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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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 이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더라. 언젠가 우연히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상당히 인기가 많은 작가이며 그의 작품 또한 많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이런 저런 정보를 읽어가며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미스틱 리버》나 《살인자들의 섬》, 《전쟁 전 한잔》 등의 그의 작품들을 조금씩 모으게 되었다. 사실, 이것저것 구입하고 있지만 다른 책들에 밀려 제대로 본 책은 몇 권 없다. 이번에 만난 책,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라는 책이 ‘사립탐정 켄지 & 제나로 시리즈’ 라고 하는데 그 시리즈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니 말이다. ‘켄지 & 제나로 시리즈’ 는 《전쟁 전 한잔》,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신성한 관계》, 《가라 아이야 가라》, 《비를 바라는 기도》까지 모두 다섯 편이 있고 국내에 출간된 순서는 조금 뒤죽박죽이라는 사실을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일단 제일 가까이 있는 책을 잡았는데, 그것이 바로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이다.

사립탐정 켄지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켄지와 제나로는 의뢰인의 아들이 마피아로 인해 위험에 놓여있다고 판단한다. 그들에게서 의뢰인의 아들을 보호하기위해 지켜보지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한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고, 그의 손에는 켄지의 명함이 쥐어져있다. 그리고 연이어 발견되는 의뢰인 아들의 죽음…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건의 연관성을 하나씩 찾아가게 되고, 연쇄살인이라는 결론과 동시에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켄지를 찾게 된다. 용의자는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다. 쉽게 찾기 힘든 각각 사건의 관계들과 그 동기들이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시간 속으로 얽혀 나가기 시작한다…….

제목에 어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전체적으로 어둡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둠으로 인해 느껴지는 우울함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냥 우울함에 던져놓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우울해만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다른 생각들을 던져주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비 효과라는 이론을 거들먹거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 이론을 피해가기도 쉽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적 주변의 환경과 그로 인해 형성된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지 않은 영향으로 태어난다. 그 중심에 켄지가 놓여있고 말이다. 항상 시작은 큰 것에 있지 않다.

도대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선은 어디까지이고, 악은 어디까지인가?! 아니, 어쩌면 선과 악이라는 그 개념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그와 다른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로인해 또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모순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연쇄살인이라는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있지만, 결국 그 자체도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모습들 중의 한 형태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형태의 어떤 마음으로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어둠뿐이고, 또 우리가 손을 내미는 것이 어둠뿐일까?! 우리는 그런 어두운 현실만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책이 두꺼운 만큼 읽기에도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뭔가가 나를 점점 책 속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렇게 힘들지만도 않았다. 단지, 읽어 내려가다 가끔씩 어색한 문장으로 인해 막혔던 것은 나의 문장 이해력이 딸리는 이유가 전부일까?! 어쨌든, 이 한 권의 책이 ‘켄지 & 제나로 시리즈’ 와의 만남, 그 시작이었지만,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씩 하나씩 읽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크게 연결된다거나 꼭 앞의 내용을 알아야지 뒤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왠지 처음부터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다보면 책의 마지막에서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느낌들이 퍼즐을 완성하듯 하나의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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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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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스미스가 나오는 영화로 《나는 전설이다》를 떠올려 본다. 인류 최후의-아마도- 생존자가 황량한 도시를 휩쓸고 다닌다. 하지만 혼자이기에 더없이 적막하기만 하다. 오죽하면 가게에 마네킹을 세워놓고 대화를 할까.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주인공에게 또 다른 생존자가 나타나고, 여차저차해서 내용은 아주 희망적으로-적어도 생존자에게 있어서는- 마무리되었던 기억이 난다. 엔딩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적어도 내가 본 영화에서는 그랬다. 그래, 영화는 그랬다. 하지만 원작은 달랐다. 원작 소설을 먼저 본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원작의 재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면서 실망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원작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만났고,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드라마적인 요소와 상상이 아닌 직접 눈앞에 펼쳐지는 적막한 세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당연히 재미도 있었다. 그런 재미를 생각하며 펼쳐 든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나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왜냐고?! 이제부터 하나씩 이야기해 봐야지….

