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
저자는 서문에서 "우리는 의학을 실제보다 더 완벽하며, 동시에 실제보다 덜 특별한 것으로 본다."고 썼다. 이 문장이 바로 해답이다. 의학은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분명히 특별한 것이다. 앞으로도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고 덜 특별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
의학은, 마치 자동차럼 한때는 마술이었다가 '생활필수품'이 된, '좀 특별한 문명'일 뿐이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기도 하고 운전자가 사고를 내기도 하지만 우리가 늘 자동차를 타는 것처럼, 의학은 그런 것이다.
p18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현실 속의 매일매일의 의학, 즉 과학의 단순성이 개별 생명들의 복잡성과 부딪쳤을 때의 바로 그 의학이다. 의학은 오늘날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부분 감추어져 있고, 또 종종 곡해되고 있다. 의학은 보기보다 덜 완벽하며, 동시에 보기보다 더 특별하다.
p27
사람들이 외과의들을 빈정대며 하는 말이 있다. "때로 틀린다. 하지만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말이 내게는 힘으로 느껴졌다. 날마다 외과의들은 불확실한 것들과 대면한다. 정보는 불충분하고, 과학은 모호하고, 자신의 지식과 능력은 결코 완벽하지 못하다. 가장 간단한 수술조차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아니 환자의 생명이 무사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처음 수술대 앞에 섰을 때 나는 이 수술이 환자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모든 과정이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지혈도 잘 되고, 감염이나 장기손상도 없을 것임을 의사가 어떻게 알까 궁금햇었다. 물론, 의사는 모른다. 그래도 그는 가른다.
p33
...일류와 이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들이 쌓은 체계적인 누적 연습량의 차이였다고 한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반복연습을 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인지심리학자이자 수행 전문가인 앤더스 에릭슨은 지속적인 훈련을 하려는 의지가 바탕에 깔려 있을 때 선천적 인자들이 힘을 가장 잘 발휘한다고 적고 있다. 예를 들면 정상의 연주자들은 남들만큼만 연습하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이것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이 일단 은퇴하면 대개 연습을 그만두는 이유이기도 하다.)어쨌든 정상의 연주자들은 남들보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연습에 몰두한다.
p35
나는 아직도 그날 내가 뭘 다르게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중심정맥관은 잘 들어갔다. 연습이라는 건 그런 점에서 요상했다. 몇 날 며칠이고 부분부분, 조각조각만 잡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체가 잡히는 것이다. 의식적 학습이 무의식적 지식이 되기까지 정확하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는 알 수 없다.
p81
...특정 종류의 과실에 대한 연구들 역시 상습범이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병원 환자들을 돌보는 거의 모든 의사들이 매년 중대한 과실을 범하며 심지어 직무태만을 범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의사들은 언론에서 끔찍한 의료사고가 또 났다며 떠들어댈 때도 좀처럼 분개하지 않으며, 대개 보통 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일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나쁜 의사들을 환자들로부터 차단시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느냐 하는 것이다.
의료소송은 매우 비효율적인 방책이다... 소송이 의료사고 발생률을 감소시킨다는 증거는 없다고 지적했다. 공격무기가 부정확한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소송을 제기한 환자들 가운데 실제로 의료진의 부주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극소수였다. 환자들이 승소할 가능성은 대개 결과가 얼마나 나쁘냐에 달려 있었다. 그 결과가 질병으로 인한 것인지 치료상의 불가피한 위험 때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의료소송에서 보다 뿌리 깊은 문제는 과실을 죄악시함으로써 의사들이 과실을 인정하고 공공연하게 논의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법 시스템은 환자와 의사를 적대시키고, 서로 몰아붙여 사건을 심하게 왜곡시킨다. 일이 잘못될 경우 의사가 환자에게 자신의 실수에 대해 정직하게 얘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병원측 변호사들은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환자들에게 이야기해야 하지만 과책사유가 의사 쪽에 있다는 암시는 절대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자백'은 의사의 윤리성에 대해 흑백논리로 밀어붙이는 법정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의사들은 기껏해야 이렇게 말하고 만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 육ㅁ입니다."
