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아야 하는가 -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선 사상가 10인의 대답
미하엘 하우스켈러 지음, 김재경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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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가는여정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인간은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삶과 죽음에 의문을 가졌다. 오랜 시간 수많은 철학자 및 사상가들이 고뇌하고 연구하고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부투해 왔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답을 낼 수 없었던 주제다. 누군가 나에게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사리 답을 낼 수 없는 동일선상의 물음이다.

저자 미하엘 하우스켈러의 <왜 살아야 하는가>의 원제는 <The meaning of Life and Death> 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10인의 사상가를 통해 알아가는 이 여정이 우리에게 어스름한 힌트를 던져준다. '삶과 죽음은 바로 이거야' 라는 명확한 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 그렇기에 철학이 어렵고도 재미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5명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 윌리엄 제임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와 3명의 소설가 (허먼 멜빌, 마르셀 프루스트, 알베르 카뮈), 2명의 소설가 및 사상가(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를 만날 수 있다.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라 무언가 친숙하게 다가온다. 10명의 사상가로 부터 깊고도 심오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친다. 그 중 유독 내 마음을 뒤 흔드는 세 명의 사상가들에 대한 내용을 아래에 살짝만 적어봤다.

우리의 삶이 무의미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벌어지는 일에는 어떤 종합적인 계획이나 합리적인 구상도 반영돼 있거나 실현돼 있지 않다. 그 대신 세게의 중심에는 맹목적이고 강력하지만 전적으로 우둔하고 목적도 없는 분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바라기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세계에는 이런 사실만이 반영돼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p43)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인간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통과 고난은 삶 곳곳에 만연하고 삶의 본질이라는 사상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가장 핵심이다. 고통은 언제나 올 수 있는 것이기에 미리 준비하고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라는 부제목이 쇼펜하우어가 매우 부정적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시각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희망차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 "삶이 왜 이리 무의미한 것 같지?" 라는 의문에 원래 삶이 무의미 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삶을 더 바람직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즉, 행복하지 않음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가 원래 이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고통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 쇼펜하우어 철학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찬기지로 나는 죽음이라는 용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여지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한 채 삶이라는 나무에 매달려 있다. ... 물론 나에게는 끔찍한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주는 꿀 두 방울이 있다. 바로 가족을 향한 사랑과, 내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글쓰기를 향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조차 더 이상 달콤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레프 톨스토이 (p194)

삶은 뛰어난 사기꾼으로 온갖 유혹을 통해 죽음이라는 진실을 숨기려고 애쓰고 있다고 톨스토이는 <고백록>에 표현했다. 레프 톨스토이 편에서는 동부유럽 우화 '죽음이라는 용'을 통해 삶과 죽음을 빗댄 표현들이 매우 공감된다. 나의 삶에서 달콤한 꿀 두 방울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본다.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가족을 향한 사랑이 나에게도 역시 꿀 한 방울이 되겠으나 나머지 한 방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생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아느냐 모르느냐는 매우 큰 차이를 가져 온다고 생각한다. 한 편으로는 우리의 삶이 이 꿀을 찾아 떠도는 여정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저 나뭇가지에서 버티다보면 용이라는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이 삶은 달콤한 꿀을 맛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다. 생각만으로도 힘들고 고달프다. 이런 저런 참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우화다.

신의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를 재창조할 기회를, 더 고등한 형태의 인간으로 소생할 기회를 주었다. 신의 죽음은 곧 우리 인류의 부활이다. (중략) 확실성을 갈망하지 않는, 안전망이 필요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한다. 오히려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 기뻐하면서 가능성만을 즐기는 영혼이 돼야 한다. 삶이 무엇을 내놓더라도, 심지어 심연의 끝자락에 있더라도 춤을 출 줄 아는 자유롭고 쾌활한 영혼이 돼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p236)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다. 니체가 참 많은 명언을 남겼듯 이 책에도 상당히 많은 니체의 명언을 만날 수 있다. "죽음은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전쟁의 결과물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된다. 장수는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니체의 가장 특이하고 난해하다고 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인데 언젠가는 도전해보고 싶은 책이다. "죽음은 삶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좋은 것이다. 죽음 없이는 성장도 없다. 삶은 자기초월적이다."라는 말로 니체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삶을 인정해야 한다는 자세다.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나갈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죽음 조차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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