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3  

...평범한 하루하루의 생활이 입을 쩍 벌리고 자기 권리를 요구하며, 내가 품고 돌아온 넘치는 자부심을 삼켜버리는 것을 볼 때에는 화도 났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럴 때면 가끔 뢰지를 머릿속에 그려보았지만, 그러한 세계에서는 안심하고 활동할 수 없다는 시골뜨기 같은 비굴한 생각을 혼자서 느끼며 괴로워했다. 그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이나 도리어 시골에 가서 라틴 말과 모든 희망과 그리고 비참한 고향 생활의 가실 수 없는 우울한 압박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잊어버렷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괴로움에 모든 것을 잊어버렷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괴로움에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듯이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몇 주 동안은 견딜 수 없이 지루했다. 불만과 분열이 엇섞인 절망적인 이 기간 때문에 나는 나의 청춘 전부를 잃어버리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행복스러운 나의 꿈을 이렇게도 빨리 통째로 깨쳐버리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으며 분개했지만, 지금의 나는 현재 고통을 극복하려는 그 무엇이 뜻밖에도 힘차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또한 놀랐다. 인생은 언제나 어두컴컴한 일상생활의 일면을 나에게 보여주었지만, 이제 갑자기 인생은 한없이 깊은 맛을 보이며 불안한 나의 눈앞에 나타나더니 나의 청춘 시절에 평범하면서도 풍부한 경험을 남겨주었다.

p55

...나는 본시부터 소심한 사람은 아닌다. 너무 딱딱하고 거만한 것뿐이다. 그래서 도시의 이러한 흥성대는 생활을 샅샅이 알아보고, 후일 언제인가 거기에 내가 편히 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기에는 누구보다 적합한 남자라는 것을 스스로 의심치 않았다.

 청춘은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빌려 나에게로 가까이 왔다. ...

p62

 ...무엇보다 걷잡을 수 없이 강하고 독특한 본능에 이끌려서 그 주장을 위해서, 또는 반대해서 서로 싸우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사상과 정열의 모든 정력을 사회나 국가나 학문이나 교육법의 모든 실정이나 시설에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외부적인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쌓아 올리며 시간과 영원에 대한 개인적 관계를 밝히려는 요구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같이 생각되었다. 나 자신 역시 이러한 본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어느 정도 혼수상태였다.

 나는 어디까지나 리하르트를 사랑하며, 질투를 느낄 정도였기 때문에 다른 친구를 사귈 겨를이 없었다....

p79 

...나는 그 여자가 열심히 일하는 데서 어떤 비장한 것을 느꼈다. 그 여자는 살기 위해서 싸우는 여성이며, 조용히 참고 나나가는 요감한 여자였다. 그것은 그렇고 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언제나 두고두고 생각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과정은 민요나 군가 같다. 여러 가지 사실이 나타나지만, 마지막 후렴만은 전혀 맞지 않을 때에도 치근치근하게 반복되었다.

p103

 이것이 내가 젊었을 때의 이야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름철의 하룻밤처럼 짧았다. 약간의 음악과 약간의 정신과 약간의 사랑과 약간의 허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름답고 풍족하고 다채로웠으며, 마치 엘로이지스의 축제와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어느 결에 무참히도 꺼지고 말았다. 취리히에서 리하르트는 작별을 했다.

p104

 가혹한 시련을 참고, 별을 따라서 방향을 정하고 새로운 항해에 올라 인생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싸우며 배회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정과 여자의 사랑과 청춘을 믿고 살아왔지만, 이제 그것이 하나씩하나씩 나를 떠나고 말았다. 왜 나는 신을 믿으며, 좀 더 강한 그의 손에 내 몸을 맡기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일생을 두고 어린아이처럼 소심하면서도 한편 꿋꿋한 데가 있었ㄷ. 진정한 생명이 폭풍우처럼 나에게 밀려들며 나를 현명하고 너그럽게 하며, 커다란 날개에 태워 무르익은 행복을 향해서 데려가주려니 하고 나는 언제나 기다렷다.

