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겉 알베르 카뮈 전집 6
알베르 까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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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될 산문들이다. 해설을 제외하면 어린왕자 만큼도 안되는 미미한 양으로 보이지만, 깊게 봐야 한다. 깊게 보면 흘려듣기 쉬운 말들이 아니다. 카뮈는 "인생의 의미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인생은 단순한 것"이라고 이 책에서 선언했지만, 또 다시 그 단순함의 장면이 그다지 단순하지 않음을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행시'리뷰에서 말한 바가 있는데, 그들의 단면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산문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 리뷰에서 겉만 슥 핥은 정도에 불과하다. 그들이 가난한 데서 만족을 느끼는 이유, 부자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허무함에 빠지는 이유... 카뮈는 허무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한 한 가지 단서라고 또 말할 때. 나는 또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책은 무척 얇았으나 두려움을 갖고 읽어야 했다. 어디서 뭔가 놓칠지 모르는 중요한 부분이 숨어있을까, 하는 긴장감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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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셀라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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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엔 보기 싫었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귀찮았다. 계몽시대의 환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글이라고 하였으므로, 진부하였으므로, 산 이유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언젠가부터 읽고 있었다. 나는 시인지망생이었기에 시인과 관련된 12장부터 자연스럽게 읽었다. 그 글의 세계가 지극히 깊은 사고 위에 있었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끝까지 읽고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은 “한계”라는 것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다. 라셀라스는 방금 전 탈출한 기쁨에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지만 이믈락은 그 허무하기만한 사실을 다 알고 있다. 들쳐보면 들쳐볼 수록 허무하기만한, 인간세계의 眞實을. 겨우 몇 년 떠돌기만 했을 뿐인데, 진리를 안 듯 잘난 척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아니다. 당신과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주 조금의 충격적인 기억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그것을 내가 겪고 있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아주 흥미 있게 읽었다. 성경의 탕자비유가 아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유산을 여자와 방탕으로 털어먹은 탕자가 돌아와서 자신을 종으로 써달라는 식으로 해서 어떻게든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런 죽일 놈한테 제일 좋은 옷으로 입혀준데다, 잔치를 해줬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믈락은 유산과 동일한 재물을 재빨리 받아 그것을 불리는 데 쓰기보다는 일신의 쾌락을 위해, 혹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것을 다 써버렸다. 이것이 바로 공통점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했던 이믈락, 그는 분명히 탕자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자산을 자기 멋대로 써버린. 그가 돌아왔을 때, 성경의 하나님이 잔치를 하라고 했다면, 이믈락의 아버지는 분명히 말했다. “네 몫의 유산은 털끝만큼도 남지 않을 거”라고, 불과 몇 십 년 동안 이 지혜를 얻었다는 것은 분명히 참고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성경의 비유 중 어디에도 그 탕자가 무언가를 얻었다는 얘기는 없다.  다만 돼지밥을 먹으면서 버티려 했지만 흉년 때문에 그 돼지밥도 시원찮았다고, 그러나 『라셀라스』에서는 그것에 대한 부연설명이 충분히 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대주자”였다. 그러나 그것을 배반했다. 이믈락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의 아버지의 최대의 기대주자였다.


언젠가는 아비시니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을 자주 피력하곤 했습니다.”(45
P)


그러나 이믈락 역시 그것을 배반했다. 그러나 그것을 배반한 결과가 “없진 않다”라는 거다. 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세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빨리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탕자와 이믈락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려는 라셀라스는 좀 더 독특한 인간이다. 왕자였으나, 그 편한 생활이 싫어서 도망쳐 나온, 그러나 그의 비행의 결과는 그 이전에 봤던 왕자가 지원했으나 실패한 기술자의 비행기였던 것이다.


