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평점 :
바야흐로 여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름’ 하면 역시나 공포, 또는 미스터리와 스릴러 작품들이 묘하게 더!더!더! 재밌게 느껴지곤 하죠. 등골을 쭈뼛하게 만들거나, 살결에 연한 소름을 돋게 만드는 범죄 이야기에 몰입하는 쾌감! 무더운 여름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미스터리/스릴러 소설들의 즐거움, 올해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거예요.
어느덧 6월이 가까워지고, 조만간 불볕더위가 또다시 우릴 괴롭게 만들겠지만…. 멋진 소설들을 읽으며 모두 올여름도 건강하게 나시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여름의 초입에서 읽을 만한 미스터리/스릴러 소설 5권입니다. : )
①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루 (권일영 옮김)
일본은 20세기 초기부터 탄탄하게 쌓여 온 훌륭한 미스터리 소설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를 필두로, 마쓰모토 세이초, 요코미조 세이시, 렌조 미키히코, 시마다 소지, 아야쓰지 유키토 등으로 이어지는 추리/미스터리의 대가들이 각 시기별로 포진해 있죠. 요즘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의 작가들도 정확히 이러한 장르적 맥락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축축하고 서늘한 늦봄의 기운이 서린 요즘, 여러분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흐름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한 권의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출간 후 20여 년 동안 한일 양국에서 엄청난 걸작이자 문제작으로 평가 받는 책, 바로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입니다.
1992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본격 탐정소설을 지향하면서도 사회적인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신본격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대세가 된 이 신본격 미스터리 소설들의 파급력은 현대 일본 추리작가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육에 이르는 병』을 <신본격>의 흐름 안에서도 가장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1)본격적인 추리소설의 문법과 2)일본의 사회적 병리를 3)치밀한 '서술 트릭'의 기법으로 완성도 높게 결합시킨 소설 본연의 가치와 재미 덕택입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한 페이지, 한 문장을 읽는 순간, 책을 읽던 우리 모두는 충격에 빠집니다. 그 충격을 예비하는 작가의 장치들은 꼼꼼하고, 지적이면서도, 집중력이 있습니다. 일본 미스터리의 역사와 정수가 압축된 느낌입니다.
②
안개 속 소녀
― 도나토 카리시 (이승재 옮김)
“그런데 소설을 보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악당이나 범인이야. 독자들은 모든 등장인물이 선하고 착한 이야기에 별로 흥미를 못 느끼거든.”
― 『안개 속 소녀』, p.378
이 책, 어마어마합니다. 책을 덮는 순간 정말이지.... 소오름!
영화로도 큰 인기를 끌었던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보다 더 묵직합니다. 범죄 행위와 그 행위를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벌거벗은 심리를 탁월하게 파고든 작품입니다. 알프스 자락의 작고 조용한 산골 마을인 아베쇼에서 10대 소녀 애나 루가 실종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안개 속 소녀』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 이후의 시간을 이중 삼중으로 오가면서 집요하게 범인을 추적합니다.
세간의 명성과 스포트라이트에 탐닉하는 포겔 형사는 단연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교활하고 비정하며, 유능하게 현실을 조종할 줄 알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거칠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술과 기회주의적인 성향의 절묘한 조합”인 자신만의 수사기법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언론매체의 1면을 장식하는 대형 사건”이 아니면 관심조차 주지 않는 스타 형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증거조작으로 무고한 사람을 연쇄살인범으로 몰아서 그 명성에 먹칠을 했고, 바로 이 아베쇼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여 ‘스타’의 위상을 회복하려 합니다.
『안개 속 소녀』를 쓴 작가 도나토 카리시는 프랑스 출생의 이탈리아 작가이자,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입니다. 연쇄살인범과 1대 1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진 실제 범죄 사건을, 비유컨대 ‘살을 직접 맞대고 분석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죠. 그는 전 세계에서 6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데뷔작 『속삭이는 자』로 이탈리아 스릴러의 제왕으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그의 작품들 중 『이름 없는 자』와 『영혼의 심판』이 번역되었고, 특히 이번 작품 『안개 속 소녀』는 <레옹>으로 유명한 배우 장 르노가 주연을 맡아 2017년 11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느낌마저 받게 됩니다.
작품을 번역한 이승재 번역가는 도나토 카리시의 소설들에 대하여 “언제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범죄와 악의 근원을 생각하게 만드는 심오한 질문과 진정한 공포를 선사하는 새롭고 놀라운 스릴러”라고 평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심오하면서도 청량한 재미가 살아있는 그의 작품들이 더 널리 읽히길 바라봅니다.
③
앨리스 죽이기
― 고바야시 야스미 (김은모 옮김)
여름이 다가오는 5월의 늦봄의 날씨는 얌전치 못하고 제멋대로입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오전엔 해가 쨍쨍했다가, 소나기가 내리더니, 흐린 하늘과 가랑비를 반복하더군요. 일교차도 커서 며칠 전 한낮의 때 이른 찜통더위가 무색하게 늦은 밤엔 무척 쌀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와 잘 어울리는 작품, 바로 일본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가 쓴 『앨리스 죽이기』입니다. 여기서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유명한 고전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바로 그 앨리스랍니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연쇄 살인마를 추적하는 앨리스, 상상이 되시나요?
약간은 얼떨떨한 소재이지만, 읽다 보면 소설 속의 환상적이면서도 잔혹한 세계에 흠뻑 빠지게 됩니다. 기억 속에서 어렴풋하게 살아 숨 쉬는 루이스 캐롤의 캐릭터들 ― 흰토끼, 체셔 캣, 험프티 덤프티, 모자 장수와 겨울잠쥐와 여왕 등등 ― 과 그들이 나누는 (마치 만담과도 같은) 유쾌한 대화, 지구 위의 현실/이상한 나라를 절묘하게 오가는 독특한 ‘평행 서사’의 구성이 독자들을 몰입시킵니다. 그래서 장르적으로는 다소 혼란스럽고 돌연변이에 속하는 이 책이 일본의 주요 미스터리 랭킹에 이름을 올리며 독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요.
구리스가와 아리라는 대학원생이 현실 속의 앨리스로 연결되는데요. 오사카 대학 기초공학부 박사 출신인 저자의 이력답게, 일본의 이공계 대학원이 작품의 배경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어딜 가나 대학원 생활은 참 쉽지 않구나, 라는 걸 알 수 있는 묘사도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후반부에 나옵니다.) 도마뱀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미스터리 소설, 루이스 캐롤의 동화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게 만드는 범죄 소설, 바로 『앨리스 죽이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