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들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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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

'광기'서린 파멸과 비극의 서사

1996~1997년의 나이지리아가 책 안에 펼쳐져 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1996년의 나이지리아에서 내가 9살의 벤저민이 되어 형제들과 함께 숨쉬고 생활한 느낌이다. 나의 감정이 고스란히 벤저민에게 이입되었다. 책 안의 벤저민이 내가 됐다. 그 생활 안에서 가슴이 쓰렸고 슬펐고 탄식이 흘러 나왔다. 어린 벤저민의 시각에서 일련의 사건과 과정들이 담담하게 그려졌다. 어린 아이의 시각이지만 산뜻하고 발랄한 느낌보다는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소설을 지배한다.

'어부들'이란 단어는 매우 상징적이다. 아쿠레 마을의 주민들에게 버려진 오미알라강은 1995년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통행금지령을 내리지고 강은 경멸의 대상까지 됐다. 형제들은 어른들 몰래 이 강으로 고기를 낚으러 간다. 이 형제들은 스스로를 '어부들'이라 칭한다. 책을 모두 읽고 난 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매우 소름돋았다. "우리가, 우리 어부들이 너를 잡았으니 너는 도망칠 수 없어!" (p27) 무심히 지나갔던 이 노래 가사가 이 책 내용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시적 문장과 표현들, 박진감 넘치는 서사, 기독교와 미신, 정치적 이슈들까지 이 모든 것이 이 한 권에 잘 버무려져 있다. 어느 하나 이질감없이 완벽한 하나의 소설로 표현되었다. 작가의 감각에 감탄할 정도다. 완벽하게 완성된 소설 속의 세계는 마치 가상의 게임 공간에서 체험을 한 듯한 느낌의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나도 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된 지금은 더욱 자주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우리 인생과 세상이 바뀌어버린 것은 강으로 이런 여행을 떠나던 어느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시간이 중요해진 것은 바로 이곳, 우리가 어부가 된 그 강에서였다.

p24

지금은 성인이 된 벤저민의 시각으로 그려지는 소설은 매우 생생하다. 과거를 돌아보며 어느 잘못된 순간, 바꾸고 싶은 한 순간을 꼽으라 하면 어디일까. 벤저민은 성인이 되어 과거를 돌아봤을 때 어부가 된 그 강으로 여행을 떠난 순간을 떠올렸다. 책을 모두 읽고 나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그냥 그 강이 싫어질 듯 하다.

아구 부부와 이켄나, 보자, 오벰베, 벤저민, 데이비드, 은켐까지 모두 중요한 인물들이다. 마지막 벤저민에게 벌어진 사건까지 도달하기 위해 형제들과 부모의 처한 상황들이 물 흐르듯 연결되어 있다. 이 물줄기의 끝은 넓은 바다다. 시체가 떠 다니던 멀리하고 싶은 오미알라강의 물줄기들은 모두 결국 바다가 포용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마치 바다와 같았다. 부모와 형제들에게 매 사건은 상처투성이지만 결국 마지막에 도달해서는 모두를 포용하고 있다.

"아불루는 '이케나, 너는...'" 오벰베는 말을 멈추었다. 둘의 얼굴을, 그다음에는 땅을 바라보는 오벰베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오벰베는 땅으로 시선을 돌린 채로 말을 이었다. "아불루는, 이켄나, 너는 어부의 손에 죽을 것이라, 라고 말했어."

p116

아불루의 예언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처음에는 그 미친 아불루의 말에 왜 그리도 사람들이 동요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아불루에 대한 그간의 이야기들을 들으니 예언이 필히 일어날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간 아불루의 예언대로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미신이나 예언을 믿지 않는 나지만 이미 아불루의 예언에 깊이 동화되었고 언제 사건이 터질지 모를 불안감이 감돌았다. 형제들 역시 그 예언을 애써 부정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아불루의 예언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벤저민의 가족에 불안감은 날로 증폭되었고 불행의 씨앗 역시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 벌어져서는 안될 사건이 이내 발생하고야 만다. 너무 안타까운 사건이라 그저 소설을 읽는 내 가슴이 쓰리고 아렸다. 형제의 시각에서 부모의 시각에서 벌어진 사건을 두루 생각하고 내 일처럼 고민했다. 가족의 분노는 이런 예언을 한 아불루에게로 향한다. 나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무거운 어깨가 특히 나에게는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한때 그랬듯, 우리는 어부들처럼 저녁에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갈고리가 달린 낚싯대를 낡은 래퍼에 숨기고 있었다. 지평선의 모습은 내 안에 강한 기시감을 일으켰다. 지평선 표면에는 연지가 발라져 있었고, 태양이 붉은 구체처럼 걸려 있었다. 아불루의 트럭을 향해 가는 동안, 나는 거리의 나무 전신주가 쓰러지는 바람에 걸려 있는 전등이 산산조각 나고, 전구를 등에 달아놓았던 전선이 풀려 형광 심지가 꺾인 채 낮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p314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나는 이 구절에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아불루를 사냥하러 나가는 오벰베와 벤저민의 모습이 비장하고도 처절했다. 다양한 마음이 공존했다. 마음 한 켠에 이 어부들이 무사했으면 하는 마음, 아불루에 대한 내 자신도 모를 증오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불루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러운 미치광이라지만 절대 악이라고 하기엔 사실 뚜렸한 악행을 저지른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어부들을 응원하게 된다. 형제들, 이 어부들과 함께한 이 시간 이미 나는 한 어부가 되었다. 그저 제발 무사하기만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불루와의 실랑이와 어부들의 사냥, 군인들과의 조우, 그 이후의 일들 등은 순식간에 흘러 갔다. 한국의 법과 나이지리아의 법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2021년 현재 한국은 소년법 폐지 및 형사 미성년자 연령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벤저민과 함께 했던 1996년 나이지리아 여행은 매우 인상깊었다. <어부들>이 세운 놀라운 기록들이 매우 합당하게 여겨진다. 이미 치고지에 오비오마 작가의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를 읽고 인상에 크게 남았었다. 데뷔작인 <어부들> 역시 엄청난 소설임을 직접 확인했다. 세계 5대 문학상 수상, 부커상 파이널리스트, 31개국 출간 계약, 뉴욕타임즈, 옵저버 등 올해 최고의 책 선정 등 굵직 굵직한 기록들이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결과다. 이 방구석에서 이 책 <어부들>을 읽고 작가 치고지에 오비오마에게 기립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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