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4
...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는 일은 도대체 어떤 걸까. 나는 이쪽저쪽으로 온통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스스로에 대한 짜증스러움, 불만투성이의 속마음. 그런 걸 동료들에게 들킬까봐 불안했다. 노력했지만, 당연히 그런 것들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나도 모르게 아주 깊은 곳에 품은 어떤 마음이, 아주 오래전부터 쌓아온 어떤 태도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듯이.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인해 초조해지는 날들이었다. 스스로를 위해 선택하는 일은 괴로운 것이구나. 선택받을 때보다 더. 그 어느 때보다 들썩이는 마음을 잠재우려고 애쓰다가 문득 책점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언젠가 해든이 알려준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자주 읽는 책이 꽂힌 책장으로 가서 눈을 감고 한 권을 골라. 고민을 떠올리며 무작위로 책을 펼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읽어. 그게 너의 운세야.
; 나도 책점을...
p58
...자존심과 체념이 뭉쳐 어떤 말을 뱉으면 그다음엔 반드시 쓸쓸해진다. 이 공식은 변함이 없다. 내가 삼십여 년간 해온 일이라 잘 안다. 그래도 말이나 해 볼걸.
; 모르겠다...부모의 그늘은 어떤 식인가...이래도 저래도 마음이 그럴 수 있다...사람이니까...
p61
...직업을 바꾸게 되는 때, 그런 때는 살면서 몇 번 없고, 익숙했던 것과 작별하고 새로운 것과 인사하며 다시 살아 있음을 느끼니까. 거기에 그 직업을 좋아하게 된다면, 없던 용기까지 생긴다. 새로워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 이걸 시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p74
가끔 약에도 체해. 그럴 때 있잖아. 선의에도 걸려 넘어지잖아.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어. 우린 겨우 서른 언저리잖아.
선문답처럼, 성긴 그물을 던지듯 에두른 해든의 문장들은 잘 드는 연고 같을 때가 있었다. 세상에 나를 설명하려고 너무 애쓰다가 지레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을 때. 새든은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p85
...걱정이 사랑이라면, 걱정도 사랑이라면 나는 왜 이 사실을 당장 엄마에게 알리지 못하는 걸까. 누군가가 나를 걱정한다면 나는 오히려 불안해지고 두려워질 것만 같다. 그건 또 어째서일까.
; 난 엄마가 걱정하는게 싫다...근데 내 딸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
p109
아름은 자주 의심하는 사람, 민아 언니는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아름이 민아 언니보다 약한 사람처럼 보였다. 둘은 그런 다른 면이 있는 한편 공통점도 있었다. 성실한 사람이라는 점. 민아 언니는 책임감 대문에 성실히 살았고 아름은 자기를 의심했기 때문에 성실히 살았다.
; 성실하게 살기...
p112
그런데 말이야.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말을 못해도 있는 마음 같은 게 있어. 그 마음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 알아도 말하지 못하고 몰라도 비슷한 걸 말해버리는 사람도 있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건 진짜야.
; 말.
p126
아름, 재능은 그런 한 단어가 아니고 그 속에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포함된 단어인데, 네가 만난 사람들과 네가 다한 열심도 거기 들어가.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실패했다 해도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네가 바라는 성공에 필요한 재능이 없는 거지. 다른 여러 재능은 있을 거야. 그래서 재능은 항상 사후적일 거야. 되고 나야 그런저런 재능이 있었군, 하고 평가 할 수 있거든.
p136
...둘 중 뭐가 더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실수하지 않는 것만큼 긴장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p137
그런 건 조심하면 되는 거지 자책할 일이 아니잖아.
아름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짝 굳어있던 어깨가 내려 앉는 게 보였다. 친구에게 지적하는 입장도 힘들지만, 친구에게 지적받는 입장은 더 힘들지 않을까. ....이제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와서 자신이 세운 원칙과 일하는 방식을 배워야 하는 이름을. 친구일 때는 볼 수 없던 흠 같은 것. 수십 년 산 나무의 깊은 용이 같은 것을 볼 때마다 친구일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뵤족한 마음이 그를 향했지만, 그 흠까지 포함한 아름의 어딘지 고집스럽고 어수룩하고 열심인 모습을 보며 해든은 생각했다. 나는 저 사람을 미워해봐야 오래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p170
...지금 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또다른 생의 자신은 어딘가에서 더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건 아무래도 소용없고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우리는 퍽 잘 어울리지 않은가, 하고 민아는 생각했다.
p176
...그리워지는 게 사람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살아가면서 나는 그런 걸 배우는구나. 이런 깨달음은 당연한 동시에 분명한 충격을 준다. 세상에는 나에게만 놀랍고 소중한 작은 것들이 얼마나 더 많을까.
