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그것은 물같은 사랑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음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 가족은 닮는다. 유전적 영향도 있겠지만, 부부의 경우는 엄연히 남남이다. 그런 그들이 닮게 되는 건 모두 음식 때문이다. 음식을 만들 때는 정성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 음식이란 얼마나 미묘한 것인지 늘 만들었던 음식을 똑같은 방법으로 했는데도 만들던 순간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면 음식은 제 맛이 나지 않는다. 이건 분명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의 속성처럼. 

막내딸이 엄마를 모셔야 한다는 전통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면 나는 티타가 찾아낸 부엌의 세계 말고 어떤 것을 찾아야 했을까. 그런 운명에 처했다면 조금은 재밌었겠다 싶은 건 나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자명한 현실때문이겠지. 그래도 그 전통이 있었다면 나는 천형을 받은 몸처럼 반항은 커녕 일언반구 꺼내지도 못하고 받아들였을 것 같다. 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과 동호회를 꾸며 신세 한탄에 열중이었을 지도... 멕시코에는 막내딸이 엄마를 모셔야 한다는 전통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셋째딸 (=막내딸) 이 이쁘다는 전통(?) 이 있으니 다행중 다행이다. 

티타를 사랑하는 페드로는 티타와 함께 도망갈 생각 대신 티타의 곁에 있기 위하여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한다. 티타의 엄마 마마 엘레나는 번번히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고 집안의 전통을 지키려 한다. 큰언니 헤르트루디스는 티타가 만든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 를 먹고 몸에 강렬한 변화를 느낀다. 그녀의 몸에 깃들인 장미향은 멀리 퍼져 나가고 그 향을 맡은 혁명군의 대장이 나신의 헤르트루디스를 말에 태워 떠난다. 티타가 만드는 음식들은 묘한 성적 흥분제 역할을 한다. 곧 페드로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음식 속에 발현되어 그 음식을 먹은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기운이 스며들게 한다. 티타의 요리는 마력이다.

티타와 페드로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발견한 듯했다. 그 안에서 티타는 발신자, 페드로는 수신자였으며, 불쌍한 헤르트루디스의 몸은 그들의 성적인 메시지가 지나가는 매개체였다. 

티타가 페드로와 로사우라의 결혼식에 만든 차벨라 웨딩 케이크를 먹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케이크를 한 입 깨무는 순간 그리움에 휩싸인다. 케이크를 만들면서 티타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객들은 슬픔과 좌절감에 젖어들고 흩어져서 구역질을 한다. 티타의 마음은 요리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얼마나 정직한 표현인가. 열 두 개의 장에는 메인 요리의 재료와 필요한 양이 상세히 씌여져 있다. 좋은 재료는 물론이고, 재료를 손질 보관 하는 방법과 정확한 사용량도 적혀 있어 언제 한번 시도해도 좋을 것 같다. 

티타와 페드로는 엄격한 마마 엘레나의 눈을 피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만 그럴때마다 그들의 마음을 읽어버리는 마마 엘레나에게 들킨다. 마마 엘레나는 가혹하게 티타를 대하고 티타는 전통에 대항하듯 운명의 부당함을 강하게 호소한다. 케이크를 다 먹을 때 까지 식탁을 뜰 수 없다는 규칙, 호두 소스로 얹은 칠레고추를 한 개 쯤 남겨두어야 하는 체면도 티타의 목을 조르기는 마찬가지다. 티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거부하고, 마마 엘레나는 갖가지 트집으로 티타를 옭아 매려 한다. 티타를 흠모하고 있던 브라운 박사는 티타를 거둬들이고 슬픔에 빠진 그녀를 치료한다. 인디언 혈통을 이어 받은 브라운 박사가 들려준 성냥 만드는 방법은, 인간이 창조해 낸 물질의 비법이 곧 우리의 생애와 닮아 있음을 보여준다. 