 그러나 현명하고 경제에 밝은 인생은 아무 말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나를 내버려두었다. 인생은 나에게 별로 폭풍우를 보내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다시 자신을 죽이고 꾹 참으며, 내 고집을 굽히기를 기다렸다. 나로 하여금 거만하고 아는 체하는 희극을 하도록 시키고는 모르는 척 거들떠보지도 않고, 헤매던 아이들이 다시 어머니를 찾기를 기다렸다.

p107

 죽음은 어질고 착한 우리의 형제며, 적당한 때를 알기 때문에 마음놓고 그것을 기다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또한 의외로 깨달았다. 고통과 실망과 근심이 닥쳐 오는 것은, 우리를 불쾌하게 하며 아무 가치도 품위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를 성숙하게 하며, 앞날을 밝혀주기 위한 것임을 나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

 지칠 대로 지치고, 메마르고, 햇볕에 타고, 마음까지 변해서, 두달 후 바젤에 닿았다. 이런 여행은 처음이었으며, 가장 긴 여행이었다...꿈을 따라 걸었지만, 그 꿈은 아직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p116

 자신의 비애와 무능한 생활의 원인을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소용도 없고 그저 피로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자신이 다되고 쓸모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도리어 막연한 어떤 충동에 잠기며, 때만 오면 무슨 깊이가 있고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한 가닥 행복을 차지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러한 때가 언제 올 것인가? 내 속에는 여러 가지 힘이 써보지도 못한 채 도사리고 있지만, 신경질적인 현대파 문사들이 자연스럽지 못한 여러 가지 자극을 받으며 예술적인 활동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을 보면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또 강하고 팽팽한 내 몸속에 어떤 장해나 마귀가 숨어서 내 마음을 침체시키며, 더욱더 괴롭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나는 특수하고, 실패한 인간이며, 이 괴로움은 아무도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고, 동정을 살 수도 없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우울한 기분은 사람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도취를 길러주고, 근시안적이며, 거만한 태도까지 길러준다. 이것이 우울증의 좋지 못한 점이다. 마치 하이네의 무미건조한 아틀라스처럼 혼자서 세계의 모든 고뇌와 수수께끼를 어깨에 짊어진듯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몇천의 사람들은 그러한 고통을 모르고 살며, 자기와 같이 미로에서 방황하지 않는 줄 안다. 나의 성질이나 여러 가지 버릇이 내 것이라기보다 도리어 카멘친트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 아니 악습이라는 생각은 나처럼 혼자서 지내며 고향을 떠나 있으면 고스란히 다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p137

....피로한 몸으로 침대에 누웠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 생활을 생각했다. 좀 더 행복하고 진실하게 살며, 좀 더 인생의 핵심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모든 선의와 기쁨의 핵심은 사랑이며, 엘리자베트에 대해서는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고민이 있지만, 나는 비로소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면 좋았을까?

p147

 그 밖에도 내가 생각하는 바는 점점 변했다. 나는 별다른 비애도 느끼지 않고 청춘 시절을 벗어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 생애를 짧은 과정으로, 나 자신을 방랑객으로 생각했으며, 가령 이 방랑객이 어떠한 길을 걷건, 또는 사라져 없어지건 그렇게 세상을 소란하게 하거나 괴롭히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시기까지 성숙해가는 것을 느꼈다. 인생의 목표나 즐거운 꿈을 놓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가갛지는 않았다. 그리고 도중에 가끔 여가를 즐기며, 종종 샛길로 접어들어 하루하루를 게으르게 보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휘파랑으로 시 구절을 부르며 아무 근심도 없이 즐거운 현재를 만끽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차라투스트라를 숭배한 적은 없지만, 원래 나는 신사적인 인간이며, 자신을 존중하며,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경멸감을 느끼지 않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인간 사회에 어떤 움직일 수 없는 한계를 두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압박을 받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도 생활은 마찬가지로 다채로울 뿐만 안리ㅏ, 도리어 대개는 넉넉한 사람이나 호화로운 사람보다도 한층 더 따스하고 진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누린다는 것을 차츰 더 잘 알게 되었다.

