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셀라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6
새뮤얼 존슨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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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엔 보기 싫었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귀찮았다. 계몽시대의 환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글이라고 하였으므로, 진부하였으므로, 산 이유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언젠가부터 읽고 있었다. 나는 시인지망생이었기에 시인과 관련된 12장부터 자연스럽게 읽었다. 그 글의 세계가 지극히 깊은 사고 위에 있었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끝까지 읽고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은 “한계”라는 것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다. 라셀라스는 방금 전 탈출한 기쁨에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지만 이믈락은 그 허무하기만한 사실을 다 알고 있다. 들쳐보면 들쳐볼 수록 허무하기만한, 인간세계의 眞實을. 겨우 몇 년 떠돌기만 했을 뿐인데, 진리를 안 듯 잘난 척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아니다. 당신과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주 조금의 충격적인 기억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그것을 내가 겪고 있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아주 흥미 있게 읽었다. 성경의 탕자비유가 아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유산을 여자와 방탕으로 털어먹은 탕자가 돌아와서 자신을 종으로 써달라는 식으로 해서 어떻게든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런 죽일 놈한테 제일 좋은 옷으로 입혀준데다, 잔치를 해줬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믈락은 유산과 동일한 재물을 재빨리 받아 그것을 불리는 데 쓰기보다는 일신의 쾌락을 위해, 혹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것을 다 써버렸다. 이것이 바로 공통점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했던 이믈락, 그는 분명히 탕자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자산을 자기 멋대로 써버린. 그가 돌아왔을 때, 성경의 하나님이 잔치를 하라고 했다면, 이믈락의 아버지는 분명히 말했다. “네 몫의 유산은 털끝만큼도 남지 않을 거”라고, 불과 몇 십 년 동안 이 지혜를 얻었다는 것은 분명히 참고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성경의 비유 중 어디에도 그 탕자가 무언가를 얻었다는 얘기는 없다.  다만 돼지밥을 먹으면서 버티려 했지만 흉년 때문에 그 돼지밥도 시원찮았다고, 그러나 『라셀라스』에서는 그것에 대한 부연설명이 충분히 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대주자”였다. 그러나 그것을 배반했다. 이믈락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의 아버지의 최대의 기대주자였다.


언젠가는 아비시니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을 자주 피력하곤 했습니다.”(45
P)


그러나 이믈락 역시 그것을 배반했다. 그러나 그것을 배반한 결과가 “없진 않다”라는 거다. 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세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빨리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탕자와 이믈락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려는 라셀라스는 좀 더 독특한 인간이다. 왕자였으나, 그 편한 생활이 싫어서 도망쳐 나온, 그러나 그의 비행의 결과는 그 이전에 봤던 왕자가 지원했으나 실패한 기술자의 비행기였던 것이다.


일 년이 지난 뒤 마침내 날개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해진 날 아침에 기술자는 비행할 채비를 갖추고 호숫가의 작은 벼랑 위에 나타났다. 그는 잠시동안 날개를 펄럭거리며 흔들어서 공기를 모은 다음 곧이어 서 있던 곳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호수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공기 중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던 그의 날개가 물속에서나마 그를 지탱해 가라앉지 않게 해주었는데, 겁에 질리고 상심하여 반쯤 사색이 된 그를 왕자가 땅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39P)

 

라셀라스의 비행도 이와 같다. 이 구절에서 말하듯 라셀라스와 이믈락의 비행은 호수 속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그것이 라셀라스를 떠받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라셀라스와 동일시 되었던 인간을, 상상력은 단지 미래를 모르는 인간의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구절은 곳곳에서 봤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죽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는 동시에, 인간을 무모한 도전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네카야의 시녀 페쿠아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잠시 그를 숨겨놓는 듯하다.  페쿠아는 피라미드에 들어가길 싫어한다. 피라미드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세계의 “희생”의 상징체이자, 죽음과 사후 부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생긴 상징물이다. 그것에서 떨어진 페쿠아는 잠시동안 그들과 여행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피라미드속 죽음의 허무함을 빼놓고는 인간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비켜나갈 수 없는 것! 죽음이 나를 삼키기 때문이다. 페쿠아는 그런 “죽음을 모르는 인간의 실체”이다. 그래서 며칠 동안 납치되어 있다가 풀려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데 왜 자꾸 실수를 하는가? 간단하다. 모르기도 하고, 나의 삶에 그것이 없기도 한 것이다.「Someday Oneday」란 노래를 아는가? 일본에서 발표한 보아 노래.


