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4 

...이번 그림은 그가 완전히 그 의미를 파악해서 칭찬받을 정도로 묘사해 낸 것이 아니라, 무심하고 수수께끼 같은 자연 존재와 현상으로부터 한순간 유리 같은 표면을 꿰뚫고 거칠게 숨 쉬는 현실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

p31

 ...어떤 좋지 못한 일을 했을 때는 곧 자신도 그걸 알고 부끄러워하거든요, 그런데 야단을 맞게 되면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더 줄어든다고요. 어떤 때에는 전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이따금 야단을 맞는단 말이에요. 단지 누가 불렀는데 얼른 달려가지 않았다든가,아니면 마침 화가 나 있기 때문에 말이에요.

p74

 알베르트는 줄곧 잘 교육 받은 젊은이로서의 역할을 해나갔다. 다시 말해 혹고한 견해를 품고 잇지만,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착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견해는 마음속에 겸허히 간직하고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역할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이 성격에 맞지 않아서 자기 자신조차 금방 극도로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아버지를 무시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이 일어날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다.

p108

 ...아델레 부인은 약간 늙어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살며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 눈빛은 야무졌고 입술은 약간 메말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뿌리를 뽑히지 않았고, 나름의 분위기 속에 당당히 서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녀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녀는 도가 지나치지 않았고, 지나치게 충동적인 애정을 베풀 줄 도 몰랐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지난 날 요구하고 희망했던 모든 것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는 고향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 성품, 그녀가 기거하는 공간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방식과 특성이 있었다. 아이들이 고맙게도 성장하고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 이러한 바탕 위에서였다.

p122

 야릇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지만, 무릇 인간의 운명보다 더 야릇하거나 서글프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제어하는 이 예술가는 심오한 진실을 통해서, 그야말로 가차 없이 맑은 정신 집중을 통해야만 일할 수 있었다. 그런 예술가의 작업실에는 일시적인 기분이라든지 불안감 따위는 결코 자리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가는 삶에 있어서는 아마추어였고, 행복을 찾는 데에는 실패한 사람이었다. 실패작으로 끝나 버린 그림은 거의 없는 그였지만, 실패로 끝난 무수한 세월, 추구했던 삶과 사랑이 실패로 끝났다는 어두운 짐에 눌려 늘 괴로워했다.

 그런 부분이 ㄱ의 의식까지 파고들지는 못햇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의 삶을 눈앞에 또렷이 펼쳐 보려는 욕구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는 괴로워했고, 그 괴로움에 대해 분노와 체념 속에서 저항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방치하고,ㅇ ㅗ로지 작업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그의 끈질긴 성품은 삶 속에서 풍요와 깊이와 온기를 잃은 대신, 예술의 경지에서 그만큼 더 ㅍㅇ요롭고 깊고 따뜻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예술에 대한 의지와 무모한 근면 속에 틀어박힌 마법사처럼, 외롭지만 용감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본성은 건강하고 고집스러웟다. 그래서 존재의 비참함을 들여다보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p126

 ...현재로서는 부지런하고 예의도 바르기 때문에 쓸데없이 간섭하거나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입대하겠다는군요. 더 두고 봐야겠지만요.

p139

...아이들에게 부모와 조상의 천성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섞인다는 게 말이에요.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란 누구나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전 생애를 결정짓는 모든 것을 이미 내부에 지니고 있어서, 절대로 그것에 거슬리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나 살인자의 기질을 지닌 사람은 그가 어떻게 해도 결국은 범죄자가 된다는 거예요. 정말 무서운 일이예요....

