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8 

 "가족이니까 그런 거야. 넌 우리 가족이 아니니까 잘모르겠지."

 가족이 아니니까.

 요즘도 나는 문득 한밤중에 잠에서 깰 때가 있다. 더 이상 어둠을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이렇게 생각할 때는 있다. 여기가 어디지? 시간이 좀 지나면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어둠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나 후회를 떠올릴 때도 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그런 것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게 되리라. 마치 어떤 잘못이나 실수도 저지른 적이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약간 참담한 기분이 든다. 내가 그 시절의 일에 대해 그녀의 입장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길을 떠났던 날 밤. 그녀 역시 갈팡질팡했고 두려웠지만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그녀 역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 아, 하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엄마와 아빠에게 내가 납치'당했었다'고 말한 후, 나는 내가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느낄 때면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누구에게든 거리낌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부모님에게 말한 버전대로. 그러면 얼마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갔다.

p130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착각과 기만,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 될 것이다.

p198

...나는 나중에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내 외부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의 핵심에는 허영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p237

 "그렇게 무례한 사람들은 만날 필요가 없어요. 정말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일깨워주곤 하죠."

p306

 아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그 이야기 속 사실들을 될 수 있는 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늘어놓고 싶었다. 그 사실들로 지어진 작은 집에 창문을 내고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그 안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한 후 진정한 의미를 건져올리고 싶었다.

 .....

 ... 시간이 지나고 내가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때때로 진실은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있는 힘을 다해 손에서 탈탈 털어내지만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입안으로 가져가고야 마는 과자 부스러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또다른 사실은, 나를 도움닫기 하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그런 무능함과 열없음, 그 자체라는 점이었다.

p366

...삼인칭시점으로 전개되던 서사에서 서술자가 문득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지만 무언가가 영원히 변해버리고 말았다고 고백할 때,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만하고 맹목을 연기한다는 진실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 가정의 모습이 모두가 동경하는 완벽에 가까울수록 비극은 더욱 깊어졌다. 이번 소설집에서 그 부르주아 가정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부모가 소유한 막대한 재산은 여전히 건재한 영향력을 암시하고, 고층 아파트로 이사할 예정인 사람들은 선망을 받으며, 부부 동반 모임에서는 섬세한 역할극이 우아함을 지태이킨다. 하지만 이제 그 세계는 갈망되기보다 배면으로 물러나 있다. 그 세계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이 바깥으로 성큼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은 소녀들이다.

p369

...사회의 틀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가운데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여성은 끝없는 상상과 소문의 대상이 되지만, 이 틀에 들어맞는다고 해도 여자들 사이의 복잡한 선망과 질시의 눈길을 피할 길은 없다. 사회적 자원을 직접 쟁취하기봗 다른 가족을 경유해 점유하는 여성들은 승리감과 박탈감 역시 은밀하게 느낀다. 그래서 여자들의 세계는 비밀스러운 속삭임과 낮은 웃음소리로 둘러싸여 있다. 그에 반해 남자들은 "한 번도 어리둥절해하지 않"(81쪽) 거나." "자신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자신감, 그리고 최종 선택에 대한 은근한 만족감"(67쪽)에 차 있다. 사회적 자원을 풍부하게 공유하며 굳이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는 허위의식이나 가식을 발휘할 때에도 "매너"9같은 쪽)라는 그럴듯한 가림막이 드리워진다. '소문'과 '비밀'과 '눈치'와 '질시' 등의 단어가 여성 쪽으로 기울어져 젠더화되어 있듯, '자신감'과 '매너' 등의 단어 역시 남성 쪽으로 젠더화되어 있는 것이다. 기존 사회의 언어와 규범에 처음부터 잘 들어맞는 남자들은 이를 체득하며 매너를 갖추게 되지만, 사회에 맞춰 자신의 기준과 위치를 변용시킬 필요가 있는 여자들은 연기를 하며 이중의 겹을 가지게 된다.

 소녀들은 자신 역시 여자들의 복잡미묘한 세계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여자이기 때문에 금기시되는 것들이 더 많이 있음을 예민하게 인식한다....이 금기들은 기본적으로 소녀들에게 혼란스럽게 다가오고 수치심의 근원이 된다....소외감과 열망 속에 잇는 이 소녀들에게 어느 날 금기 위반의 죄책감을 기꺼이 무릅쓰게 만드는 존재가 나타난다....이들은 자신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에 일절 개의치 않으며, 도리어 사회적인 위계를 거스르는 말과 행동을 하는 데 거침이 없다....소녀들의 시선 속에서 이들의 대범함과 자신만만함은 '위엄'과 '권위'로 넘쳐흐르며, 실제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매혹하는 데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연기자다.

p376

...여자는 이성의 속박에 맞서는 저항적 존재가 아니며, 쾌락원칙의 유혹을 대변하는 리비도적 존재도 아니다. 근대 질서에 손상되지 않은 무시간적 진정성을 드러내는 존재나 표현 불가능한 비의적인 존재 역시 아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연출을 감행해야 하는 영악하고 위태로운 존재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소녀는 "의지해야 하는 단 한 사람을 그토록 순식간에 미우할 수 있게 된다는 것"948쪽)에 체머리를 떨며 증오와 맞붙은 채로만 체감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의 영역에 몸을 담든다....소스라치듯 한순간에 소녀는 성장한다.

p379

...자신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착오였다는 것, 거기에서 비롯되는 무력감과 패배감은 여섯 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모티프다. 이런 결정적인 환상의 무너짐이 있기에 앞서 소녀들은 먼저 환상을 구성하는 법을 익힌다.

p583

...할머니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은 자신처럼 취약한 존재의 불안과 상처를 정확히 이해하는 순간이자, 성장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p391

...밤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이 소녀들은 여성의 성장이 더이상 결핍과 상실을 담보로 하는 파멸적인 자기완성이 아니라, 현실의 권력과 질서를 재배치하는 정치학일 수 잇음을 보여준다. 초월적인 광기와 공포에 집어 삼켜지는 대신, 광기와 공포로부터 거짓말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상속받는 이 영민한 소녀들을 보라. 이번 소설집에서 손보미는 이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갱신했을뿐더러, 한국문학사가 보여준 성장의 순간들을 다시 썼다. 소녀들의 에너지 속에서 사랑은 소용돌이치며 거듭 탄생하고, 투명해진 밤은 환하게 빛난다. 우리 시대 가장 섬세하게 세공된 단편 미학의 경이로운 성취가 여기에 있다.

p393

...내게 주어진 것이 다른 누군가의 변덕스러운 선택에 의해 가능했다는 낭패감과 그러므로 내가 받은 무언가를 마땅히 내줘야 한다는 세상의 비정한 이치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건대, <사랑의 꿈>에 실린 ㅅ설들은 바로 그때 느꼈던 낭패감과 비정함을 바탕으로 쓰인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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