내가 당혹감을 느낀 제일 큰 이유는 좀비와 흡혈귀라는 두 용어 구분의 모호함으로 인한 혼란이라고 할까?! 당연히 좀비를 생각했었다. 영화 《새벽의 저주》나 《28일 후》에 나오는 좀비들 말이다. 분명 내가 영화에서 봤었던 정체모를 그놈들도 분명-적어도 나의 기억으로는 그렇다- 좀비였다. 영화에 따라서 생각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뛰어다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좀비는 좀비 그 나름의 특성이 있었다. 하지만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는 좀비보다는 흡혈귀에 가깝게 그려진다. -실제로도 흡혈귀라도 한다-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데, 당연히 좀비일 것이라는 영화로 인한 나의 선입견 때문에 시작부터 어떤 혼란을 겪은 것은 아닌지…. 그와 동시에 느낀 당혹감은 재미가 없다는-적어도 시작에서는 그랬다- 사실에서 오는 것이었다.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보여주면 보여주는 대로,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장치를 그대로 생각 없이 따라다니며, 오히려 내가 좀비같이 영화를 보고 좋아하지는 않았나 생각해본다. 영화를 볼 때와 같은 그 좀비스러운 자세가, 소설의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날 혼란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당혹감으로 시작한 소설 『나는 전설이다』와의 만남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 없이 멋진 작품으로만 여겨진다.

1976년의 로버트 네빌은 서른 여설 살의, 큰 키에 평범한 인상을 가진, 영국계 독일인이다. 핵전쟁과 세균전으로 인해 세상은 버려졌다. 네빌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인간의 모습 대신에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형체를 지녔지만, 인간의 피만을 갈구하는 흡혈귀들뿐이다. 세상은 그들로 뒤덮여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은 낮에는 활동을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결국 온 세상의 낮은 네빌의 세상이다. 하지만 혼자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라는 사실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점점 그는 생을 잃어만 간다….

네빌 ㅡ. 그는 결코 전설도, 영웅도 아니다. 단지, 외로움을 아는 한 남자일 뿐이다. 남들과 똑같이 고독함을 느끼고,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생존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했다가, 금방 좌절하기도 하고 또다시 금방 일어서기도 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단지 그는 홀로 남겨졌을 뿐이다. 흡혈귀들이 활동을 하지 않는 낮 시간에만 밖으로 돌아다니고, 밤이 되면 그들의 공격을 피해 그만의 피신처인 집에 들어 앉아 음악과 술, 담배로 적적함을 달랜다. 하루하루가 치열한 생존의 연속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네빌은 그 속에서 지루한 일상을 살아간다. 정말 묘한 공간이지 않은가?!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공간…. 만약, 네빌이 나라면, 혹은 당신이라면?! 아마, 아니 당연히 미쳐버릴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하듯 마네킹에 말을 걸고 대화를 할지도 모를 일이고, 벽보고 이야기하다가, 결국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나와 싸우면서 서서히 지쳐갈 것이다. 네빌 역시 다르지 않다. 흡혈귀를 향해 증오를 날리면서도 결국은 그 자신에게-혹은 이제는 사라진 전 인류에- 그 증오와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 P221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에 따라 그 세상도 달라진다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네빌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선을 달리한다. 술과 담배로만 달아나던 모습에서 희망을 찾아 나서고, 다시 절망한다. 그러다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운 희망을 느끼지만, 곧 다시 절망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안고 온다. 바로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공포에 적응하고, 더 큰 공포인 단조로움을 이해하면서 그 속에서 평화를 찾아내는 대단함을 보인다. 그렇게 그는 희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 “나는 전설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에서 느꼈던-혹은 보통의 영화에서 느끼는- 단순한 즐거움만을 찾으려고 한다면 이 작품은 한 없이 지루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선입견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버리고, 네빌의 복잡한 생각 하나하나를 쫓아가고, 나의 생각으로 바꿔낼 수 있다면 더없이 큰 즐거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스티븐 킹을 소설로 이끌기도 하고, 현대 좀비물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는 이 작품, 『나는 전설이다』 ㅡ. 좀비, 흡혈귀 따위가 나오는 책과 영화를 왜 읽고, 보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이 책부터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인류의 마지막, 나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볼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 『나는 전설이다』 에는 한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이외에도 10편의 단편들이 함께하고 있다. 아무래도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중심이 《나는 전설이다》이다보니 이야기가 그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해서 그냥 지나칠 만한 이야기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리처드 매드슨’이 어떤 신기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 궁금증은 직접 만나보고 해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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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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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점점 추리/미스터리와 같은 장르소설로 빠져들게 만든다.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의문을 가지고, 그 답을 찾아보며, 이런저런 상상에 빠질 여지가 많은 그런 장르의 작품들의 세상으로 말이다. 그런 면으로 볼 때 『13계단』은 정말 멋진 작품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강력하게 나를 이끄는 흡인력과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밀한 구성, 거칠 것 없으면서도 세련되게 꾸며진 문장과 재치 있는 대사 처리,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를 아우르는 각 종 제도와 관계들 까지… 그 무엇 하나 놓칠 것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이쯤 되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이고,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읽어야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봐도 충분히, 아니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13계단』이 될 테니까……. 그래도 그냥, 소재가 “사형”에 관한 것이라는 정도만 슬쩍 말해야 할까?! 

