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7
 ...촬영마다 장비는 바뀌지만, 끝내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촬영하기 위해선 일단 길을 나서, 촬영지로 가야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기에, 평생을 거처나 정처가 따로 없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61
...노인에 신사라는 말이 더해진 말로, 멋있게 나이든 남자를 뜻한다. 노신사가 되려면 평소 쌓고 다듬어 온 교양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여느 오래된 도시가 노인이라면, 올드타운은 노신사다. 어차피 나이를 먹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올드타운을 닮은 노신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먼 곳을 여행하고 또 여행하는 것이다. 교양을 체화하는 데는 여행만한 것이 없으므로. 여행과 올드타운과 노신사라는 단어를 입 속에 넣고 가만히 읊어본다.
p69
...세상은 여전히 변화하며 서로 맞물려 흐른다. 세상 위에 얹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세계의 명소에 모여들어 열심히 셀카를 찍는 여행객들이여,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 가시라. 여행이 그대들의 삶에 스며들어 더욱 달콤하며 여유로운 인생으로 흘러 가기를!
p115
 여행travel의 어원은 고난 trvail이다. 여행은 결국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다. 집 떠나 낯선 곳을 다녀오는 일 자체에 이미 고난이 있는데, 먹거리와 잠자리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캠핑의 고난은 오죽하랴. 실제로 산티아고 순례길 자전거 여행의 막바지엔 과로 탓으로 원형탈모가 생기기도 했었다. 고난도 고난 나름이라, 군대를 다시 가라고 하면 죽어도 못 간다 하겠지만, 산티아고든 데날리든 캠핑 여행을 다시 가라고 하면 당장에 짐을 꾸릴 것이다.
p148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는 일은 때때로 고단했지만 그것을 넘고 보면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인지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국경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경계니까. 나에게 여행이란 결국 경계를 몸으로 넘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p150
 나에게 여행이란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지우는 일이다. 몸으로 국경을 넘는 것은 물론이고 대륙의 경계까지 지우는 것, 도시에 중첩되어 있는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일과 여행의 경계를 지우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론 삶과 여행 사이를 가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지워내는 것에 이르고 싶다.
p158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캠에 의하면 우리가 '신'이라고 믿는 것은 실은 '사회'다. 종교는 그사회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이로움을 좇는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빌려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 윤리를 계울로서 다스린다. 저마다가 섬기는 종교에서 성지를 만들고 순례 여행을 권하는 것은 그만큼 여행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지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p160
...여행은 금세 끝나지만 삶은 오래 지속된다. 나는 여행이야말로 소시민이 삶을 감당해 내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여행 중에서 성지 순례만큼 우리 삶에 곧장 힘을 발휘하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p187
...영국의 철학자이자 탁월한 여행가인 '알랭 드 보통'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때때로 큰 생각은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p199
 생태계 건강은 돌연변이가 지킨다고 한다. 불법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그래피티 작가들이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종, 다양성, 유연함은 건강한 사회의 표식과도 같으니까. 불법이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합법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동독 사람이 서독을 여행하는 것이 불법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그래피티가 전면적으로 합법이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사회 여러 장소에서 수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다. 그래피티는 획일화된 도시 풍경에 색깔을 입히고 알록달록한 무늬를 만든다. 나는 그것이 보기 좋고 늘 재밌다.
p221
...온갖 갈등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차단된 곳, 지긋지긋한 일상의 자국이 지워진 곳,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며 간섭하지도 않는 곳, 게다가 안전하며 평화롭기까지 한 나만의 공감. 그러한 공간을 누리는 데 있어서 고급스러움이 필수적이진 않다. 되레 손때가 내려앉은 낡은 가구들이 더 큰 안정감을 선사한다. 여행지에서의 숙소는 한국에서 누리기 힘든 영혼의 사치를 부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여행자의 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p242
...버려진 것을 남겨진 것으로 전환하며 가치를 발굴한, 이른바 '업사클링'이다. 재활용을 뜻하는 리사이클링에 업그레이드가 합쳐진 업사이클링은 버려진 물건을 단순히 재활용 하거나 용도를 변경해서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더해 이전보다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드는 일을 아우른다. 업사이클링의 가장 쉬운 예이자 가장 성공한 예를 들자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최근 크게 유행하는 '프라이탁' 가방을 빼 놓을 수 없다. 