아주 강렬한 흥분을 느껴서 우리 몸 안에 있던 성냥들이 모두 한꺼번에 타오르면 강렬한 광채가 일면서 평소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 그 이상이 보이게 될 겁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잊어버렸던 길과 연결된 찬란한 터널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거고요. 그곳은 우리가 잃어버린 신성한 근본을 다시 찾으라고 손짓할 겁니다. 영혼은 축 늘어진 육체를 남겨둔 채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할 테고요....

마마 엘레나는 죽은 뒤에도 유령이 되어 끈질기게 티타를 괴롭힌다. 유령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강한 티타. 티타는 요리를 만들면서 자신의 사랑을 키우고 스스로 성장했다. 결국 유령은 티타를 이기지 못하고 한 줄기 빛이 되어 페드로의 몸을 관통해 화상을 입힌다. 세월이 흘러 로사우라가 죽은 뒤 로사우라의 딸 에스페란사와 브라운 박사의 아들이 결혼을 한다. 그 날, 이십년을 흘려 보낸 안타까운 연인들도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그들의 마지막은 아름다웠으나 눈물겨웠다. 사랑은 정말 힘이 세다.   

티타가 오래도록 만들었던 음식도 대대로 내려오는 데 라 가르사 집안만의 전통적인 비법이다. 하지만, 요리사는 티타. 집안의 전통을 강하게 부정했고, 벗어나려 했던 티타였다. 티타는 가혹한 전통 안에서 물려받은 전통 요리를 만들어내면서 전통을 사라지게 하였다. 요리 방법에 씌여지지 않은 재료가 있다면 "물" 이다. 물은 필수품이라서 빼놓은 것일수도 있겠지만, 티타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요리에 빠질 수 없는 재료인 동시에 모든 재료를 아우르는, 물. 티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물 처럼 모든 요리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고 티타의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울거나 웃었다. 요리로 사랑을 표현하고 요리로 삶을 표현한 위대한 작품을 만나 나는 행복하다. 다섯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티타의 요리와 생은 마력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호밀밭 > "사랑한다."라는 말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쓰나미가 세상을 뒤집었다. 사람들이 마음 속에서 늘 그리워하는 잔잔한 바다가 때로는 사람에게 지옥을 보여 줄 수도 있다. 자꾸만 보고 싶은 바다가 사실은 사람들의 생명이 담긴 눈물일 수 있다는 것, 이번에 알았다. 쓰나미 때문에, 그리고 <파이 이야기> 때문에.

파이라는 별명을 가진 인도 소년이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배를 타고 가던 중 배가 침몰한다. 그 배가 침몰하면서 소년은 구명보트를 타고 태평양에 남겨진다.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 호랑이와 함께. 그리고 소년은 마지막으로 남은 동물인 호랑이(리처드 파커)와 함께 227일을 버티고 살아남는다.

몇 줄로 책의 내용을 적으니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1번 냉장고 문을 연다. 2번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다. 3번 냉장고 문을 닫는다.
<파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1번 소년이 탄 배가 침몰한다. 2번 소년은 호랑이와 동물들과 구명보트에 탄다. 3번 소년과 호랑이만이 살아남는다. 4번 소년과 호랑이는 227일을 태평양에서 보내고 살아남는다.

이 소설은 <1번 소년이 탄 배가 침몰한다>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3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분량으로 보면 2부, 1부, 3부 순으로 내용이 길다. 1부는 주인공 파이가 부모님, 형과 함께한 평탄한 소년 시절이 나온다. 아버지는 동물원을 운영하고, 파이는 많은 동물들을 보고 자라며,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신을 사랑하는 소년으로 성장한다. 파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에 나오는 3.14를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별명으로 만든 것이다. 스스로 붙인 별명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호랑이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가 된 사연도 무척 재미있다.