.....외과의들은 특히 M&M콘퍼런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외부인 방청을 금하고 비공개로 진행되는 이 회의에서 그들은 자신의 책임 아래 발생한 과실과 불의의 사고 및 사망 사ㅖ를 검토. 비평하고, 책임소재를 가리고, 다음을 위해 개선책을 모색한다.
p88
하지만 자신감 상실보다 더 나쁜 것은 방어적 반응이다. 외과의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 잘못은 잘 보면서 자기 잘못은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어떤 의문이나 두려움도 없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실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도 알지 못한다. 한 외과의는 두려움을 모르는 외과의를 만나는 건 드물지만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고 했다. 그는 "수술할 때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의사는 자기 환자에게 심각한 해를 입히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p104
...어떤 조치가 취해진다 해도 의사들은 때때로 비틀거릴 것이며, 그런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우리에게 요구할 것은 완벽이 아니라 완벽을 향한 중단 없는 노력이어야 할 것이다.
p129
...의학은 뭐든 닥치는 대로 해내는 불굴의 의지를 요한다. 스케줄이 빡빡하건 시간이 지연되건, 아이가 수영연습 끝나고 데리러 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건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할 일은 해내야 한다. 그런데 굿맨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꾸만 실패를 거듭했다.
p144
우리가 어떻게 하든 간에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그 사실은 직시하기 힘들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모든 의사들은 알아야 하지만 아직 익히지 못한 것들이 있고, 판단력이 잘못되거나 약해질 수 있으며, 기질적 힘이 약해져 무너질 수 있다. 지금 나는 이 사람보다 강한가? 더 신뢰할 만한가? 더 양심적인가? 그만큼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조심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어쩌면 날마다 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p175
...이런 연구결과를 만성통 환자들이 꾀병을 부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멜작의 보고가 말해 주듯 신체적 손상에서 발생되지 않은 통증이라고 해서 신체적 손상에서 발생된 통증보다 현실감에서 전혀 덜하지 않으며, 뇌에서는 둘다 똑같다. 만성통에 대한 지각있는 접근법은 신체적인 좌표뿐 아니라 사회적 좌표까지 연구하는 것이다. 만성통의 해결책은 우리 몸안에서 진행되는 것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달려 있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통증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은연중에 끼친 영향 중에서 가장 묘하고도 광범위한 것은 통증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 듯싶다.
p184
연구자들은 이제 우리가 경험하는 운동과 우리가 경험할 것으로 예상한 운동이 서로 모순될 때 멀미가 일어난다는 이론을 확립했다. 양어깨 가운데 머리를 균형잡아 올리고 고관절과 발로 몸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대단히 섬세한 '신체감각'을 요한다. 시간, 근육, 그리고 특히 내이로부터 입력된 신호에 근거해 움직임을 에상하는 시스템을 요하는 것이다. 멀미는 뇌가 예기치 못한 감각 신호를 입력받았을 때 발생한다....
p205
...창피함을 가중시키는 홍조의 효과는 부수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홍조의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사람들은 창피해하는 것을 싫어하고, 창피함을 느낄 때 그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창피감은 도덕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슬픔이나 분노, 사랑의 감정과 달리 창피감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서 비롯되는 창피감은 자신이 일정 경계선을 넘었음을 고통스럽게 알리는 한편, 동시에 남들에게 하는 일종의 사과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도덕적 선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만일 홍조가 그같은 민감성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결국은 그 사람에게 이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246
... "인간으로서 우리는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본인은 그렇다고 생각 안 해도 사실은 그렇거든."
p291
나는 라자로프 씨가 선택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온갖 고통을 다 당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결정을 잘해도 나쁜 결과가 올 수 있고(때때로 사람들은 운이 굉장히 나쁠 때가 있는 것 같다.) 결정을 잘못했는데 결과가 좋게 나올 수도 있다. ("잘하는 것보다 운좋은 게 낫다니까." 외과의들이 곧잘 하는 소리다.) 라자로프 씨가 선택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에 반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나나 어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 원했던 것 말이다. 무엇보다 그가 살고 싶어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살기 위해 어떤 위험도 불사하고자 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하지만 우리가 그에게 설명했듯이 수명 연장은 우리가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짧게 남은 그의 생애 동안 최소한의 하체 기능을 보전할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그의 몸을 심하게 손상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을 높은 위험성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p297
....째깍째깍 시계초침이 한 바퀴를 돌았다. 사려깊고, 자신을 염려해 주며, 게다가 때때로 수도 잘 쓰는 의사 앞에서 결국 의사가 권하는 쪽으로 '선택하지'않는 환자들은 거의 없다.
p301
슈나이더는 감정적으로 좀더 자유로울 수 있는 의사들이 애착과 두려움으로 인한 왜곡 없이 불확실성을 헤치고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의사들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훈련하는 과학적 문화 속에서 일한다. 그들은 '집단 합리성'의 혜택, 즉 학술논문 및 문헌, 현장학습의 직간접적 경험에서 준거를 찾을 수 잇다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유사한 경험이 있다....
......
의사노릇을 잘 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환자노릇도 잘 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믿고 따를 때와 자기 의견을 주장할 때를 현명하게 가려서 해야 한다. 결정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의사들에게 열심히 묻고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