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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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겨울

가정 폭력의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소녀


우리에게는 생소한 벨기에 작가 '아들린 디외도네'의 장편 소설 <여름의 겨울>이다. 큰 기대감없이 읽기 시작했으나 나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열다섯 소녀가 과연 감당할 수 있는 일일까 싶은 내용들이 펼쳐지며 점차적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에 가슴 졸이며 책을 읽었다. 소녀의 시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상당하며 작품성, 스토리의 개연성, 섬세하고 세련된 문학적 문장들, 소녀가 성장해 가는 요소 등 소설은 자연스러운 흐름 위에 독자의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간다.



가정 폭력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은 아니다. 허나 소녀의 눈으로 그려지는 소설 속 세상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가득차 있다. 일명 쓰레기 방에 사냥의 전유물을 전시하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로 가축을 기르는 낙으로 살아가며 아메바처럼 지내는 어머니. 충격적인 사고를 목격하고 머릿속의 기생충에 지배되어 웃음이 없는 남동생 '질'. 이 가정의 중심에서 남동생을 사랑하고 어머니를 연민하는 주인공 소녀가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놀란 것 같았다. 놀란 눈빛이었다. 노인은 자기 얼굴이 고깃덩어리가 된 줄도 모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헤아리려는 것처럼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쓰러졌다.

p31

충격적인 사고가 벌어졌다. 소녀와 남동생의 눈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동생 '질'은 그 충격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변모한다. 동네에서는 고양이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강아지들도 사라진다. 남동생 '질'이 친칠라를 압정으로 고통을 가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모습을 소녀는 목격했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가늠하지만 어찌하지 못한다.

마리 퀴리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그녀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가 있어야 하는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어떤 역할을 해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

p75

소녀는 타임 머신을 꿈꾼다.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기 전으로 돌아가 남동생 '질'을 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며 타임 머신을 만들어 내겠다 다짐하고 단계를 밟아 간다. 이 소녀의 굳은 다짐은 성장의 발판이 된다.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과학 분야에 접근하며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간다. 모두 남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다.

나는 단지 기생충이 내 동생의 뇌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애를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었다. 내 존재 전부를 희생해야 한다 하더라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p112

타임 머신을 만들어 내겠다는 다짐이 무너지고 남동생 '질'이 점차 자신과 멀어지고 심각해지는 모습에 어찌해야할지 모른다. 마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상황에 어린 소녀가 무슨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 사이에 자신을 먹잇감 취급하는 아버지의 압박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어머니는 딸을 치료해 주며 마음을 공유한다. 그리고 돈을 벌어 떠나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묻지도 않을 거란다. 하지만 만약 사라져야만 할 어떤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류바의 남편이 텔아비브 항구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라.

p233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영 교수님을 만난다. 그리고 소녀는 과학 분야에 대한 지식의 갈증을 해소해 나간다. 또한 폭력의 고통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 교수님의 아내엔 야엘이다. 집에서 가면을 쓰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소리를 지르는 그녀는 과거 가정 폭력 가정들을 도왔으나 예기치 못한 피해로 고통받고 있다.

만약 아버지가 죽지 않는다면, 그 말 때문에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 너무 지쳐 있었다. 무언가가 끝이 나야만 했다. 사실 아마도 우리 넷 모두가 동의하는 유일한 것일 터였다. 이 가족을 끝내야 한다는 욕망.

p272

마지막 결말 부분을 읽고 많은 여운이 남았다. 가정 폭력의 중심 아버지에 대항하는 소녀의 몸부림이 극에 달하는 부분이다. 사냥으로 단련된 다부진 체격의 아버지를 한 소녀가 감당하고 당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의욕이 없는 어머니, 가녀린 소녀, 어린 남동생. 이 가족이 극한의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었을까. 가정 폭력에 고통받는 가족의 모습과 처절하게 짓밟히면서도 굳건히 나아가는 소녀의 모습에서 용기와 희망을 발견한다. 소녀를 응원하며 긴장감을 느끼며 읽는 소설이 뇌리에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14개 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를 직접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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