<2번 소년은 호랑이와 동물들과 구명보트에 탄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동물과 사람이 한 보트에서 살 수 있을까? <3번 소년과 호랑이만이 살아남는다.> 소년과 호랑이가 한 배에서 지내게 된다면 어느 한 쪽이 죽거나 친구가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분명 양쪽 다 아니다. <4번 소년과 호랑이는 227일을 태평양에서 보내고 살아남는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바다에서 보낼 수 있었을까. 이 속에 소설의 묘미가 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나는 조난의 순간은 날카롭지만은 않다. 타이타닉호의 침몰하는 순간, 사랑에 빠진 남녀가 서로를 꼭 안고 있는 극적인 상황을 넣어 주는 것이 영화이다. 빙하에 부딪쳐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 그 절체절명의 순간, 영화는 얼음에 설탕을 쳐서 관객에게 내미는 셈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 그런 설탕은 없다. 태평양의 소금에 찌든 한 소년과 털에 윤기를 잃어 가는 호랑이가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순간순간 매우 야만적이다. 이 소설은 생존에 대한 소설이다. 테이블 보까지 씌운 식탁에서 일어나는 소설이 아니다. 태평양에서 파이가 상상하는 갠지스 강 분량의 콩 수프, 라자스탄만 한 따끈한 차파티는 온기가 있는 음식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의 식사에는 그런 온기가 없다. 파이의 배에는 불이 있을 수 없다. 파이의 227일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는 불 없이 버틴 시간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공포스러웠던 순간은 섬이 나오는 장면이다. 태평양 한가운데를 떠돌던 파이의 배가 닿은 섬은 신밧드의 모험을 읽는 듯한 환상과 공포를 주었다. 낯선 공포와 함께 섬뜩함과 나른함이 느껴졌다. 바다 깊은 곳에 용왕 대신 마왕이 지키고 있는 용궁에 들른 기분이다. 어쩌면 환상과 삶의 경계 지점이 그 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한 태평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2부가 끝나면 3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조사관들과 대면한 파이는 태평양의 소금기를 다 거둔 똑똑한 소년이다. 그는 호랑이와 함께 지냈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조사관들에게 동물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어떤 쪽이든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모든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또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다. 이야기는 스스로 몸을 틀어 이야기들을 낳는다. 다산을 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다. 파이는 그걸 알고 있다. 그는 조사관들에게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며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라고 말한다. 이해하는 대로 느낄 수 있는 이야기, <파이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외로움,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될 것이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동물들에 대한 상식과 조난 소설의 스릴을 맛볼 것이다.

바다는 파이의 배를 삼키고, 그를 가족과 이별하게 했지만 바다가 가진 생명력과 고요함을 미워할 수는 없다. 바다가 없다면 재앙도 없을 테지만 바다가 없다면 세상이 삭막할 테니까.

책을 읽을 때도 타이밍은 존재한다. 모든 사람을 감동시킨 책도 나에게는 시큰둥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내가 세상사에 관심이 없고, 내 고민만 클 때는 더더욱 그렇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 설레임을 더 많이 느낄 테고, 아기를 가진 엄마는 예쁜 그림책을 보면서 아기와의 만남을 기대할 것이다.
올해 가을부터 유독 글자가 잘 안 읽혔다.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근사한 소설 한 권을 읽고 싶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나를 다독여 줄 책이 있었으면 했다. 인도 소년의 이야기라는 점도 마음을 끌었다. 올해 있었던 일 중 따뜻한 인도에서 보낸 한 달이 나에게는 천국 같았다.