...하지만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악한 기질을 불려받고도 얼마든지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단다. 또 그런 부분은 과학이 규명할 수 없는 일이란다. 훌륭한 교육과 선한 의지는 어떤 유전보다 더 확실하다고 생각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예절 바른지는 우리도 알 수 있고, 또 배울 수도 있지.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근거해야만 하는 거야. 조상의 비밀스러운 유산 가운데 어떤 천성을 물려받았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그런 걸 너무 따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 알베르트의 본성은 어머니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사실 옳다고 본능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위험한 논제가 그것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음을 느꼈다...

p167

 ...당신은 제게 자유를 주려 하고 있어요. 제가 갖고 있었고, 또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해요. 하지만 동시에 제게 책임도 주었어요. 나의 자유로움을 빼앗는 책임 말이에요! 그 점에 대해 제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당신도 그런 결심을 한 시간 만에 뚝딱 한 것은 아닐 테니 제게도 시간을 좀 줘야겠죠.

p180

 ...그가 그녀에게 여행 계획을 알렸다는 것, 그녀가 그의 말을 우선 침착하게 들어 주었고, 어떤 반대 의사도 내비치지 않았다는 것, 그의 결정과 실행 사이에는 어떠한 샛길이나 탈출구가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가까운 미래가 너무나 분며앟게 그의 앞에 놓여 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그를 기쁘게 햇다. 그래서 그는 마음에 안정을 찾았고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p218

...여기 앉아 통곡하면서 나의 불쌍한 아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겠어. 그런 뒤에도 내가 살아 남는다면, 이제 무엇도 나를 속박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무엇도 나를 괴롭힐 수 없으리라. 그때에는 난 이곳을 떠나리라. 평생 더 이상의 거짓말은 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며, 더는 방관하거나 비겁하지 않으리라....그때는 다만 삶, 행위, 향상만을 생각하고, 안식과 타성은 내게서는 다시는 없으리라.

p246

 그는 비에 젖은 길을 천천히 거닐며 자신의 삶의 실타래를 거꾸로 추적해서 확실하게 풀어 보려고 햇다. 그 단순한 직물을 그는 결코 명료하고 만족스럽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이 삶의 길을 맹목적으로 걸어왔다는 사실이 분명했지만 분노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온갖 시도를 하고 꺼질 줄 모르는 동경을 품어왓으면서도 인생의 정원을 지나쳐 버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는 평생토록 하나의 사랑을 지난 며칠처럼 그 밑바닥까지 체험한 적도, 맛본 적도 없었다. 그때 그는 비록 때늦은 감은 있었지만, 죽어 가는 아들의 침대 곁에서 단 한 번의 참된 사랑을 체험했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었고,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체험이자 보잘것 없는 작은 보물로서, 영원히 그의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 그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그는 예술을 단 한번도 지금처럼 확실하게 느껴 보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밖에서 서성이는 자, 즉 국외자의 위안이었다. 그런 국외자들은 삶 자체를 온전히 자기 족으로 끌어당겨 완전히 마셔 버릴 능력이 부여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었다. 한마디로, 삶 자체를 철저히 자기 것으로 살아 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또 그에게 남은 것은 열정이었다.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과 남모르는 긍지를 가지고 창조하는 것에 대한, 기이하고 냉랭하지만 억제할 길 없는 열정이었다. 그것이 바로 실패로 끝난 그의 삶의 침전물이며 가치였다. 이 현혹되지 않는 고독과 표현하고자 하는 냉엄한 욕구 그리고 옆길로 빠지지 않고 이 별만 따라가는 것이 이제 그의 운명이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과거를 뿌리쳐 떨어낸다고 생각했다. 마치 맞은편 해안에 닿아 쓸모없어진 조각배처럼 말이다. 그의 사련과 인식 속에 체념 따위는 없었다. 의지와 대담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새로운 삶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새로운 삶에는 손으로 더듬거나 망상 소을 헤매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오로지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용기 있게 오르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아마도 그는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보다 더 늦게, 그리고 더 쓰라리게 젊음의 감미로운 황혼과 작별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초라한 신세로 때늦게, 한낮의 광채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귀중한 시간을 단 한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p253

...불행한 결혼 생활은 잘못된 선택의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의 결혼'이란느 문제를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 봄으로써, 예술가나 사상가, 즉 본능에 의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려는 사람에게 과연 결혼 생활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려 한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저의 태도는 이 책 속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앞으로 내 생활이 어떻게 달라지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부분들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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