 

그러한 일련의 관찰에서 난고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가 죄를 참회했다 해도,
이는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이었다.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회오의 정(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유인해 냈다는 공교로운 현상 말이다.  - P184
 

 

의도와는 다른 결과라고 해야 하나… 책에서 언급되는 응보형과 목적형 사상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 지 뒤죽박죽 복잡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사형”에 대해서 했었던 생각들을 돌아보면, 찬성이냐 반대냐를 너무나도 단편적인 지식들만을 가지고 판단해 왔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찬성이나 반대라는 명제에만 집착해서 그 제도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솔직히 말해서 사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13계단』을 다 읽은 지금이지만, 그에 대한 생각들이 정리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괜히 읽었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13계단』의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많은 생각들을 안겨준 것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 

 

『13계단』을 읽으면서 문득 몇 몇 영화들이 생각이 났다. 사형 제도의 반대를 강력하게 외치던 《데이비드 게일》과 같은 영화들……. 실제 목숨을 바치면서 사형 제도의 맹점을 파고들어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13계단』은 어느 쪽이 옳다고 어느 쪽으로 가야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냥 던져줄 뿐이다. 

 

사무라 미츠오의 기소 사실에 대해서는 검찰 내부에서 격론이 오고 갔다.
날조 증거에 의해 준이치를 처형시키려 했던 것이 살인 미수죄
혹은 살인 예비죄에 해당되는지의 여부.
만약 그렇다면, 교수형이라는 행위 자체가
형법의 구성 요건인 '살인'에 해당되는 게 아닌가.  - P356
 

 

《세븐데이즈》라는 영화도 스쳐지나갔다. 어린이 유괴라는 또 다른 범죄를 자신의 ‘사적인 보복’을 감행하는 피해자의 어머니가 보이는 영화. 그 영화를 보면서도, 『13계단』을 보면서도 “과연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사적인 보복(혹은 사형)’은 결국 피가 피를 부르듯 또 다른 보복을 부른다”는 피할 수 없는 답은 얻게 된다. 

 

『13계단』은 그냥 단순히 “사형”제도 만을 다룬 소설은 아니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형이라는 중죄를 받을 만큼의 커다란 범죄(살인)로 인한 피해자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의 이야기, 전과자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다룬다. 남겨진 사람들의 범죄자들을 향한 분노와 용서, 사형의 집행은 또 다른 살인이 아닌가에 대한 고뇌, 전과자로서 타인의 눈치를 봐가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 등에 대한 다각도의 생각들을 하게끔 한다.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이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 이전으로 돌아가서, 문제 자체를 제거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면 될 것이라는 단순하면서도 가장 멍청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단순하면서도 멍청한 결론으로 인해 또다시 혼란에 사로잡힌다. 단순하지만 또다시 복잡하게만 느껴진다. 모순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그런 현실을 오늘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도 힘겹게… 이렇게 힘겨운 질문으로 힘겨운 오늘날의 모습을 절실하게 느끼게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가 당장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 무엇도 『13계단』을 통해서 느끼는 재미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후회 없는 선택, 『13계단』과의 만남을 꼭 한 번은 가져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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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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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고, 알려지면서 항상 하게 되는 고민이 있다. 영화를 먼저 볼 것인가, 책을 먼저 볼 것인가, 하는 고민 말이다.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실망을 많이 했었던 지난 대부분의 경험에 따라, 보통은 영화를 먼저 보고는 했었다. 맛있는 것을 제일 나중에 먹으려고 살짝 남겨두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용의자 X의 헌신』에 대한 나의 선택 또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 물론 『용의자 X의 헌신』같은 경우 책으로 먼저 알려지고 영화는 그 후에 나왔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거의 비슷한 시점에 알게 되었으니,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시길…)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지난 경험에 따라 정해진 나름의 규칙(?)이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한다. 장르가 추리/미스터리 같이 무한한 상상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무작정 이야기를 따라가는 영화보다는 역시 책이 제 맛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영화로 인해 모든 스토리를 아는 상태(대부분 책과 영화는 스토리가 조금씩 다르게 진행되기도 하는데, 『용의자 X의 헌신』같은 경우 거의 비슷했다.)에서 책을 봐서 일까, 김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사실 『용의자 X의 헌신』은 영화도 책만큼이나 훌륭했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는 즐거움을 영화 때문에(?) 뺏겼다고 생각하니 살짝 억울한 감이 들기도 했다. 뭐, 횡설수설 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그만큼 『용의자 X의 헌신』이 멋진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완벽한(?!) 알리바이로 수사의 맹점을 파고드는 천재 수학자(수학 선생이기도한…) ‘이시가미’와 냉정하리만큼 이성을 앞세우는 물리학자 ‘유가와’의 대결(?!)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용의자 X의 헌신』은 혹시나 하게 될지도 모르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 모든 행동을 실제도 행하게 하는 ‘이시가미’의 완벽함을 보는 재미와 ‘이시가미'의 행동을 보고, 그것을 단서삼아 문제를 파고드는 ‘유가와’의 능력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한 작품이다. 완벽한 추리나 스릴러를 예상했던 나에게 생각보다 은밀하고, 스릴있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전해주지는 못했지만(이건 순전히 다른 예상을 했던 나의 잘못이니 넘어가자.), 그와는 전여 다른 재미를 전해주는 작품이라 할 만 하다.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착각하기 쉬운 맹점을 살짝 찔러주지요.”
“아, 맹점 말이군요.”
“예를 들면 기하학 문제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함수 문제라는 식이죠.” - P276