일 년이 지난 뒤 마침내 날개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해진 날 아침에 기술자는 비행할 채비를 갖추고 호숫가의 작은 벼랑 위에 나타났다. 그는 잠시동안 날개를 펄럭거리며 흔들어서 공기를 모은 다음 곧이어 서 있던 곳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호수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공기 중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던 그의 날개가 물속에서나마 그를 지탱해 가라앉지 않게 해주었는데, 겁에 질리고 상심하여 반쯤 사색이 된 그를 왕자가 땅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39P)

 

라셀라스의 비행도 이와 같다. 이 구절에서 말하듯 라셀라스와 이믈락의 비행은 호수 속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그것이 라셀라스를 떠받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라셀라스와 동일시 되었던 인간을, 상상력은 단지 미래를 모르는 인간의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구절은 곳곳에서 봤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죽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는 동시에, 인간을 무모한 도전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네카야의 시녀 페쿠아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잠시 그를 숨겨놓는 듯하다.  페쿠아는 피라미드에 들어가길 싫어한다. 피라미드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세계의 “희생”의 상징체이자, 죽음과 사후 부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생긴 상징물이다. 그것에서 떨어진 페쿠아는 잠시동안 그들과 여행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피라미드속 죽음의 허무함을 빼놓고는 인간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비켜나갈 수 없는 것! 죽음이 나를 삼키기 때문이다. 페쿠아는 그런 “죽음을 모르는 인간의 실체”이다. 그래서 며칠 동안 납치되어 있다가 풀려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데 왜 자꾸 실수를 하는가? 간단하다. 모르기도 하고, 나의 삶에 그것이 없기도 한 것이다.「Someday Oneday」란 노래를 아는가? 일본에서 발표한 보아 노래.


君を嫌いなわけじゃないけど

너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眞っ赤なブ-ツ,マガジン,願い事

새빨간 부츠,매거진,원하는 것

Goodbye now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을 떠나보낸다. 그 다음엔 이런 이유가 있다.


大事なものも時に空しく思えたり

소중한것도 때론 허무하게 생각되고


왜 소중한 것이 허무한가?


someday one day dreamer めぐり逢う

someday one day dreamer 돌고도는

すべて胸に染みてゆく

모든것이 가슴에 사무쳐가


돌고 도는 모든 것이 가슴에 사무쳐간다는 것이다. 라셀라스의 고민은 이것이다. 돌고 도는 모든 것이 괴롭다. 소중한 것을 가지면 가질 수록, 그것은 허무해져서 마음 속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지겨워진다는 것이다. 안다고 깝죽대지만, 이미 알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너무나 괴롭다! 추한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보고, 괴롭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심리다. 뭔가 다된 것 같으면 새로운 게 생기고 새로운 게 생긴 것 같은데 금방 묵어져 썩어버리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문유정이 그렇게 많은 아픔을 겪은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someday one day today たどり着く

someday one day today 도착했어


뜬금없이 도착하다니? 한참동안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뭔 뜻인지 알 것 같다. 이 것의 의미는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뭔지)이제야 알겠어.”라는 것이다.


枯れない花なら それでいい

시들지 않는 꽃이라면 그걸로 좋아

ずっとわすれてた君との寫眞

쭉- 잊고 있었던 너와의 사진

そっぽ向いてる君らしいよね

외면하고 있는 너 다웠지

續いてるのが不思議なくらい Baby friends or more?

계속되고 있는 게 신기 할 정도로 Baby friends or more?


자신은 시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관만 잘 하는 한, 변하지 않는 사람의 사진을 쳐다보고, 그러나 그것은 나를 외면한다. 무한히 시들지 않는 인간은 없다. 사람은 계속 변해가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천천히, 세세하게. 그러나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인간은 그 “변하지 않는다”에 집요하게 집착한다. 그 뒤로도 노래는 계속 “행복”과 “유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실망한다. 자신이 실망하는 이유도 찾지 못하면서, 자신이 바로 실망하는 이유면서.


