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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98년에 발표한 김영하의 단편 「비상구」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갑자기 덮친 짭새들을 피해 창문으로 도망친다. 이 지붕 저 지붕을 타넘으며 도망간다. 다행히 타넘을 지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도망치면서 뇌까린다. ‘니미 씨팔’
비상구를 통해 도망친 그에게 타넘을 지붕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숨을 곳은 없다. 그래서 ‘니미 시팔’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초감각적인 욕지거리에서부터 눈살 찌푸려지는 세세한 묘사까지. 그러나 독자 자신에게 돌아오면 그 모든 것은 자신과 그리 멀리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 이내 허탈해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오빠가 돌아왔다』에 실린 단편들은, 해설을 보고서야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여전히 이 시대의 갑갑한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왜곡에 직면한 여러 인간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들을 자본으로 환원해서 가치를 매기는 자본의 시대. 이 시대에 뒤섞여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도 하고, 순응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열정’에 따라 외곬이 되기도 한다. 순응한 이들은 철저히 ‘냉소’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이게 아니라며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결국 일상으로의 복귀다. ‘비상구’는 없는 것이다.
과연 비상구는 없는 걸까.
벌써 그 메시지를 거의 잊어버린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 다시 떠올랐다.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비상구는 밖으로의 탈출이 아니라 내면으로의 탈출일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면 이 세계의 부조리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뜻일까. 그럼 어디로? 썩는 내가 나는 쓰레기더미 한가운데서 제 몸에 썩는 내가 풍기지 않으면서 더미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 결국은 그나마 깨끗한 쪽으로 발걸음을 조심스레 디디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타협이다. 다른 이들을 규합하여 쓰레기더미를 뒤집어버리자거나, 그 악취 속에서 먹을 것을 찾으려 박 터지게 싸우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타협이란 말은 꽤나 매력적으로 들린다. 인간이 돈으로 가치 전환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냔 말이다. ‘니미 씨팔’
해설 가운데 - 김태환
소설 전체를 관류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상이한 태도 사이의 긴장이다 단순화시켜 표현하면 열정과 냉소 사이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열정과 냉소의 문제를 가치의 대체(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자본주의 사회의 콘텍스트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자본주의의 발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가치가 설 자리를 점점 더 줄여놓는다. … 냉소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현실을 배경으로 성립한다. 냉소주의는 신념과 믿음, 사랑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 가치의 매수가능성을 가정한다. 반면 열정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역행하는 경향을 띤다. 다시 말해 열정이란 자본주의에도 불구하고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신봉하거나 가치파괴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사
주인이 신경쓰지 않아도 모든 것을 감쪽같이 옮겨준다는 ‘포장이사’는 소중한 가치를 파괴하고 인간을 허무와 무의미의 구렁 속에 빠뜨리는 끔찍하고 불안한 악몽으로 묘사된다. 작가가 이사에서 그러한 상징성을 발견한 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 요인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내밀한 가치가 깃들여 있는 공간을 상업적 공략의 대상으로 삼는 포장이사업체의 광고전단지(“이사는 저희에게 맡기고 여행이나 다녀오세요”)와 그것을 생활의 편리함 정도로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태도.
너를 사랑하고도
의원은 보좌관을 모명하고, 보좌관은 인숙을 모멸하며, 인숙은 영수를 모멸한다. 모멸감은 자기 자신의 가치, 혹은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가 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임이 드러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러면 모멸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어진 삶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들은 털어놓아야 할 뭔가가 있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에겐 누군가의 영혼에 어둠을 드리울 그 무언가가 없었다.” “털어놓아야 할 뭔가”가 곧 열정이라면, “나”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곧 열정의 부재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열정이 없기 때문에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열정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점에서 2차적인 의미에서의 열정, 즉 열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빠가 돌아왔다
자본주의 가치파괴적 현실 속에서 가족은 소박하나마 개개인에게 가치와 의미를 보장해주는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만나고 교류하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은 부부가 상대방에 대해 유일한 사랑이 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 제도의 현실은 이러한 이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족의 유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약화되었으며,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결합이라는 측면이 훨씬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겨혼은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 김영하는 십대 소녀의 거친 언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의 가족은 경선의 가족과 얼마나 다른가?
크리스마스 캐럴
욕망이 속성이 아니라 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개체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열정적 인간은 개체에 고착된 사랑을 굳게 믿고, 냉소적 인간은 그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코웃음 친다. 그 외에 이 두 입장 사이서 어정쩡한 절충을 한 채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너의 의미
이 소설의 핵심은 이처럼 냉소적인 남자가 사랑에 빠진 여자의 환상을 도저히 깰 수 없다는 데 있다. 영화감독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조윤숙은 자기 멋대로 미화시킨 그의 이미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여자의 태도가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김영하 소설의 다른 열정적 인물들이 가치와의미의 파괴와 부정을 체험하면서 체념과 상실감에 빠진다면, 조윤숙은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환상세계 속에서 자신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보물선
이형식은 ‘너의 의미’의 조윤숙보다 훨씬 더 심한 정도로 비현실적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이데올로기적 가치는 현실과의 단절을 통해 지탱된다. 고정불변의 가치, 대체불가능한 특별한 가치에 대한 열정은 가치파괴적인 현실의 압박을 피해 현실과의 관련을 포기한 채 망령처럼 이 사회를 떠돌아다닌다. 진지한 열정은 이제 그런 망상 속에서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일까?
마지막 손님
김영하의 소설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허무적 인식이 깔려 있다. 어떤 희망도 그러한 암울한 전망 속에 묻혀버린다. ‘마지막 손님’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환호성이 깊은 정적에 묻혀버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