<파이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위로와 감동, 그리고 어느 소설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진한 사랑 고백을 주었다.
파이가 리처드 파커한테 한 말, "사랑한다."라는 말. 어느 누구도 이렇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 말을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터져 나온 그 말은 순수하고, 자유롭고, 무한했다. 내 가슴에서 감정이 넘쳐났다.>는 그 말, "사랑한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 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천 년 묵은 구미호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해도 가슴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간절하게 터져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태평양 한가운데 작은 배에 버려진다 해도 이렇게 애절하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살면서 절망할 일이 생기고, 캄캄함을 느끼는 일이 더 많아질 지도 모른다. 그럴 때 파이와 리처드 파커를 생각할 것이다. 파이가 리처드 파커에게 한 그 말을 떠올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절망에 찬 소년이 외친 그 말, "사랑한다."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우천왕기 6 - 풀리는 매듭
이우혁 지음 / 들녘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서점에 기웃거리다보면 꼭 반색을 하고 집게 되는 책이 있다. 옛스러운 옥색 녹색 책집 안에 빼곡히 박힌 옛이야기와 더불어 작가님의 이름 석자만으로 아직도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는 그 책, '치우천왕기'.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는 것처럼 아직은 여물지 않은 풋과실 맛이 난다. 자오지한웅의 파란만장한 생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으니... 또한 작가 이우혁씨의 독특한 서술 방식 또한 전작 퇴마록에 비해 그다지 큰 빛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시작은 아마추어였지만 지금은 직업적인 글쟁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그이다. 그 이름 석자만으로 기대치가 너무 커서 그런지 비단 내용뿐만 아니라 어휘의 선택이나 문장 구성력에 있어서도 굳이 다른 문인들과 비교를 하려 드는 내 옹졸한 마음도 있겠지만...

6권까지 엉성하게나마 속독해본 결과는... 아직은 소장목록에 들 만큼 마음에 들진 않는다. 작가분의 엄청난 노고를 감히 헤아릴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한사람의 팬으로서 객관적으로 볼때 아직은 훗날을 좀더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퇴마록의 여파가 정말 엄청난 것 같긴 하다. 그 시작에서부터 완결까지 나의 전 학창시절을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나 역시 그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여 집에 전권 모셔다놓은 열성신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우혁 이름 석자만으로도 무작정 덤벼들고 보는 나는, 아쉬운 소리는 늘상 하면서도 천상 그런 혈통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nne - 전10권 세트 그린게이블즈 앤스북스 10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 할 때, 두말없이 베스트 텐 리스트에 오르는 것이 바로 빨간머리 앤이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라는 만고불변의 명곡과, 미야자키의 섬세한 붓터치가 빚어낸 고즈넉하면서도 환상적인 프린스 에드워드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이야기. 그녀를 만난 지도 어느덧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내 방 책장의 아랫목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열 권의 알록달록한 책, 하나씩 집어들어 읽어내려가노라면 아직도 가슴이 아릿해진다. 수많은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아찔할 정도의 고층빌딩 아파트들에 밤이면 별 대신 인공위성이 빛나는 21세기 최첨단 문명 속에 살고 있는 나이지만, 앤과 함께 하는 그 순간만큼은 나 역시 흐드러지게 핀 눈의 여왕 속에 파묻혀 보고, 다이애너와 함께 기쁨의 하얀 길을 걷고, 제비꽃 골짜기에서 보랏빛 향기에 취해도 보고, 메아리집에서 미스 라벤더의 향긋한 차에 마음을 적셔보며, 꿈의 집에서 길버트와 맘껏 춤춰보고, 잉글사이드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저녁 한때를 함께 한다.

아마 영원히 이루지 못할 그런 환상속의 전원생활이겠지만, 신록이 푸르른 4월의 마지막 자락 한창 물오른 모교의 교정을 보며, 앤이 사는 그곳, 아름다운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한자락 베어내어 씌워도 보고, 험한 인생사 조그만 여흥처럼 맛보기도 해본다.

초등학교 시절 한창 많이 사보던 추억의 지경사 소녀명작 시리즈. 아직도 책꽂이 한쪽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지경사판 문고본으로 우리는 처음 만났다. 1권의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앤의 대박 실수 에피소드들을 정말 배꼽잡으며 읽었다. 그후 5학년 때쯤, 친해진 짝의 집에서 케케묵은 앤 시리즈를 발견했다. (지금도 출판사 이름은 생각이 안나지만 아마 국내 최초 완역본으로 생각된다.) 하얀 바탕에 점점 성장해가는 앤의 옆모습을 실루엣으로 그린 표지가 인상적이었던 책. 그것으로 앤의 '그후 이야기'를 만났고, 성장한 릴러가 청혼받는 마지막 장면까지 그 모든 것을 가슴속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헌책방에서 다시한번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만, 애석하게도 구입 시기를 놓쳐 아쉽게 돌아섰던 후로 완역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 결국 다시 만났다.