IT'Sしょうがないオレが JOHNNY ASTRO

그건 어쩔수없어 내가 JOHNNY ASTRO

これ問きゃわかるぜ WHO'S THA NEXT V.O?

요거 들으면 알게될꺼야 WHO'S THA NEXT V.O?

B-O-A! YOU CAN ACT LIKE YOU DON'T KNOW(OH!)

WHAT'S LOVE GOT TO DO?

3月にわかるMISMACHな感覺,CAN'T STOP THE 魅惑

3월에 알게될꺼야~안 어울리는 감각, 멈출수없는 매혹

サングラスをかけるのは MUST 忘れるなME

썬그라스를 쓰면 MUST 잊지마 ME

FORGET ME NOTこの續き IT GOES

FORGET ME NOT 그 다음엔 IT GOES

(BABY BABY BABY)

SO YOU WANNA SLIDE WITHE ME,(YOU WANNA RIDE WITH ME?)


영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다가오는 매혹은 너무나 싱그럽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매혹에 빠져버리는 것인가보다…. 그러나 영원한 것에 대한 증거는 이미 소크라테스가 내민 바가 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보다,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쉽다고, 이 모든 것은 있으니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팡세』에서는 당신이 ‘하나뿐인 영생에 걸 것’이냐, 아니면 ‘나를 즐길것이냐’를 묻고 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세상들을 보면 이 세상의 우연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필연투성이고, 그 속에서의 나를 알아내고 나면, 그것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사후 나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무덤 속에서 허무하게 썩어버릴 수도 있는, 어쨌든 나의 몸은 가루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페쿠아는 사람이 죽어있는 무덤 속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번쯤은 죽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모두 지켜보고서 결국 그녀는 결말에 “수도원에 남게 된다”고 하였다. 페쿠아를 잡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모습은 마치 내장 질환의 통증에서 해방된 사람과도 같았지요.(196P)


페쿠아를 놓을 때, 도적들이 도망치는 광경이다. 도적두목도 나름대로 삶에 대해 좇는 사람이다. 페쿠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여지는 한 편 ‘이믈락’과 비슷하다. 그들은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한다. 이스마엘은 적자인 “이삭”을 괴롭힌 후 쫓겨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그들은 쫓겨나고, 자기 땅을 찾길 바랐지만, 매일매일 도적질을 하며 하루하루 생애에 부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도적 두목은 역시 이 세상 문명에 질린 사람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거니와, 백치와 같은, 예쁘기만 하고, 지식같은 것은 없는 그런 여자들에게 질려버린 것이다. 예쁜 것을 좋아하기 보다는 떠돎에 지쳐 이 세상의 진실한 지식을 찾기 원했던 것이다. 페쿠아는 그런 지식을 갖춘 여자이다. 도적 두목은 두 가지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에겐 금이 없었기 때문에 페쿠아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배고프므로 지식 따위는 쓸데가 없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는,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떠도는 인간들의 실존이다.

네카야는 단지 “자기가 아꼈던 인간을 잃은 슬픔”을 말하려고만 했던 것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체도 썼던 것 같다. 죽음을 알지 않고는 인간의 탐구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속알맹이 빠진 거짓에 불과하다는. 나는 이런 해석의 근거를 여기서 찾는다.


“시인이 할 일은 개별적인 존재나 사물이 아니라 일반적인 種을 검토하는 것, 다시 말해 보편적인 속성과 포괄적인 현상에 주목하여 그것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시인은 튤립 꽃의 줄무늬가 몇 개인지를 세거나 숲 속의 풀밭에 있는 여러 가지 색조의 차이를 묘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묘사를 할 때 뚜렷하고 두드러진 특징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본질적인 원형이 드러나게끔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사람에 따라 주목할 수도 있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그런 자잘한 차이점들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그 대신 주의 깊은 사람이든 부주의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분명하게 인식되는 그러한 보편적 특성들을 추구해야 하는 법입니다.(58~59P)

 

작자 새뮤얼은 그럼 시인일까? 그 밑에는 시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가 있다.