君を嫌いなわけじゃないけど

너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眞っ赤なブ-ツ,マガジン,願い事

새빨간 부츠,매거진,원하는 것

Goodbye now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을 떠나보낸다. 그 다음엔 이런 이유가 있다.


大事なものも時に空しく思えたり

소중한것도 때론 허무하게 생각되고


왜 소중한 것이 허무한가?


someday one day dreamer めぐり逢う

someday one day dreamer 돌고도는

すべて胸に染みてゆく

모든것이 가슴에 사무쳐가


돌고 도는 모든 것이 가슴에 사무쳐간다는 것이다. 라셀라스의 고민은 이것이다. 돌고 도는 모든 것이 괴롭다. 소중한 것을 가지면 가질 수록, 그것은 허무해져서 마음 속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지겨워진다는 것이다. 안다고 깝죽대지만, 이미 알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너무나 괴롭다! 추한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보고, 괴롭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심리다. 뭔가 다된 것 같으면 새로운 게 생기고 새로운 게 생긴 것 같은데 금방 묵어져 썩어버리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문유정이 그렇게 많은 아픔을 겪은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someday one day today たどり着く

someday one day today 도착했어


뜬금없이 도착하다니? 한참동안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뭔 뜻인지 알 것 같다. 이 것의 의미는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뭔지)이제야 알겠어.”라는 것이다.


枯れない花なら それでいい

시들지 않는 꽃이라면 그걸로 좋아

ずっとわすれてた君との寫眞

쭉- 잊고 있었던 너와의 사진

そっぽ向いてる君らしいよね

외면하고 있는 너 다웠지

續いてるのが不思議なくらい Baby friends or more?

계속되고 있는 게 신기 할 정도로 Baby friends or more?


자신은 시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관만 잘 하는 한, 변하지 않는 사람의 사진을 쳐다보고, 그러나 그것은 나를 외면한다. 무한히 시들지 않는 인간은 없다. 사람은 계속 변해가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천천히, 세세하게. 그러나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인간은 그 “변하지 않는다”에 집요하게 집착한다. 그 뒤로도 노래는 계속 “행복”과 “유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실망한다. 자신이 실망하는 이유도 찾지 못하면서, 자신이 바로 실망하는 이유면서.


IT'Sしょうがないオレが JOHNNY ASTRO

그건 어쩔수없어 내가 JOHNNY ASTRO

これ問きゃわかるぜ WHO'S THA NEXT V.O?

요거 들으면 알게될꺼야 WHO'S THA NEXT V.O?

B-O-A! YOU CAN ACT LIKE YOU DON'T KNOW(OH!)

WHAT'S LOVE GOT TO DO?

3月にわかるMISMACHな感覺,CAN'T STOP THE 魅惑

3월에 알게될꺼야~안 어울리는 감각, 멈출수없는 매혹

サングラスをかけるのは MUST 忘れるなME

썬그라스를 쓰면 MUST 잊지마 ME

FORGET ME NOTこの續き IT GOES

FORGET ME NOT 그 다음엔 IT GOES

(BABY BABY BABY)

SO YOU WANNA SLIDE WITHE ME,(YOU WANNA RIDE WITH ME?)