 

이 책의 띠지에는 “이건 추리소설로 위장한 거룩한 사랑의 기록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절대 공감한다. 사실,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미스터리 또는 천재 수학자와 천재 물리학자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또는 헌신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이란 더 큰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본다”라고 하는 것은, 대결에 초점을 맞춘 광고에 현혹(?!)되어 제목만 봐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을 그냥 지나쳤다는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면서도, 그 벼랑 밑으로 곧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이유 없는… 그래서 ‘무조건’이라는 말밖에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행동들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그 ‘이유 없음’ 이라는 것이 단지 누군가의 언어로 표현되지 못할 뿐,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것. 타인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랑의 이유가 사실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든, 타인을 위한 사랑이든,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말은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열정 가득한 사랑을 동경하고 꿈꾸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느끼는 사랑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많은 이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사랑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반대편의 생각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작은 행동이 생각 없는 행동으로 바뀌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사랑이나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빛나겠지만, 그 사랑과 희생, 헌신이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라면 그런 것들이 과연 그 이름 그대로 빛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을 누군가가 사랑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사랑은 누구를 위한 사랑일까, 라는 생각까지……. 

 

뭐 어떤 것이라도 좋다. 타인을 위하든, 자신을 위하든,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저 좋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나와 내 주위 사람이 아닌 타인을 조금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차마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말은 못하겠다)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고, 또한 그것이 많이 필요한 오늘날의 세상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 어떤 것에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그래서 그 단어 스스로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모습의 사랑이 가득한,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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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장점숙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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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으로 증대한 노인 인구를 조절하고, 젊은 사람들의 노인 부양 부담을 경감시키고, 파산직전의 국민연금제도를 유지시키며, 저출산 추세를 상대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하는 ‘노인 상호처형제도’, 일명 ‘실버 배틀’이라는 제도가 실시된다. 지정된 지구 내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서로를 죽이게 만들어 살아남은 단 한 사람에게만 그 남의 생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일정 연령이상이면 더 이상의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 따위도 상관없다. 종교도 더 이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죽고, 죽이는 일 뿐이다. 살기위해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면서 그 시간들을 채운다. 설사 단 한 사람이 되어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것이 신체든 정신이든- 죽게 된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죽거나, 죽이거나 단 둘 중에 하나다.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런 상황이 펼쳐진다. 『인구 조절 구역』이라는 책 속의 세상에서…….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처참하게만 느껴지는 ‘노인 상호처형제도’이다. 정말 이런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이것이 결코 최고의 선택이 되지도, 최선의 선택이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 또 모르지. 국가만을 외치는 사람이나, 자신은 절대 나이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최선일지도… 일단은, 막연한 상상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상황들을 들여다보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그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고 또 다른 생각들을 이어나가는 것이 나을듯하다.

『인구 조절 구역』에서는 ‘실버 배틀’을 치러야 하는 다양한 사람들-물론 결국에는 살아남게 되는 단 한 명의 주인공이 있기는 하지만-, 노인들과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버 배틀 이라는 잔혹한 공간에 할 수 없이 떨어지게 된 노인 당사자들부터, 그들의 배우자, 아들, 딸, 손자, 손녀 그리고 그 외 보통의 사람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를 다니며 그 처참한 공간 속에 던져진 채로 살아가는 어린 아이들까지… 물론 당사자 외에 사람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린 아이들은 그 공간에 놓여 있다는 그 자체로도, 과연 그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울까 싶은 걱정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이야기의 중심은 노인들이다. 따라서 『인구 조절 구역』의 주된 이야기도 역시 노인들의 이야기이다. 실버 배틀이 진행되는 시간동안 여기저기 지구의 다양한 노인들의 모습이 그들만의 사연을 담아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어찌 보면 생에 대한 의지초자 희미해져버린 사람들이 있고, 아무런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심지어 자신의 자손들을 방패삼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하자면 이 제도의 근본 사상은
노인이 노인인 것 그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P37


