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하루키 월드의 시작을 여는 소설, 그 환상의 여행








1985년 무라카미 하루키가 서른여섯에 완성한 이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하루키 월드의 시작을 여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묘하게 나와 맞닿아 있다. 내가 태어난 해 1985년에 이 소설이 탄생했으며, 하루키가 서른 여섯에 이 소설을 완성했는데 지금 이 소설을 읽는 나의 나이가 서른 여섯이다. 대학 시절 이 책(당시 문학사상사 출판의 책)을 지인에게 추천 받아 지금까지 책장에 모셔두고 읽지 않다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민음사의 판본으로 읽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애틋함이 담긴 책이다.



가독성이 매우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두꺼운 책인 이유도 한 몫 했지만 구절 하나 하나를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하루키 문장의 매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느끼면서 책을 읽어나가는게 행복하고 흥미로우면서도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하루키의 그 무언가가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안에 어른거렸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두 세계가 번갈아 나오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련되며 도시적인 모습이 담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서정적이며 정적인 시골적인 느낌의 '세계의 끝'은 서로 다르지만 평행적 관계로 흘러간다. 이 두 세계가 나중에 어떻게 연결될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의 장르는 SF장르에만 국한하기 어려우며 몽환적이고 시적이며 모험, 스릴러적 요소 및 멜로의 요소도 담겨 있다. 마치 종합 선물세트와 같다. 보통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소설은 실패할 확률이 높은데 하루키의 이 소설은 오히려 풍부하게 다가온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두개골이 따스해지면서 빛나기 시작할 거예요. 당신은 그 빛을 손끝으로 조용히 더듬어 가면 돼요. 그러면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을 거예요.

p113

세계의 끝에서 두개골에서 꿈 읽기를 하는 주인공. 꿈 읽기를 통해 이해하는 바가 없지만 하루 대여섯개의 두개골에서 꿈을 읽는게 해야할 일이다. 그림자는 이 세계에 들어올 때 문지기에 의해 잘려나갔고, 그림자는 이 마을에 들어올 수 없어 별도의 공간에서 문지기의 관리를 받고 있다. 대부분의 기억은 그림자가 가지고 있고 둘의 만남은 문지기의 허락 하에만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과연 세계의 끝은 어떤 곳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내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는 듯 여겨졌다. 그 어이없는 엘리베이터와 벽장 속에 있는 거대한 구멍과 야미쿠로와 소리 뽑기, 모든 게 이상했다. 게다가 돌아오는 길에 받은 선물은 동물의 두개골이다.

p135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은 '계산사'다. 일을 의뢰받아 박사에게 가고 있다. 숨겨진 알수없는 공간으로 가고 있다. 박사의 손녀인 오동통한 소녀의 안내를 받아 박사를 만나고 돌아온 순간부터 상황은 조금씩 이상해져 간다. 알수없는 세력에게서 위협을 받고 상처를 입게 되며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 지하세계는 야미쿠로라는 공포의 존재로, 지상에는 거대한 계산사 '조직'과 기호사까지 혼란스럽다. 박사와 손녀딸의 도움이 절실하다. 혼란스러운 상황의 중심에 선 주인공은 실체를 위해 다시 박사에게로 접근한다. 지하 세계에 구축된 박사의 연구소로 향하는 첫부분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또한 조직의 공격으로 부터 피신한 박사가 숨어든 곳으로 손녀딸과 함께 향하는 그 길이 두려움과 설레는 모험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도 당신이 괴로워한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말이야. 그건 다들 통과하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당신도 참아야지. 잘 참아 넘기면 그다음에는 구원이 올 거야. 그렇게 되면 고뇌도, 괴로움도 다 없어질 거야. 모두 사라져. 순간적인 기분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그림자는 이제 잊어. 여기는 세계의 끝이야. 여기서 세계는 끝나고, 더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p200

이 세계의 끝은 뭔가 이상하다. 과거의 기억을 잃고 주어진 일을 하는데 고뇌와 괴로움이 없고 모두가 평온하다. 주인공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도서관의 그녀에게 마음이 있으나 정작 그녀의 마음은 진짜 마음이 아니다. 진정한 그녀의 마음이 없기에 그녀에게 다가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심히 고민이 된다. 후반부에 세계의 끝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부분은 나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매우 인상적으로 봤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이 생각났다. 무의식의 세계와 현실의 연결이라는 부분에서 이 소설과 상당히 닮아 있다.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어요." 통통한 여자가 말했다. "사랑이 없으면, 그런 세계는 창밖을 지나가는 바람과 똑같아요.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잖아요. 아무리 많은 여자를 돈으로 사도, 어쩌다 만난 아무리 많은 여자와 자도, 그런 건 진짜가 아니에요. 아무도 당신의 몸을 꼭 껴안아 주지 않아요."

p422

사랑에 대한 이 멘트를 기억해 두고 싶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가진 생각일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이 소설에서 '마음'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박사의 통통한 손녀딸이 자꾸 주인공을 유혹하지만 주인공의 마음은 도서관의 그녀에게 가있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도 도서관의 그녀와 함께 하길 선택한다. 하루키 소설을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사랑에 인색한 듯 하면서도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항상 유념하고 있는 듯 하다.

우선 마음의 문제야. 너는 이 마을에 싸움도 증오도 욕망도 없다고 했어. 그건 아주 좋은 일이지. 나도 기운만 있으면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나 싸움과 증오나 욕망이 없다는 건, 즉, 그 반대도 없다는 뜻이야. 기쁨과 축복과 애정 같은 거 말이야.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생겨날 수 있는 거라고. 절망이 없는 축복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그게 내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

p651

무언가 완벽해 보이는 이 '세상의 끝'은 공교롭게도 '마음'이 없다. 사람들에게 마음이 없기에 평온하고 잔잔하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의 관계는 박사의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소설 안에서 드러난다. 어쩌면 세계의 끝은 완벽한 유토피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걱정과 고민이 없는 세상을 누구나 바라지 않는가. 하지만 유토피아적 모습은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세계인가라는 의문점을 가져온다. 싸움과 증오, 욕망이 없어 좋지만 기쁨과 축복도 없다는 사실에 뭔가 이 모습에 의구심이 샘솟는다. 정말 이것을 우리가 원하는 건가. 주인공이 그토록 원했던 평행세계인 세계의 끝이 정말로 그가 원했던 세계인 것일까.

"그렇게 멋진 세계인지 어떤지는 나도 몰라." 그림자가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야.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도 있고 너는 그곳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거기에서 죽어. 네가 죽으면 나도 사라져.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야."

p762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은 스스로의 선택은 아니었으며 그 마지막을 기다리는 모습이 지속적인 여운을 남긴다. 그 끝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았기에 더욱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세계의 끝'의 주인공 역시 그림자를 보내고 머무는 것으로 선택하는데 사실 이 마지막 부분이 나에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미 포기한 주인공의 마음이 세계의 끝의 주인공에게 전해진 것일까. 책을 모두 읽었는데도 아직도 마음에 의문이 쌓여있다. 세계의 끝에 남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하루키가 남긴 여운이 한동안 지속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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