는 바쁘거나 한가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이 텅 빈 듯이 쓸쓸하니 권태로울밖에. 그렇다고 외부의 충격이 없애줄 수 있을까? 회충약이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외부의 충격도 점점 강해지면 모를까.

우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_ 우울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본성을 자꾸만 멀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내 안의 우울을 인정하고, 가만히 응시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한계와 본성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더 이상은 괴로워지지 않고, 바닥에 다다를 때까지, 그리고 다시 차오를 때를 기다릴 수가 있다. 이상이 너무 멀리 있으면 내 다리가 짧다거나 내 팔이 길지 않음을 한탄하며 우울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버릴 수 있다. 평범함을 두려워하지 말자. 뛰어나지 않아도, 남들과 똑같이 살더라도 나름대로의 의미와 즐거움은 곳곳에 있다. 또한 우울도 곳곳에 숨어 있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애써 피하려들지도 말자. '아무리 피하려 애써도 곳곳에 복병은 숨어 있다.'

… 이상은 자기 최면이었다.

우울한 시인의 사회_ 이 책은 정신과전문의가 쓴 심리에세이다. 심리에 대해서 이토록 쉽고 잘 설명한 글을 본 적이 없다. 추천사에 나와 있듯 쉬운 글 속에 심리학의 전문적인 내용이 잘 녹아들어 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큼 사람의 마음을 꼭 집어내는 부분도 많다. 우울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와 같은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한계와 소외에만 그 책임이 있는 거라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자기 최면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가 몰고 가는 아우토반과 같은 속도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치와 점점 무감각하게 만드는 마취에 따르는 우울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스스로를 개조해 페르소나라도 만들어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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