웃기는 게, 사람들은 ‘노인 상호처형제도’를 국가 정책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다.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인식하면서도 왜 그토록 따르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언젠가부터 국가정책이란 말이나 국가를 위한다는 말에 심하게 몸서리치게 된다. 그 언젠가부터 국가라는 것이 보통의 국민들을 위하는 것이 아닌 소수의 누군가를 위한 것-책속에서는 반대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이야기하지만, 결론은 다를 바 없을 것이다-이란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국가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 국가란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닌데 왜 자꾸 국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느냐 말이다. 국가의 이익이란 것도 소수의 누군가들의 이익을 정당화, 혹은 합리화 시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니 말이다. 언젠가는 아들딸 구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하더니, 또 이제는 제발 낳아라 낳아라 하고… 인간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자꾸만 꾸미려 한다는 자체가 그저 우습게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라고 욕하는 나 역시도 인간이라는 자체가 참 서글프게만 느껴진다.

앞서 언급했던 ‘노인 상호처형제도’의 다양한 취지를 이야기하면서 찬성을 하는 자들, 이 방법밖에 없으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한 번이라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냐고. 한 번이라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본다면 과연 이럴 수 있겠냐고. 나 자신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고, 나의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이며 곧 나의 일인데, 정말 그럴 수 있냐고 말이다. 내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그렇게, 아니 그토록 잔인하게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인가. 결국 그냥 나이 든 것 그 자체가 죄란 말인가?! 정말?!

지난 한해를 뒤돌아보면, 무슨무슨 ‘패륜녀’부터 시작해 ‘지하철 반말녀’까지, 참으로 패륜이란 말이 풍성한 한해였다는 생각이 든다. 패륜이란 말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그러짐. 또는 그런 현상.’이라는 뜻인데, 인간으로서 마땅해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행태가 이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함만 더해진다. 지금까지 인터넷에 나돌던 패륜들을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가보면 대부분 노인들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노인들이나 젊은이들 그 어느 한쪽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말을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터라 그래야하는 것이 맞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무조건 공경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부딪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이 세상을 가꾸어오고, 앞으로의 세상에 밑바탕을 만들어낸 수많은 사람들의 지난 삶은 당연히 공경 받아야 함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공경은 그것을 받기위한 자신의 노력이 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이 바로 서는 것이다. 아무것도 내려놓으려하지 않고 무작정 바라기만 한다면 결국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된다. 『인구 조절 구역』에서도 그런 부분은 정확하게 언급된다. 실버 배틀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에 대한 대답을 받게 되는 몇몇 노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반대로 젊은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이 세상을 가꾸어오고, 바탕을 만들어낸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뭐, 말은 쉽지만…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어른 자격증’이란 것을 만들기도 그렇고, 올바른 젊은이들의 만들어 내기위한 ‘젊은이 자격증’같은 것들을 만들기도 그렇고……. 이거, 뭐… 에휴… 

쓰하타는 우메코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발사했다.
선혈이 쓰하타의 손에 튀었다.
뜻밖에도 얼마나 뜨겁던지 펄펄 끓고 있던 게 튀었나 싶을 정도였다. -P310

실버 배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면서 서로의 ‘뜨거운 피’에 깜짝 놀라게 되는 한 가지 공통적인 반응을 보인다. 결국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병이 있든 없든, 성별이 무엇이든 , 종교가 무엇이든, 다 같은 ‘사람’인 것이다. 단지 살고 싶어 하는, 그래서 피가 펄펄 끓고 있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의 삶, 그 생(生)에 대해서 감히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전 읽은 노인문제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 인문, 사회 분야가 아닌 이 책과 마찬가지로 추리 스릴러의 장르소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런 스릴과 적나라함을 담은 『인구 조절 구역』이란 소설이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보다 한 걸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구 조절 구역』을 통해서 쉽게 대답을 구하기 힘든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리고,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고, 그것이 곧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설픈 최선보다는 최고를 계속해서 찾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삶 말이다. 그런 삶의 끝에서, 나도 언젠가는 노인으로 불릴 만큼의 나이가 들것이다. 쉽게 상상은 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나이가 들어서 살아갈 그 세상은 실버 배틀을 할 만큼의 끔찍한 세상은 아니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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