현재의 법이나 세속적인 견해 따위에 개의하지 않으며, 영원불변하는 일반적이고 초월적인 진실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어야 합니다(59P)


『라셀라스』는 그런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하나의 시이기도 한 것이다.

『라셀라스』의 초점은 라셀라스 하나에 있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새뮤얼의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진부하지만, 이 진부한 나를 추적해야 한다. 

결국 라셀라스가 인간 세계의 지식을 알았어도 그것의 한계를 모른 채, 그저 끝을 모르는 인간의 확장욕 때문에 끝을 알 수 없는 확장을 계속해야 했던 것과 같이. 새뮤얼의 수많은 문장 속에서 수많은 나와 충돌하여 그를 찾아내고, 라셀라스의 기술자처럼 공상만 가득하다가 결국 실전에 부닥치면 무너지고 마는 허무한 실험을 중단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 안의 새로 고쳐야 할 나를 발견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궁정에서 권태스러운 생활마저도 탈출 못한 라셀라스처럼 사는 것이다.


왜 이 작품의 이름이 『라셀라스』인가? 이 세상엔 아직도 라셀라스 투성이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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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김선우 지음 / 눌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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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읽었다. 그렇게 깊은 내용을 이해했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마음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은 한 번 봐도 힘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한 가지 사물을 집요하게 해석해내는 이 힘!

사실 나는 이 책을 리뷰로 한번 읽어보고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좀 더 보고 사려고 서점에 가서 책을 봤더니, 와, 더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으로 샀다. 그의 생각의 폭이 너무나 자유롭고 넓었기 때문이다.

거울에서 나르시소스를 떠올리기도 하고, 쓰레기통에서 억압된 사물들을 꺼내기도 하고…그의 글은 흡사 시같다. 아니 시다. 이 산문집은 그렇게 시와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또 하나의 시다.

내가 아주 절실하게 되새김질하고 있는 생각들이 모두 이 책에 나와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본다. 문단 모두를 써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끝부분만 써도 될 것 같아서 옮긴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갖가지 사물들이 실은 너무도 풍성한 말을 거느린 언어의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극진하게 들을 수 있는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


극진하게 들을 수 있는 무릎이라… 사실 김선우의 시, 아니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수다. 그의 힘은 그 곳에 있다. 모든 것을 자세히 살피고, 그것을 경청하고, 그것의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리는’ 자세.

극진, 극진이 여기선 많이도 나온다. 정말 그 말이 엄청난 말인데…. 의역을 해보면 “다 닳도록” 이란 뜻을 붙일 수 있겠다. 모든 글과 모든 사물을 해석하는데 다 닳도록 집요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이 수필집을 읽는 데만 필요한 것 일까?

아니, 대부분의 글을 읽는 데 이것은 사실상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글이 아닌 것은 안 말해도 알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이해하려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글을 읽는 것이 우선 아닐까? 그 다음에야 그의 생각을 잘 알릴 수 있고, 내 생각을 알릴 수 있다.

인터넷 신문에 보면 가끔 뜨는 MBC의 손석희 님, 가끔씩 상대를 찌르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은 너무나 핵심을 파고든 것, 아니면 약점을 절묘하게 집은 것이라서 상대가 응답할 수 없을 정도의 예리한 질문을 하는데, 그의 인터뷰 중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토론 비결은 바로 “경청”에 있다고 그는 말했다.

먼저 나를 내세우기 보다는 남을 이해하고, 그것을 더욱 깊이하여, 그와 동시에 나도 깊게 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고 그러므로 등단 몇 년 만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큰 시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더 낮은 무릎을 가져야 그만큼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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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소년
지미 지음, 이민아 옮김 / 청미래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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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시종 짧은 글로 일관한다. 그러나 별로 가벼운 느낌은 아니고, 진중하다.

행복에 대한 담론 같았다.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림 하나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글 한 줄에 생각이 굉장히 많다.