영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다가오는 매혹은 너무나 싱그럽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매혹에 빠져버리는 것인가보다…. 그러나 영원한 것에 대한 증거는 이미 소크라테스가 내민 바가 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보다,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쉽다고, 이 모든 것은 있으니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팡세』에서는 당신이 ‘하나뿐인 영생에 걸 것’이냐, 아니면 ‘나를 즐길것이냐’를 묻고 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세상들을 보면 이 세상의 우연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필연투성이고, 그 속에서의 나를 알아내고 나면, 그것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사후 나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무덤 속에서 허무하게 썩어버릴 수도 있는, 어쨌든 나의 몸은 가루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페쿠아는 사람이 죽어있는 무덤 속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번쯤은 죽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모두 지켜보고서 결국 그녀는 결말에 “수도원에 남게 된다”고 하였다. 페쿠아를 잡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모습은 마치 내장 질환의 통증에서 해방된 사람과도 같았지요.(196P)


페쿠아를 놓을 때, 도적들이 도망치는 광경이다. 도적두목도 나름대로 삶에 대해 좇는 사람이다. 페쿠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여지는 한 편 ‘이믈락’과 비슷하다. 그들은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한다. 이스마엘은 적자인 “이삭”을 괴롭힌 후 쫓겨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그들은 쫓겨나고, 자기 땅을 찾길 바랐지만, 매일매일 도적질을 하며 하루하루 생애에 부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도적 두목은 역시 이 세상 문명에 질린 사람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거니와, 백치와 같은, 예쁘기만 하고, 지식같은 것은 없는 그런 여자들에게 질려버린 것이다. 예쁜 것을 좋아하기 보다는 떠돎에 지쳐 이 세상의 진실한 지식을 찾기 원했던 것이다. 페쿠아는 그런 지식을 갖춘 여자이다. 도적 두목은 두 가지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에겐 금이 없었기 때문에 페쿠아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배고프므로 지식 따위는 쓸데가 없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는,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떠도는 인간들의 실존이다.

네카야는 단지 “자기가 아꼈던 인간을 잃은 슬픔”을 말하려고만 했던 것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체도 썼던 것 같다. 죽음을 알지 않고는 인간의 탐구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속알맹이 빠진 거짓에 불과하다는. 나는 이런 해석의 근거를 여기서 찾는다.


“시인이 할 일은 개별적인 존재나 사물이 아니라 일반적인 種을 검토하는 것, 다시 말해 보편적인 속성과 포괄적인 현상에 주목하여 그것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시인은 튤립 꽃의 줄무늬가 몇 개인지를 세거나 숲 속의 풀밭에 있는 여러 가지 색조의 차이를 묘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묘사를 할 때 뚜렷하고 두드러진 특징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본질적인 원형이 드러나게끔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사람에 따라 주목할 수도 있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그런 자잘한 차이점들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그 대신 주의 깊은 사람이든 부주의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분명하게 인식되는 그러한 보편적 특성들을 추구해야 하는 법입니다.(58~59P)

 

작자 새뮤얼은 그럼 시인일까? 그 밑에는 시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가 있다.


현재의 법이나 세속적인 견해 따위에 개의하지 않으며, 영원불변하는 일반적이고 초월적인 진실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어야 합니다(59P)


『라셀라스』는 그런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하나의 시이기도 한 것이다.

『라셀라스』의 초점은 라셀라스 하나에 있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새뮤얼의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진부하지만, 이 진부한 나를 추적해야 한다. 

결국 라셀라스가 인간 세계의 지식을 알았어도 그것의 한계를 모른 채, 그저 끝을 모르는 인간의 확장욕 때문에 끝을 알 수 없는 확장을 계속해야 했던 것과 같이. 새뮤얼의 수많은 문장 속에서 수많은 나와 충돌하여 그를 찾아내고, 라셀라스의 기술자처럼 공상만 가득하다가 결국 실전에 부닥치면 무너지고 마는 허무한 실험을 중단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 안의 새로 고쳐야 할 나를 발견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궁정에서 권태스러운 생활마저도 탈출 못한 라셀라스처럼 사는 것이다.


왜 이 작품의 이름이 『라셀라스』인가? 이 세상엔 아직도 라셀라스 투성이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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