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1
...문제의 근본에 흐르는 역사와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해결'과 '성과'를 만들어내기를 중시한 국가 전체의 분위기가 국민 개개인에게 스며들어 일상에서도 뭐든지 곧바로 승부를 보려는 습속을 형성하지 않았을까.
글쓰기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글 쓰는 주체의 개인적 특성을 잘 드러냈느냐가 관건일 뿐, 정답 같은 건 꿈에서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 글쓰기라는 장르의 본질이다. 인문학 강연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파고들어도 파고들어도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의 마음을 파헤치는 데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 순간도 '인문학'이라 불려선 안 될 것이다. 요컨대 글쓰기와 인문학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문화유산 가운데 '정답'과 가장 거리가 먼 장르인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본래 안정적인 일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어처럼 명료하게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우리 마음은 수많은 인상과 느낌과 사실과 기억이 소용돌이 치며 만들어내는 복잡한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특정한 인상을 받을 때, 우리 내면에는 기억나지 않는 신생아 시절의 기억(무의식이 간직하고 있을) 에서부터 성장기에 만났던 누군가 혹은 회사 면접장에서 만났던 까다로운 면접관 등 살아오면서 만나온 여러 인물과 상황이 스쳐갈 것이다. 우리 마음의 '생각' 회로에는 시공간의 제한이 없다. 대상의 범주가 정해져 있지도, 일정한 형식이 부여되어 있지도 않다. 그동안 겪어온 모든 시공간과 감각의 기억이 난잡하게 섞여들며 시시각각 생각의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무정형의 복합적인 덩어리를 언어라는 체계적이고 선명한 형태로 코딩해내는 일이다. '마음'과 '언어'라는, 너무나 다른 질료로 이루어진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일정 분량의 덩어리를 이동시키는 일이다.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된,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언어는 일부 감각에 대해서는 거의 수용 능력이 없다. 시각 혹은 청각에 대해서는 그나마 일정 부분 반영해내지만, 후각이나 촉가, 미각에 대해서는 인간이 실제로 경험하는 분량의 10만분의 1,100만분의 1도 담아내지 못한다. 작고 한정된 형태의 언어 그릇에 인간의마음이라는 어마어마한 덩어리를 옮겨놓아야 하니, 그 작업이 얼마나 난해하겠는가! 글쓰기가 힘든 건 언어를 가진 사피엔스 종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p37
바깥에 나가야 한다. 나가서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낯선 곳에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곳의 공기는 탁해지는 법, 내 삶에 바람이 들어오도록 해야 했다. 혼자 틀어박혀 읽고 쓰기만 하는 일상에 균열을 내야 했따. 그래야 내가 쓰는 글에도 현실감과 생동감이 들어찰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요청에 전부 응하고자 결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들어오는 제안은 다 받아들이자. 겁나고, 못할 것 같고, 혹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고, 그런 생각은 모두 사치다. 쓰는 삶을 유지하면서 1.생계를 유지하고, 2. 외부와 접속해 있으면서 계속 자신을 업데이트해가기 위해서는 들어오는 제안을 무릎 꿇고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p40
...내가 말한 도약이란,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 알고, 그것을 쓰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으며, 어떻게든 써내게 만드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장악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히 '도약'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다.
p49
4.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상대에게 가닿을 때 어떤 반향이 일어날지를 생각해보고 발언한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나 자신이 듣는다면 어떨까? 상상해본 뒤 괜찮겠다 싶으면 그대로 말한다. 불쾌하겠다 싶으면 그렇게 말하려했던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왜 타인이 쓴 글에 그런 말을 하려 했을까? 상대의 글쓰기에 도움을 주겠따는 의도였을까? 혹시 누군가의 글에 혹평을 내림으로써 우월감을 맛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평가를 내릴 수 잇는 힘을 손에 넣은 것 자체를 즐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5. 평가의 끝에는 대안을 제시한다. 대안이 꼭 특단의 비결을 담고 잇을 필요는 없다. 아이디어를 일러주는 차원이라기보다, 평가를 해주는 내가 평가의 대상이 된 글을 여러 번 읽어보고 글쓴이가 했던 것만큼 공들여 대안을 생각해보았음을 나타내주는 차원이다. 마음을 보여주고 라포를 형성하기 위해 대안 제시라는 말이다.
