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6 

...정말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를 외면할 수 없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고. 701호에서의 시간이 간절한 요즘, 나는 캄캄한 방 안 저 먼 곳에서 덜컹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p43 

...어떤 무대에서는, 주어진 역할을 소화하는 것과 주위를 만족시키는 일이 나란히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고 서로 동떨어진 일이 될 수 있었다. 한 편의 극 안에서 일정한 장면이 계속되면 보통 일정한 설정으로 받아들여지듯이, 목소리들은 곧, 악의 없이 반복되는 덤덤한 일상이 되었다.

p47

 누나는 원하지 않았던 길에서도 여기까지 온 거니까. 좋아하는 일은 분명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p71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나에게도, 니노 같은 상태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사람에 대한 시선은 늘 집 밖을 향해 있었다. 그의 이미지는 너른 오차 범위 안에서 시시각각 변했지만 대화의 스텝을 잘 조율하면서 책을 좋아하는 모습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핵심 요소였다.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고, 책을 즐겨 읽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늘 그런 사람을 그렸다. 수없이 들어왔던, 대학에 가면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안된다는 금기의 말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듣는 자에게는 자유의 말이 되었기에 나는 손꼽아 대학 생활을 기다렸다. 입학을 하고 금기의 봉인 해제를 기다리던 그 순간, 스르륵,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장은 앞머리를 바꾸었다. '고시에 붙으면'으로. 시치미를 뚝 뗀 얼굴에 황당함을 피력해보아도 문장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지만 금기 역시 예상치 못한 부분은 있었다. 앞머리가 어찌 되었든 마음 속 해방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p81

...짜증을 내자고 들면 건수는 얼마든지 있었고 약점을 잡자고 들면 취약하거나 허술한 구석은 어디에나 있었다. 가족은 일상을 배경으로 묶여있는 존재였으므로.

p82 

...그녀는 매일 매일 집으로 돌아왔다. 생에 집착이 없는 사람이 하루하루 긴 생을 살아내는 것처럼.

p115 

...올레 코스에는 저마다 난이도가 붙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상'코스를 내딛을 때는 다잡은 마음만큼 걸음이 힘들지 않았고 반대로 '하'코스를 걸을 때에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실감에 자꾸만 발이 무거워졌다. 상중하의 코스(5,6,7,10 코스)를 모두 접하는 동안 올레길은 내게 직접 두 발로 걸어보기 전까지는 누군가 매겨 놓은 정도를 꼭 스스로의 척도로 삼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전하고 있었다.

p193

 ...<해리포터> 속 네 개의 반 중에서, 나 또한 언제나 주인공들이 속해 있는 그리핀도르가 제일이라 여겨왔지만, B반에 속해 있는 탓인지 평등이나 관용 같은 후플루프의 이념에 언제나 마음이 기었다. 용기나 지성, 야망보다도.(각각 그리핀도르, 래번클로, 슬리데린의 이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곳에도 모두의 마법 지팡이는 없었고, 판례를 접할수록 법은 동등함과 거리가 있어 보였다. 법이 관용을 잃고 차별적으로 운용될 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고 잔학한 폭력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p228

 ...반작이는 눈으로 조근조근 단어를 고르고 상대의 침묵에도 가만히 행간을 헤아리는 이들 편에 서고 싶다고. 내가 저편으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저분들이 앉아 있는 환한 세상에 함께이고 싶다고. 낭독회가 끝나고 유일하게 열려있는 김밥천국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야근을 하면서 나는 그날의 무대를 계속 생각했다.

p265

 휘어져 있던 시간을 짚어보며, 늘 강 건너 저편을 향하던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이번에도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머뭇거리며 서성이던 동경의 마음과. 비록 주어진 길일지라도 조금씩 정을 붙여가며 나름대로 좋아해보려 애쓰던 마음. 좋아하는 마음과 좋아하려 하는 마음 사이에서 좌우로 흔들리던 청춘의 시간들과, 눈싸움을 멈추고 눈사람을 만들게 된 이야기를 이렇게 당신께 털어놓을 수 있어서. 지금, 마음이 얼마나 깜빡이고 있는지. 그 신호가 당신의 눈가에 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스르르륵 아름답게 스칠 수도 있을텐데.

p266

...문을 닫고 눈이 없는 집 안에 머무를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대신 굴려 갔다. 눈을 궁글리지 않으면 손에 냉기가 닿을 일도 없을 테니. 나는 그저 조용히, 눈사람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다 저만치 두었던 눈사람을 오랜만에 찾아가면 여전히 녹지 않은 둥그런 자태가 슬프도록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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