p254
...우리 모두에게 남은 인생은 언제나 충분히 길다. 인생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오직 혼자서 개척해야 하는 멀고 긴 여정일테니까.
p279
"나에게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이다. 계절에 실려서 순환하는 풍경들, 노동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지나가는 것들의 지나가는 꼴들, 그 느낌과 냄새와 질감을 내 마음 속에 저장하는 것이 내 여행의 목적이다."- 김훈, <라면을 끊이며> 중
p303
...여행지에서 나는 그 사회의 주변인에 지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관찰자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늘 접하는 평범한 순간들이 여행지에선 다르게 감각되곤 한다. 또한 몸이 한국을 벗어나 있으니 일시적으로나마 한국 사회에서도 주변인 처지가 되어 조금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한국을 보게 된다.
p305
...본능으로 체득한 모국어는 한 존재의 기반이자 사유의 근간이 된다. 취사선택할 수 없는 본질적 언어이다.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은 만신창이의 파울 첼란이 기댈 곳은 모국어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 생존 영어는 조금 해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영어가 유창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럽다. 그러나 영어가 유창해서 외국인과의 소통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도 모국어로 충분히 대화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누구라도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외로움을 느낀다. 난민이나 디아스포라는 말할 것도 없고 유학생이나 이민자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모국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그 시간이 한 달을 넘기고 두어 달에 이르면 여지없이 기은 모국어 향수에 빠진다. 영어에 서툴러서 외국에서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신이 나서 여행을 떠났어도 돌아올 때는 더욱 신이 난다. 보고 싶은 영화, 읽고 싶은 책, 대화 ㅏㄴ누고 싶은 친구들이 가득한 모국어 사회는 내 정신의 고향이므로.
p327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뇌 일부가 외부로 돌출하면서 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눈은 그만큼 뇌와 가까이 연결된 감각기관이다. 인간의 사유체계가 눈에 많이 의존한다고 하니, 그만큼 '본다'는 것은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p346
 무동력 이동 수단은 동력을 쓰지 않는 만큼 오직 자신의 힘과 기술로만 나아가야 한다. 성실하게 몸을 써야만 나아갈 수 있는 정직한 이동 수단이라는 점이 매혹적이다. 바람이나 물살 등의 자연환경을 활용해야 하고 눈앞에 놓인 난관을 피해가야하니, 자연을 면밀하게 살피게 된다는 점 또한 매혹적이다. 그러니 무동력 이동 수단은 우리를 목적지로 옮겨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동하는 데 쓰이는 모든 시간을 찬란한 여행의 순간으로 만들어 낸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등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떠나 침묵만이 흐르는 자연 속에서 무동력 이동 수단으로 나아갈 때면, 내가 만드는 작은 소리만이 들려온다. 숨소리 같은 것들. 지친 몸은 한 발 내딛고, 팔 한 번 뻗는 것조차도 힘드니 자칫 잘못하면 땅에 꺼구러질지도 모르고 바다에 빠질지도 몰라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잡념은 저절로 사라지고, 고통을 매개로 온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마치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된 것만 같다. 비로소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아와 만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힘들게 땀을 흘리며 노력한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이동 수단은 속도를 경쟁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하지만 여행만큼은 경쟁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숱한 경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데 무엇 하러 여행까지 경쟁한단 말인가. 무동력 이동 수단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몸밖에 없으니, 경쟁상대가 있어야 한다면 나 자신이면 충분하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 내 면과 겨루는 것이다. 더 강해지고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p359
"나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그러려면 도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잇어야 한다.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일 뿐이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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