p65
한정된 짧은 시간에 글쓰기를 배우는 자리다. 형식과 규칙을 정하고 제한 사항을 확실하게 정해주어 긴장감 있게 수업을 이끌어 가면 압축적이고 효과적으로 글쓰기를 배울 수 잇을 것이다. 그것 또한 글쓰기의 여정에서 필요한 조각이다. '많이 쓰는 것'은 '정확히 쓰는 것', '논리적으로 연결되게 쓰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와 수업할 때는 제 방법을 최고라 믿고 따르시고, 다른 선생님과 수업할 때는 그분의 방법이 최고라 믿고 따라가서, 양쪽 모두에게서 최고의 것을 건져서 자기 것으로 삼으시면 된다. ...
p77
...서평과 같이 대개 개인적인 의견을 담은 짧은 글의 경우, 처음에는 앞뒤 인과 관계를 생각하거나 전체 글의 짜임새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나가는 것이 좋다. 마음 속에 오갔던 모든 생각들을 죽 화면에 쏟아놓은 뒤, 다시 읽으면서 사족으로 보이는 부분을 쳐낸다. 쓴 글을 반복해 읽다보면, 어떻게 글을 짜야 할지 감이 잡힌다. 그러면 그 감에 따라 문단을 다시 배치한다. 다시 배치하면서 그에 맞게 문장을 다듬고, 그 과정을 마친 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본다.
글 중간에 책의 글귀를 인용하는 것도 좋다. 인용구를 쓰면서 다시 한번 저자의 생각을 곱씹고, 그에 대한 나의 감상을 덧붙인다. 좋았던 부분을 선택해도 좋고, 마음에 걸렸던 부분을 선택해도 좋다. 양쪽 다 한 문단씩 골라 인용하고 감상을 쓰는 것도 괜찮다. 그 과정을 통해 원저자의 생각과 통찰을 한층 깊게 받아들이거나, 유명 저자가 드러낸 한계를 통해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저자의 출생 연도나 성별, 속한 국가, 사회적 활4동 분야, 그동안 출간했던 책들을 참고하며 저자가 해당 책을 내게 된 동기과 과정을 유추해보는 것도 책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이름난 저자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활동과 노력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게 되었는지를 체감하고 전범으로 삼을 수 있다.
그동안 읽어온 책들과 비교해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으며 해당 책을 조명하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본시 지식이란 비교와 대조를 통해 새로 들어온 정보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과정이다. 이러한 서평 작업을 통해 새로 습득한 지식을 정리해 자신의 내면에 나만의 것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내 인생의 장면들을 끼워 넣는 것도 흡인력 있는 글을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한 권의 책을 매개로 글을 쓰면서 내 인생의 한 단면을 살짝 보여주고, 그에 대한 현재의 소고를 들려주면, '나'라는 사람이 독자에게 한결 친근하게 다가가는 현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
글을 쓰고 싶지만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에게, 서평을 써보라고 권유한다.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대개 독서량이 풍부하고, 읽었던 책에 대해 할 말을 많이 품고 있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을 매개로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경험을 쌓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기 생각을 큰 줄기로 내세워 독립적으로 글쓰기를 이끌어나가는 순간이 온다.
p88
...돌팔매질을 당하더라도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은 화두가 있는 경우라면, 주장을 보강할 확실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덧붙이자. 철통같은 논리와 근거로 무장하자. 그런 경우, 폭포수처럼 많은 이들에게 매질이 날아오는 중에도 간간이 당신이 심어둔 철통 논리와 근거를 알아보고 방어해주는 '개념 있는'논객들의 변론 댓글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 댓글들이 비난 매질의 흐름을 일정 단위로 끊어주는 광경을 보고 심심한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p91
....자기 얘기를 쓰되 주제에 맞는 일화를 선택해, 자신을 적절히 드러내며 쓴 에세이가 잘 읽히고 감동을 준다. 그러려면 쓰기 전에 일단 구상을 해보는 게 좋다.
1. 이 글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2. 메시지 전달을 위해 내게 있었던 일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밝힐 것인가.
p101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같은 말이 반복되거나 심정에 대한 묘사가 너무 긴 분량으로 이어지면 가독성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
......
"그 부분을 있는 그대로 모두 다 나열할 필요는 없어요.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싫다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몇 줄로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p104
...일어난 일을 글로 써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내 '문제'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언어로 차곡차곡 마음을 정리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문제가 아닌지를 구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조목조목 정리된 이 '문제'를 통제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또 하나는 바깥세상에서 변화였다.타인이 다가와 위안 받았음을 표하고 내가 그에 응답하면서 일어난 화학작용이었다. 내가 써낸 문장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니. 그래도 내가 세상에 무너가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들어와 내면에 자존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