"눈 앞에 있던 것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것인가?"로 연결된다.
결국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남아있던 달은 남김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과연 나에게 있던 것이 사라지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엄청나게 짜증을 내다 결국에는 대체물로 막다가 결국에는 싫증을 낸다.

달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사람들 서로가 삭막해졌다는 것을 안다.
장인 정신을 중심으로 살다가 장삿속 중심으로 바뀐 것처럼.
한데, 왜 그럴까?
한국인이 빨리빨리 한다, 라기 보다는, 다 아는 모던타임스라는 영화를 떠올리고 싶다.
너무나 빨리 한 나머지 민망한 짓거리까지 하는 찰리 채플린. 결국은 병원행을 갔던 것도 같은데..
자본주의는 어떤 때는 굉장히 야만적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된 것이 너무 이익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예를 들어보자. 마케팅이란 것도 사람간의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상업인들이 진정 휴머니즘으로 마케팅을 하는가?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없어서 물건이 안팔리거나, 우리에게 나쁜 소문을 내면 안좋기 때문에 그렇게 친절하게 하는 것 뿐이다.

결국, 정말 성심을 다하지 않은, 혹은 눈에 띌 정도로 하지 않은 마케팅이면 가짜 달인 덤핑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유지가 무척 힘들다.
결국 버려진 달처럼 싫증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은 달빛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하지만,
그도 이미 살아갈 힘이 모자란 사람이다.
싸게싸게! 빨리빨리! 많이많이!
도대체 그것들 사이에 해답이 있는가?

휴머니즘에 의한 행복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사람은 이미 그 행복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이 책에서와 같이 너무 크다. 너무나 세상과의 괴리감과 통증이 너무 크다.
이 세상 밖에서의 고요한 행복. 그러나 이 세상안에서는 불가능하다.
U-Topia가 이상세계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든 억지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나마 행복한 우리들.
U-Topia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미쳐버렸을것이다.