나는 내가 눈 내리는 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단번에 좋아하게 될 줄 모르고. 이렇겠지 저렇겠지 어림짐작으로 상상하던 것보다 늘 현실의 실감은 아주 다르고, 그런 경험은 점점 더 적어져서, 이 여행 경험은 나에게 아주 소중하다. 사진을 찍게 된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을 때보다 실제로 한 것들은 언제나 더 생생하다. 직업을 바꾸고 이동하지 않았으면 몰랐겠지.
이런 순간으로 알게 되는 나의 변덕과 변화는 낯설다. 이제까지 내가 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던 게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가는 것이다. 나는 나의 변화를 언제나 한발 늦게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게 되는 순가을 마주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 처지. 어쩌면 녑한 나를 변한지도 모르는 채로 대하며 평생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
과거와 미래로 펼쳐진 나들 사이에 내가 서 있다. 어느 쪽으로든 발을 디뎌야만 닿을 수 있는 내가 이쪽저쪽에 서 있고, 언제나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다.
p194
...이번은 알고 펼치는 것에 가까웠다. 자신이 지녀야 할 마음을 문장으로 읽는 일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언젠가처럼 해든과 민아를 생각하며, 그 언젠가와 조금은 달라진 마음으로 책장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펼칠 곳을 가늠한 뒤 열어보았다. 그 장에는 아름이 묻기를 기다린 것처럼. 벗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름은 책이 기특해서 겉표지를 몇 번 쓸어보았다. 고마받. 너는 항상 답을 알고 있네. 오랜만에 훑어보는 책에는 신을 믿던 시대에 쓰인 글답게 '운명의 여신'과 '운명의 실' 같은 말이 자주 등장했다. '운명의 여신 클로토가 우너하는 대로 운명의 실을 짜도록 하라'하는 식이었다. 아름은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면 민아와 해든과 함께 쟈여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낙천적인 소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 벗들의 사랑을 확신하고 나를 비난하는 자들에게도 생각을 감추지 말며,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벗들이 억측하지 않도록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
비교할 게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할 확률이 높다. 아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근처를 둘러보면 민아와 해든이 있었다. 아름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을 때, 끼어 있다는 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민아와 해든은 아름에게 부표 같았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을 전부 이해할 순 없고 부표가 떠다니는 것을 보며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었다. 이들이 이쯤 있으니, 나는 그보다 한두파도 뒤를 떠다니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다행이라고. 그 정도만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고. 손을 휘저어 가까스로 해든이든 민아든 누구의 손끝에라도 닿을 수 있다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왜 그들이 그렇게 필요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이 훌륭하니까, 라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p196
...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불완전함과 불확실함, 배제되는 느낌을 견디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름이 품어온 마음 그대로였다. 어른이 되는 시간은 그런 걸로 잔뜩 채워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다리는 시간, 견디는 마음, 참는 눈빛, 삼키는 말, 모르는 척하는 시선, 아는 척하지 않고, 상대가 준 것까지만 받고, 상대가 모르게 더 받았어도 고마움을 견디고, 다른 것을 내밀고, 마침내 주고받고, 또다른 우리가 된다. 또다시, 또다시 생각하며. 그렇게 이어져오는 관계의 시간이 있었다. 내 중심이 흔들릴 때,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애정을 바랐다. 내가 나를 지탱하기 버거울 때,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로 내가 선 자리를 확인받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사진이 좋아진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사진은 날씨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는데 아름은 그 점이 퍽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날씨에 따라 속절없이 컨디션이, 기분이 로락내리락 하니까.
아름은 남들이 발견하기 전에 한발 먼저 자신이 민아와 해든의 좋은 점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았고, 반면에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쉴새없이 곁눈질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서글펐다. 언제나 타인을 좇는 스스로의 바쁜 눈동자를 의식하게 될 때면. 그건 어디에서 누구와 일하든 똑같았다....그들은 아름으로 하여금 뭔가를 추동했다. 그들과 대화를 하고 나면 뭔가가 하고 싶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사진을 찍거나, 사진 찍는 것을 생각하거나, 하물며 사진에 대한 책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진과 상관없는 책이라도 읽게 만들었다. 그게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아름은 생각했지만.
도대체 나는 누구지. 그 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은 그 둘을 섞은 모습도 아니고 그저 여백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이제 나는 좀 나이고 싶어. 그래서 아름은 사진을 선택했다. 카메라에 한쪽 눈을 대고 집중할 때면 바깥에서 오는 영향들을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누구의 생각도 참고하지 않고 선택하는, 자기만의 시선은 그 순간에만 있는 것 같았다.
p219
...그런데 쭈볏거리는 사람과 용기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다 쓰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