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 - 전10권 세트 그린게이블즈 앤스북스 10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 할 때, 두말없이 베스트 텐 리스트에 오르는 것이 바로 빨간머리 앤이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라는 만고불변의 명곡과, 미야자키의 섬세한 붓터치가 빚어낸 고즈넉하면서도 환상적인 프린스 에드워드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이야기. 그녀를 만난 지도 어느덧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내 방 책장의 아랫목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열 권의 알록달록한 책, 하나씩 집어들어 읽어내려가노라면 아직도 가슴이 아릿해진다. 수많은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아찔할 정도의 고층빌딩 아파트들에 밤이면 별 대신 인공위성이 빛나는 21세기 최첨단 문명 속에 살고 있는 나이지만, 앤과 함께 하는 그 순간만큼은 나 역시 흐드러지게 핀 눈의 여왕 속에 파묻혀 보고, 다이애너와 함께 기쁨의 하얀 길을 걷고, 제비꽃 골짜기에서 보랏빛 향기에 취해도 보고, 메아리집에서 미스 라벤더의 향긋한 차에 마음을 적셔보며, 꿈의 집에서 길버트와 맘껏 춤춰보고, 잉글사이드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저녁 한때를 함께 한다.

아마 영원히 이루지 못할 그런 환상속의 전원생활이겠지만, 신록이 푸르른 4월의 마지막 자락 한창 물오른 모교의 교정을 보며, 앤이 사는 그곳, 아름다운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한자락 베어내어 씌워도 보고, 험한 인생사 조그만 여흥처럼 맛보기도 해본다.

초등학교 시절 한창 많이 사보던 추억의 지경사 소녀명작 시리즈. 아직도 책꽂이 한쪽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지경사판 문고본으로 우리는 처음 만났다. 1권의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앤의 대박 실수 에피소드들을 정말 배꼽잡으며 읽었다. 그후 5학년 때쯤, 친해진 짝의 집에서 케케묵은 앤 시리즈를 발견했다. (지금도 출판사 이름은 생각이 안나지만 아마 국내 최초 완역본으로 생각된다.) 하얀 바탕에 점점 성장해가는 앤의 옆모습을 실루엣으로 그린 표지가 인상적이었던 책. 그것으로 앤의 '그후 이야기'를 만났고, 성장한 릴러가 청혼받는 마지막 장면까지 그 모든 것을 가슴속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헌책방에서 다시한번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만, 애석하게도 구입 시기를 놓쳐 아쉽게 돌아섰던 후로 완역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 결국 다시 만났다.

수많은 이들의 유년 시절과 함께 하며 어느덧 인생의 필독서로 자리잡을 만큼 전세계적으로 많은 친구들을 거느린 앤. 나 역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녀의 끝없는 수다와 개성있고 톡톡튀는 생각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권수를 거듭해갈수록 꿈많은 소녀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처녀, 연애와 결혼으로 무르익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여섯, 아니 일곱 명의 자녀를 둔 현명한 어머니로의 그녀의 성장은 진정 여성으로서의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요즘 같이 페미니스트들이 우글대는 세상에서, 재능있고 영리한 그녀의 결혼 후 소극적인 삶은 사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일 게다. 남편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행복한 잉글사이드가 내 인생 최고의 보물- 이라는 식의 생각은 실로 전근대적이며 고리타분하며 수동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나 자신 역시 그런 삶에 만족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가. 뒤에 E가 붙은, 그린게이블즈 그리고 잉글사이드의 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나름의 삶의 방식이요 행복인 것을.

ps. 서로를 부르는 영혼... 난 언제쯤 만날까, 나의 길버트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