그림책은 잘 안보는데,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사면서 보게 되었다. 짧은 글의 그림책에도 이런 깊이를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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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요람으로 - 세상을 보는 글들 17
윌리엄 맥도너 외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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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환경운동가가 제창해왔던 3R(Reduce, Reuse, Recycle)은 지금까지 환경을 생각하는 환경운동의 일환으로서 사람들이 영향 받은 바가 적지 않다. 거의 십여 년 동안 이 사상은 절대적으로 대한민국 전역을 지배해 왔다. 이런 절대적인 생각에게 온 몸으로 도전하는 책이 『요람에서 요람까지』 이다. 재활용은 기존 자원의 두 번 사용으로 그만큼 쓸데없이 사용되는 것을 막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그 방법은 요람에서 쓰레기통으로 가는 방식, 즉 언젠가는 문제가 발생할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재활용 종이는 그 것이 처음 사용될 즈음엔 자원의 낭비를 막았다는 생각을 할 법 하지만 그 종이에선 온갖 먼지와 유해물질, 게다가 그 방법을 반복할수록 질이 나빠진다고 한다. 이 악순환을 이 책에서는 ‘다운 사이클링’ 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다운 사이클링’ 을 하지 말고 “그 시작을 바꾸어 긍정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 고 하고 있다. 그 주장을 이 책의 재질에서 먼저 실천하여 보이고 있다. 이 책은 그냥 종이처럼 보이지만 나무로 만든 종이가 아니고 플라스틱에서 만든 종이다. 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구적으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이 좋은 방법을 이 책에서는 ‘업 사이클링’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단 이 책의 장점을 말하자면 더 나아질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못한 깊숙한 방면까지 파고 들어가 그 것의 단면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사회 자체의 단점을 끄집어낸다. 이 생각은 수많은 재활용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쓸데없는 공론에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다운 사이클링 되는 사회적 자원들, 그것을 이 책에서는 그 시작 자체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이다. 즉 “쓰레기는 곧 식량이다!” 라는 말을 모토로 이 사회의 잘못된 자원 사용의 시작을 고쳐야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이 책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상론에 그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첫 번째, 우선 이 책의 가격을 보자. 만 오천 원, 그것도 전면 262쪽. 다른 소설책이 이것과 똑같은 분량이라면 팔 내지 구천 원을 했을 정도이다. 시집이라면 세, 네 권을 샀을 가격이다. 완전 칼라에 사진까지 끼워 넣었어도 만 이천 원이 되기가 힘들다. 게다가 이 책은 흑백이다. (내 기억으로 완전 칼라였던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도 구천 원이었다.) 소설책을 취미로 사보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 가격이라면 충분히 부담을 느낄만한 가격이다. 당연히 출판 시장은 위축될 것이다. 이 것이 도서업계라는 측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이 책은 너무 시시콜콜한 것까지 걱정하고 있다. 우리가 언제 재활용 용지에서 만든 책에서 나온 유해물질을 걱정하였는가? 단지 조금 더럽다고 생각할 뿐, 그 이상은 문제없다는 듯 그 책을 읽고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유해물질을 받고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지독한 소심쟁이일 것이다. 아니, 그 가능성 자체를 뛰어넘어 누가 그런 책을 읽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상당수의 노트, 그리고 소설가 공지영 씨의 작품 『봉순이 언니』도 재활용지로 만든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다운사이클링에 의한 것이다. 물론 이 책은 “환경을 생각하여” 라는 말을 반드시 붙였다. 서로가 모순되는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한국의 도서업계는 이제 ‘느낌표’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인해 자리를 조금씩 잡아가는 판에 모든 도서를 이제부터 업 사이클링이 가능한 플라스틱 종이로 만든다? 그 결과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세 번째, 후진국을 고려하지 않았다. 수출이 증대되고 국익이 증대되는 듯 보였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환경문제를 들먹이면 성장에 방해되는 사람이라고 해서 질책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환경은 나중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째서 소설가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품 중 「기계 도시」에서 우리는 더러운 환경의 썩은 도시를 보고 있을까?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문학에서 환경문제가 거론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시대는 지나고 이제 우리는 개발 도상국에서 선진국 중간에 있다. 하지만 뒤에서 우리의 과거를 밟고 있는 아프리카나 중동, 남미에 있는 후진국들을 외면할 것인가? 그들도 분명 발전을 하고 싶고, 언젠가는 선진국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이 말하는 값비싼 시작 자체를 구현하기 어렵다. 그 대표적인 예가 브라질이다. 일본이 돈을 주면서 벌목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지구의 허파가 되는 브라질이 대량 벌목을 시작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세계 전체에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브라질은 지금도 곳곳에서 벌목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수많은 후진국가는 아직도 후진적 기술, 즉 이 책에서 말하는 다운사이클링, 혹은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회용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생활 중에서 누가 환경을 생각하고 누가 조금 더럽다는 것을 생각하는가? 오직 살아남는 것을 생각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책에서는 생태적 효과성을 실현하기 위한 다섯 가지 단계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안에는 허점이 많이 있다. 조목조목 예를 들어 여기에 대한 허점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1단계, 범죄자를 제거하라- 우리나라에서는 씨가 먹힐 수 없는 문제들이다. 원래 정해져 있었던 체계를 모두 바꾸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비경제적이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이 책에서의 사고를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는 말을 일반인에게 한다면 십중팔구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 난리야? 값 오르고 혼란스러워지는 것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낫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고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은 이상은 이런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2단계-이미 알려진 정보에 기반한 개인적 선호도를 따른다- 이 사고는 우리나라의 현재까지의 행태를 보아오면 그 허점이 절실히 드러난다. “나 하나쯤이야”로 대표된 우리나라의 이기주의, NIMBY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편한 쪽을 선택하지, 스스로 환경을 위해 불편한 쪽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3단계-‘적극적으로 긍정적인’ 리스트를 만들어라- 우리 나라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한 마디로 회의주의적이다. 새만금, 부산부근의 고속철도, 멀리 보지 않더라도 북한산 관통도로만을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행정은 환경 중심이 아니라 지역중심이다. 위도에 핵 폐기물 처리장에 들어서고 어쩌고 하는 문제, 위도 사람들이 그곳에 핵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서는 것을 절대로 반대했는가? 아니다. 일부의 환경운동가들만이 ‘절대’안정성이 없는 그 곳에 핵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을 뿐, 문제는 보상금이다. 절대적으로 지역이기주의가 판치고 있는 한은 우리나라는 그런 정책을 시행하기가 어려우리라 본다.

