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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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7개 단편 소설



클레어 키건

부커상 최종 후보



클레어 키건의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년 오웰상 소설 부문 수상작,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이며 이미 한국에서 2023년 발행되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있다. 또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영화화된 "말없는 소녀"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대표작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익히 구매하여 내 책장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 책들에 있으나 아직 읽기를 보류하고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책보다 먼저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게 되었다. 타임즈에서는 클레어 키건을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라 칭했고 이러한 추앙의 글들은 나로 하여금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을 모두 읽겠다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푸른 들판을 걷다>는 이전 두 소설과는 다르게 단편 소설집으로 2007년작이며 2024년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에지힐 단편 문학상 수상작이며, 소설가 최은영의 강력 추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록된 단편작 중에서 [물가 가까이]를 추천했다하니, 귀가 얇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게에 충분했고 책을 펼쳐 들었다.





작별선물

첫번째 작품

문이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정말 바보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작별 선물 (p27)


첫번째 작품인 [작별 선물]은 나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클레어 키건이 준비한 그녀의 세상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기에 나에게는 조심스럽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으며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새로운 세계로 다가왔다. 정말 섬세한 단어와 문장들이 사용되어 글을 구성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작별 선물]은 그 뒷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유난히 길게 여운이 남았다.


가부장적이며 성적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어찌할 수 없는 어머니, 현실에 순응해 농사일을 하는 아들, 그리고 이러한 가정과의 작별을 결심하는 딸. 그렇게 새로운 삶을 떠나는 딸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후련함, 기대감과 희망의 세세한 감정이 나에게로 온전히 전해졌다.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의 마음, 울음이 터져 나올 듯한, 이제 되었다는 안도감과 막막하면서도 기대가 되는 자신의 미래를 이토록 짧은 단편에 녹여 냈다는 부분에서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소설에서 이미 나는 클레어 키건에게 반해버렸다.





푸른 들판을 걷다

두번째 작품

저 아래 강에서 갈색 물이 느른하게 흐른다. 단지 강이 아직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평화로워진다. 수면에 비친 반대편 강둑의 나무들 모습에 골이 진다. 구름 한 점이 하늘에 떠다닌다. 너무 창백하고 뜬금없어서 전날의 구름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는 주목에 걸린 신부의 베일을 가져온 것을 기억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느껴본다. 그런 다음 주머니에서 꺼내 떨어뜨린다. 베일이 수면에 닿기도 전에 후회하지만, 기회가 있었으나 이제 사라지고 없다.

푸른 들판을 걷다 (p56)


한 결혼식에 신부와 사제가 등장한다. 신부와 사제는 과거 서로 사랑했던 사이다. 사제의 길과 사랑하는 여인 중에서 결국은 사제의 길을 선택했고 이렇게 신부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베일에서 못다핀 미련을 가슴에 묻는다. 결혼식장을 떠나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어든다. 자신의 외로움에 직면한다. 양 한 마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하늘의 별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헤 사제는 길을 향해 들판을 다시 오르며 내일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사제라는 설정을 제외한다면 전여친의 결혼식장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찾아간 전남친의 이야기일 수 있다. 물론 사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지만 과연 그러했을까 싶다. 사제라고 하니 뭔가 그럴듯하게 포장되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금기된 성역을 넘는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하느님의 눈에도 정말 금기와도 같은 일일까 싶은데, 어찌되었든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미래를 내일을 어찌 살아갈까 현실로 돌아오는 마무리가 매우 현실적이어서 그 흥이 살짝은 깨졌지만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물가 가까이

다섯 번째 작품

어머니가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서 있다. 그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물가 가까이 (p160)


이 작품 역시 마지막의 여운이 크게 감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백만장자의 아들이자 하버드대 입학을 앞둔 스물한 살의 청년이 있다. 그에게 누군가에게 말못할 고민이 가득해 보인다. 순종적인 아들로 살아가고 있지만 공황과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그의 모습이 자신의 할머니의 모습과 대비된다. 강압적인 할아버지와 일평생을 살아왔다. 바다에 데려가 달라 조르던 색시는 일평생 돼지를 키웠고 할머니가 되어서야 바다에서 한 시간의 시간을 갖게 된다.


대비되는 이 두 명의 삶은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과연 누가 행복하고 누가 불행한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이 무용처럼 느껴지는 한 청년이 물가 가까이 서있고, 일평생 자유롭게 누리지 못했으나 그 짧은 한 시간 바다 앞에 선 할머니.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다. 이 짧은 작품이 나에게 무심코 던지는 질문으로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등장인물와 대비

단편 소설집의 특징

  • 매일 열심히 농장일을 하고 돈을 걱정하는 가부장적 아버지

  • 주눅, 결핍, 순응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어머니

  • 믿음직하나 우둔하고 현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아들

  • 똘똘하고 개척정신이 있으며 비밀을 가진 딸

이 소설집에 대체적으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큰 맥락적으로 이런 비슷한 인물들로 묘사된다. 전혀 다른 가정이고 다른 인물들이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나중에 뭔가 연결되는 혹시 연작소설인가 싶은 정도로 비슷한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다른 소설을 아직 읽지 못해 작가의 특성인지 이 단편 소설집의 특징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소설집에서 형성한 세계는 너른 초원에 무뚝뚝한 농장의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묵묵하나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고자 타개하고자 하는 인물은 대체적으로 딸이다. 같은 여성이지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과 개척정신으로 현재를 타개하는 힘을 가진 딸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어머니의 일탈은 영특한 딸을 얻게 했고, 우연히 생일 선물로 주워온 개는 어머니와 딸을 지키는 영민한 구세주였다.


다양한 삶이 등장한다. 적절한 대비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같은 상황 아래서의 아들과 딸, 전혀 다른 상황에서의 할머니와 아들. 자연스럽게 대비되는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깊이가 허를 찌른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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