p155

 하여튼 구름이나 파도를 바라보는 게 인간 연구보다 즐거웠다. 인간이란 무엇보다 미끈거리는 허위의 가죽에 싸여서 보호를 받는 것으로, 다른 자연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놀랐다. 머지않아서 나의 모든 친지들에게서도 똑같은 현상을 찾아보았다. 다시 말하면 그 결과로 제각기 자기의 독특한 정체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딴에는 한 사람의 인격자, 또는 뒤어난 인물을 가장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그러한 점을 확실히 인정하고,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사람들의 핵심을 알아보려는 생각은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사람들에게는 대개 이 가죽에 싸인 것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그러한 점을 어디서나 발견햇으며, 어린아이들한테서까지 발견했다. 어린아이들도 숨김없이 본능적으로 자기를 나타내기보다는 알건 모르건 간에 언제나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얼마 후 나는 조금도 진보가 없고, 한 가지 한 가지 장난거리 같은 일에 그만 나도 모르게 빠져버리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의 과실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곧 스스로 환멸을 느끼며, 내 주변에서는 내가 요구하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흥미 있는 이니물이 아니라,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사람들이나 사교계 친구들도 그러한 점을 나에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탈리아가 그리웠다. 가끔 도보 여행을 할 때 유일한 친구고 길동무였던 직공을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나는 그들과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그들 중에서 훌륭한 청년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었다.

p159

 ....여기 잇는 사람들은 점잖은 체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연극을 할 여가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괴롭고 가난한 살림 그 자체가 교양이나 고등한 취미를 가장하지 않아도 마음에 맞고 매우 즐거웠기 때문에 아름다운 말로 꾸밀 필요가 없었다.

 나는 차츰 자주 그곳을 찾아갔으며, 그 집에서 사교적인 너저분한 일뿐만 아니라, 나의 쓸쓸한 기분이나 괴로움을 다 잊어버렸다. 또 여기서 어린 시절의 한때가 나를 위해서 보존된 것을 발견하고, 신부들이 나를 학교에 보냈을 때 중단되었던 생활이 이곳에서 다시 계속되기나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p185

...환자는 훌륭한 세계관을 지녔다. 구체적으로 인생을 관찰하며, 너그러운 유머로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세계관이었다. 그 후부터 나는 매일같이 배우는 점이 많았다.

p207

 서랍에는 내가 시작한 커다란 창작품이 들어 있다. 내 생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거창하게 들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진행과 완성은 확실치 않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해서, 계속하고 완성할 때가 한 번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청춘의 동경은 바른 것이었으며, 나는 역시 시인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마을 회의 의원이나 돌 제방과 같은, 아니면 그보다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늘신한 뢰지 키르타너에서부터 불쌍한 보피에 이르기까지 그리운 모든 사람들의 환상과 함께 흘러간 것과 그리고 아직 내 인생의 잃어버리지 않은 부분만큼 값비싼 것은 아닐 터이다.

p211

 주인공이 구하는 것은 현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며, 시간과 영원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밝히려고 했다. 시로써 말 없는 자연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기 마음속의 말 없는 거룩한 소원을 표현하며, 신의 품에 뛰어들어 무한하고 초시간적인 것에 자신의 보잘것없는 생을 결부시키는 데서 시인의 천직을 구하려고 햇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에 나타난 중요한 문제는 사랑과 죽음에 대한 태도다. 누구나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지만, 그것은 어떻게 사랑하느냐, 또는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남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 남을 사랑하는데서 진정한 만족과 생의 보람을 느끼려고 했다. 뜻에 맞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서나 꼽추 보피에 대해서도 그랬다. 일찍이 어머니의 깨끗한 죽음 속에서 그는 한 가닥 광명을 얻었으며, 음악가의 명랑한 최후에서 세속과 자아를 벗어나 영원한 광명 속으로 들어가는 죽음을 알았다. 이 작품은 독일 정신을 발전시킨 것으로 그 당시의 침체된 사람들에게 청신한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p213

 "싱클레어, 알겠지? 나는 가야 해. 아마 내가 필요할 때가 있을거야. 그때 나를 부르면 나는 이미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며 그렇게 번거롭게 나타나지는 않을 거야. 그때 네 마음속에 귀를 기울여봐. 그러면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 테니까."

 이 작품에서 헤세는 젊은이들에게 사람의 진정한 사명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헤세 자신은 이때부터 더욱더 예술과 생화의 모순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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