음식에서도 이런 문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산을 국산으로 둔갑시켜 파는 경우는 우리나라에 아주 흔하다. 이익 중심인 것이다. 이익이 아니라면 우리나라가 손 댈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4단계- 긍정적 리스트를 충분히 활용하라- 3단계에서 했던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이 단계에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쥐어짜서 뭔가 대안이 나온다면 즉각 실행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고 본다.

5단계- 재창조하라 - 우리나라는 다운사이클링(DownCycling)에 절대 의존하고 있다. ‘기본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나라는 절대 다운사이클링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요즘 잘 나오는 재활용 권장의 광고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비관적 사고로 바뀌었다. 우리나라가 환경문제에 더 신경을 쓴다면 몰라도, 이 상황은 너무나 타개가 힘든 상황이다.

네 번째, 대한민국의 사고에 약간 맞지 않는다. 체리나무 이야기를 했는데, 대한민국 가로수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가 거의 없다. 이유는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 책에서는 사람들이 밟아 넘어질 우려 때문에 체리나무 식수를 금지했다고 했다. 원전을 그대로 번역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생활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시골에서 듣는다면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판이다. 체리나무,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은행이나 복숭아, 딸기 등, 그런 것이 떨어져서 미끄러져 사람이 넘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원래는 농촌에 어린 아이가 드물어서 그런 일이 잘 발생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무슨 말이 나올까? 대번에 놀림감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너무 세심한 걱정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후진국, 혹은 빈민층에 대한 고려’가 있었으면 하고, ‘이상론이 아닌가 점검도 필요하다’ 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책, 아니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일부 책에 대해 논하자면,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을 찾는 도중, 우리가 쓰고 있는 자원의 비관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내용의 책이 있다. 지금 이대로만 써도 지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고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에 의존한 책이다. 제목은 『회의적 환경주의자』, 그 책은 더더욱 비싸다. 오만 원. 무슨 대학교 전문서적 내지 두꺼운 백과사전 값도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는 책일 뿐이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서나 빌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굵은 책 아니 (그것을 따지기 전에) 비싼 책으로 자기 생각이 널리 퍼지길 바란다면 무리일 것이다. 이런 책이 많이 팔리길 바란다면 소도 웃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너무 비대중적이 아닌가? 이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관악기를 불 때, 딴 사람이 듣게 하려면 크게 불어야지 작게 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적어도 이 책들의 비싼 가격은 이 사상이 일부 상류 내지 중류층에 머물게 하고 있다. 하류층 사람, 혹은 후진국 사람에게는 좀 센말로 한다면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있네, 그렇게 편하게 누워서 배 뚜들기면 재밌으시우?” 라는 소리를 들어야 싸다는 이야기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적어도 경제적인 차원이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멀었다. 사람들의 사고를 고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런 문제는 조금씩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때, 우리나라의 고질병, ‘밀어붙이기 행정’이 있다. 박정희 집권 후부터 거의 3~40년, 그런 식으로 행정이 진행되어 왔다. 우리나라가 이익을 본 것도 있겠지만, 엄청난 환경의 대미지를 감수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환경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런 면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절대로 없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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