수많은 이들의 유년 시절과 함께 하며 어느덧 인생의 필독서로 자리잡을 만큼 전세계적으로 많은 친구들을 거느린 앤. 나 역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녀의 끝없는 수다와 개성있고 톡톡튀는 생각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권수를 거듭해갈수록 꿈많은 소녀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처녀, 연애와 결혼으로 무르익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여섯, 아니 일곱 명의 자녀를 둔 현명한 어머니로의 그녀의 성장은 진정 여성으로서의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요즘 같이 페미니스트들이 우글대는 세상에서, 재능있고 영리한 그녀의 결혼 후 소극적인 삶은 사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일 게다. 남편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행복한 잉글사이드가 내 인생 최고의 보물- 이라는 식의 생각은 실로 전근대적이며 고리타분하며 수동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나 자신 역시 그런 삶에 만족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가. 뒤에 E가 붙은, 그린게이블즈 그리고 잉글사이드의 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나름의 삶의 방식이요 행복인 것을.

ps. 서로를 부르는 영혼... 난 언제쯤 만날까, 나의 길버트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박동원 옮김 / 동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Moving' 내가 좋아하는 형용사이기도 하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좀더 고상하게 '심금을 울리는' 정도의 번역이 적당할 듯한 아름다운 형용사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권수의 책을 읽었지만 선뜻 이 형용사를 바칠만한 작품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런 나에게, 이미 어른의 세계에 어느 정도 절어버린 사회 초년병인 20대의 나에게도 아직 감동으로 다가오는 작품이 있다. 바로 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이다.

초등학교 꼬맹이 시절, 두꺼운 장편은 절레절레 손을 흔들던 무렵이라 얇고 가벼운 이 책은 쉽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어찌하지 못하는 성급한 성격 탓에 무슨 책이든지 목차, 서론 다음에 바로 결론으로 넘어뛰어버리는 나이기에, 괴물 망가라치바 열차가 소중한 뽀르뚜가 아저씨를 천국으로 보내버리는 장면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잠시의 정신적 공백.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독서 후기는 그저, 눈물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내가 그때 무슨 정신으로 이 책을 끝까지 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대학 와서 비로소 독서에 욕심이 생겼고,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 고전 다시읽기였다. 서점을 미친 듯이 뒤지다가 문득 발견한 것은 바스콘셀로스 아저씨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였고, 표지와 번역 등을 고려하여 한권을 바로 사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남은 것은 눈물과 충혈된 눈. 일년 후 교보에서 느낌표 선정도서인 이 책을 발견하고 훑어내려간 뒤 남은 것은, 주변의 시선에 부끄럽고 멋쩍어 안보이게 살금살금 눈물을 훔치는 나였다.

참 이상하다. 왠지도 모르겠다. 내 유년시절은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지극히 평범했는데... 제제, 슈르르까, 밍기뉴, 뽀르뚜가, 고도이아... 이런 고유명사만 나오면 가슴설레는 이 기분은 대체 무얼까. 어렸을 때는 그렇게 맞고만 크는 망나니 제제가 불쌍했을 따름이었지만, 지금은 좀 다른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생각건대, 어른의 세계를 접하고 나서 밍기뉴와 루이스 왕이 있는 환상적 동심의 세계를 떠나버린 제제처럼, 철없던 시절의 때묻지 않는 순수함을 '빼앗기듯이' 벗어나버린 나의 마음이, 끝없는 추억과 과거로 회귀하고픈 한 마리 연어같은 존재... 이기 때문일지도...

ps. 괴벽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익숙해져버린 고유명사는 이미 하나의 번역된 활자이기보다는 그 작품 전체에 녹아 흐르는 이미지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별 다섯 개로도 모자라겠지만, 코팅 커버에 최초 완역본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는 역시 익숙한 때묻은 문고본보다는 못하는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