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3
...쇼셜 케이지는 국가와 독립적으로, 국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국가의 힘이 사회에 닿기 전에,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오래전부터 만들어졌다. 그것은 가족과 부족의 생산과 재생산 메커니즘에서 유래한다.
p85
그렇다면 나의 엑시트 옵션을 증대시킬 방법은 두 가지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지금 직장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셋을 최대한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나 혼자 책 많이 읽어 지식의 양을 늘리고, 토익 점수 올리고, 자격증 몇 개 더 따서 되는 일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신은 벼농사 체제의 소셜 케이지에 갇혀 있다. 내가 속해 있는 협업 네트워크에 의해 '인증'되어야 한다. 내 동료와 상사, 후배가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이 '인증'과 '인정'이 6개월 만에 만들어질까? 직종과 산업과 사업체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3~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스킬셋이 무르익고 그것이 내 동료들, 내 동료들이 뛰고 있는 필드의 다른 조직의 플레이어들에게까지 '입소문'이 나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당신의 키맨(상사)이 부정부패 연루자라거나 하는 윤리적 문제가 없다면 그에게 3년을 투자해보라.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스킬셋과 노하우, 사회적 네트워크를 당신에게 전수해주기 시작할 것이다.
p115
하지만 소수의 안정을 극대화한 나머지, 다수가 극도로 불안정한 조직으로 사회가 구성되고 전자에 모든 혜택과 자원이 집중된 사회보다는, 모두가 어느 정도의 불안정을 감내하면서 적당한 안정을 향유하고, 담음을 향해 잠깐의 리스크를 다 함계 받아들이는 사회가 더 낫다. 모두가 더 많은 엑시트 옵션을 가질 수 있는 사회로 가자는 이야기다(시중이나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쓰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절된 노동시장보다 다 같이 중규직이 되는 노동시장으로 이행하자는 이야기다.).
p120
사회 내에 엑시트 옵션이 많으면, 이주가 늘어날까 줄어들까? 밖으로 더 빠져나가지 않을까? 반대다.
첫째, 직장을 더 잘 얻고 더 잘 잃는 사회에서는 들어오는 이가 늘고 나가는 이는 줄어든다. 더 많은 기회가 있기 때문에, 기회가 적은 사회에서 많은 사회로 더 큰 가능성과 더 높은 연봉을 찾아 각 분야의 인재들 및 숙련 노동자들이 몰려든다. 둘재, 엑시트 옵션이 많은 사회는 산업의 혁신 수준이 높고 교체 과정이 빨라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 일자리를 보고 더 많은 인재가 주위의 덜 혁신적인 경제에서 빠져나와 유입된다. 이는 다시 혁신을 가속화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이 지속된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 경제가 그러했다.
오히려 엑시트 옵션이 부족한 사회에서 인력이, 인재가 빠져나간다. 엑시트 옵션이 부족한 사회는 비슷한 일자리들끼리 더 좋은 인력을 끌어오기 위한 스카우트 전쟁이 적기 때문에 연봉 협상의 관행도 드물다(주는 연봉 그냥 받는다). 엑시트 옵션이 부족한 사회는 젊고 야망 있는 청년들에게 젊은 시절에는 낮은 임금을 감내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오래 머물 수 있는 직장, 그중에서도 가장 연봉 상승률이 높은(호봉급 상승률이 높거나 특별 상여금 액수가 높은) 직장을 찾아 입직 경쟁이 벌어진다. 엑시트 옵션이 없으므로 들어갈 때 잘 들어가야 생애 소득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중간에 더 좋은 직장으로 바꾸기 힘드니, 들어갈 때 가장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이 벌어진다. 경직된 노동시장의 비극이다.
p139
시장 저변에서 벌어지는 '문송합니다'의 흐름 속에서 사회과학은 인문학과 함게 산업 구조조정과 인구구조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대학 구조조정의 풍파에 휩쓸린 마당이다. 누굴 탓하랴. 나와 그들의 입맛이 바뀐 것을.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구조조정의 압력을 가한다. 압력을 가하는 주체로 토종 재벌, 미 제국주의, 글로벌 총자본, 더 추상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등등이 거론되지만, 시장의 최전선에서 이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 내 입맛이다.
p149
인공지능의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는 목소리도 크지만, 그것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혜택 또한 가시화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케 한 심층 학습 기술은 인간 사회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비약적 기술 발전의 혜택 또한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화재 감시 기술, 금융거래의 사기 감지 기술, 해양 생물 및 생태계 오염 감지 기술, SNS상의 인권침해 감지 기술, 범죄 예방 및 탐지 기술 등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개발되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p176
네트워크 위계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 첫번째 수행성 판단 기준은, 얼마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와 자원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가이다. 두번째 수행성 판단 기준은, 끌어온(혹은 끌어올) 자원을 자신의 수하들을 이용해 프로젝트로 전환하고 실행하는 능력이다. 이는 관료제의 위계 구조를 활용해 수하들이 자신을 따르고 프로젝트의 성공에 투신하도록 만드는 능력으로, 일이 돌아가도록 하급자들을 '냉철하게' 어르고 위협하고 닦달하며 구슬리는 역할이다.
p181
...기술과 지식이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시대에, 기술을 업데이트하는 데 실패한 혹은 뒤처진 리더십이 네트워크 위계의 상층을 장악하는 경우, 시장의 현황과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조직의 역량과 방향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분석이 결여된 채, 시류에 영합하는 의사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시류조차 읽지 못해, 뛰어난 하급자들의 미래를 책임져줄 성과마저 외면하게 된다(2024년,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 최상층부에서 그러한 오판의 리더십을 목격하였다).
또한, 조직 자원과 자산은 보유했지만 인공지능 기반 지식 자원을 보유하지 못한 중장년층과 그와 반대 상황인 청년 층 사이에 극심한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바로 자산계급 대지식계급의 불일치가 증대하며 발생하는 세대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노동시장에서 가장 극심하게 벌어질 것이다. 기존의 조직 자원을 보유한 기성세대는 정년 연장을 통해 조직 자원에 대한 점유 기간을 늘리려 시도할 것이고(그렇게 하고 있고), 청년 세대는 기성세대가 점유한 조직에 진입하ㅕ고 투쟁하는 자들과 외부에서 새로운 목초지를 개발하는 자들로 이분화될 것이다. 기성세대가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혹은 기성 정당, 국가 관료제) 연공제 조직에 진입하여 장기적으로 조직을 접수(?) 하는 전략과 기다리지 않고(그들의 생명줄 연장에 기여하지 않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는 길을 택한 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시간만이 알 것이다.
p190
다음으로, 기업 내에서 범용 인공지능의 사용과 기업 특수 지식/ 기술이 충돌하는 일을 조정해야 할 것이다. 범용 인공지능의 사용을 막지 않되 기업 특수 지식/ 기술의 유출을 막을 방도를 마련해야 하고, 나아가 그 둘의 발전이 상호 보완적으로 병진할 수 있도록 그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을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었는지 모른다. 막느냐 마느냐, 쓰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잘 쓸지, 어떻게 함게 잘 살지를 고민할 단계다. 벼농사 체제의 협업 시스템은 인공지능을 장착한 채로,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p248
벼농사 체제의 노동시장은 상층에 각종 혜택을 집중시킨다. 노조로 조직화되어 특권화된 대기업 정규직은 상층 10퍼센트를 신분화하여 진입 장벽을 만든다. 각종 전문직 자격증과 학력, 부모의 연줄과 문화 자본으로 참호와 해자를 파, 여타 계층의 자유로운 진. 출입을 제한한다. 전통적으로 이 직종, 직군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으나, 2010년 중반 이후 여성들이 남성들 못지 않은 경쟁력으로 절반 가까운 자리를 점유하기 시작했다(이철승.2019)
벼농사 체제의 노동시장은 내부 노동시장을 발달시킨다. 기업 간 이동을 제한하고, 기업 내 이동과 경쟁을 북돋눈다. 기업 내에서 승진 경쟁을 통해 커리어 사다리를 기어오르도록 개별 직원을 채근하며, 기업 특수 기술 전수와 개발을 통해 인적 자본을 축적시킨다. 이러한 기업 내 승진 및 기술 전수 시스템 또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으나, 하위 직군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상층 이동 투쟁이 가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1980년대 중. 후반 출생세대부터 이 경향은 취업 여성들의 출산율 저하와 맞물렸다. 나의 미래와 내 잠재적 자식이 경쟁할 대, 나의 미래가 먼저다. 그래야 잠재적인 자식이 하나라도 태어날 때 그 아이의 경쟁력도 보장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